결국 원·달러 환율 1400원 돌파
원자재 값 급등·불확실성에 신규 투자 철회까지

[비즈니스 포커스]
그래픽=송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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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은행(Fed)의 3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 후폭풍이 한국 경제를 강타했다.

Fed의 고강도 긴축 기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의 여파로 달러 초강세가 이어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지는 달러당 1400원을 돌파했다. 이는 금융 위기 이후 13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1달러=1400원’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미국 물가 상승률을 Fed의 목표치인 2%로 되돌리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킹달러(달러 초강세)’ 기조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달러 가치가 급등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음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크게 오른 원자재 값에 더해 환율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 500대 기업 중 수출 제조 기업 재무 담당자를 대상(105개사 응답)으로 ‘환율 전망과 기업 영향’을 조사한 결과 기업들은 올해 연평균 환율 수준을 달러당 1303원으로 예상했다.

수출 제조 기업은 환율 전망을 기초로 수출입 단가, 영업이익 등 구체적 경영 계획을 수립한다. 기업들은 올해 초 연평균 환율 전망을 달러당 1200원대로 예상하고 사업 계획을 수립했다. 기업들은 올해 예상되는 환율 전망치가 연초 사업 계획 수립 시 수준을 웃돌아 원자재 수입 단가 등 생산비 증가로 이어져 영업이익이 평균 0.6% 악화될 것이라고 봤다.

환율은 수출 기업에 ‘동전의 양면’과 같아

고환율은 수출 기업에는 매출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지만 원자재를 비싼 가격에 해외에서 들여와 한국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고환율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동차 업종은 전체 매출에서 수출 비율이 높고 판매 대금을 달러로 받는다. 그래서 달러 가격이 오르면 환차익을 통해 단기 실적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다. 현대차는 환율 효과에 힘입어 올해 2분기 매출 35조9999억원, 영업이익 2조9798억원으로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 비용이 늘어 원가 부담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사들은 고환율이 악재다. 항공기 리스 부채와 유류비를 비롯해 대부분의 비용을 달러로 지급해야 해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환율이 100원 오르면 각각 3500억원, 2840억원 정도의 외화 평가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대오일뱅크는 아예 신규 투자 계획을 접었다. 충남 서산 대산 공장에 3600억원을 들여 추진했던 원유정제설비(CDU)·감압증류기(VDU) 설비 투자를 중단하기로 했다. 금리 인상과 원·달러 환율 급등 등으로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투자 계획을 보류하거나 전면 철회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4조3000억원 규모의 청주 신규 반도체 공장(M17) 증설 투자를 보류한 상태다. 한화솔루션도 1600억원 규모의 질산 유도품(DNT) 생산 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배터리업계는 환율 상승에 따른 매출 증대 효과를 누리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규모 해외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은 비용 부담이 커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 주 퀸크리크에 1조7000억원을 투자해 연산 11GWh 규모의 원통형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3개월 만인 6월 관련 계획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플레이션과 고환율 여파로 당초 계획했던 투자비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면서 보류한 것이다. 물론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등 투자 환경 변화를 고려해 기존 투자 계획 이행을 다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송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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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달러’, 미국 빼고 모두 고통

Fed의 고강도 긴축으로 인한 달러화 초강세가 발생하자 유로화·엔화·파운드화 등 각국 통화 가치는 역대 최저치로 폭락했다. 주요 6개 통화(유럽·일본·영국·캐나다·스웨덴·스위스)에 대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DXY)는 114선까지 오르며 20여 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물가 상승률을 2%로 되돌리기 전까지는 금리 인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미국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과 스위스 등 13개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2차 역(逆)환율 전쟁’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역환율 전쟁은 자국의 통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것을 말한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클레어 존스는 9월 22일(현지 시간) ‘Fed에 대한 글로벌 반격이 시작됐다’는 글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려는 Fed의 정책이 불러온 역환율 전쟁이 글로벌 경기 침체를 야기하고 저성장 국가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모리스 옵스펠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9월 21일 기획재정부·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 가치를 절상하면 인플레이션을 수출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달러 둠 루프(doom loop : 파멸의 고리)’가 시작되고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둠 루프는 달러화 강세가 전 세계 제조·무역을 악화시켜 실질 투자 위축과 성장 둔화로 이어지며 다시 안전 자산으로서의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는 악순환을 의미한다.

불붙은 ‘포스트 기축 통화’ 논쟁

전문가들은 킹달러가 다른 나라들에 미치는 부정적 여파가 결국 미국 경제에도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달러화 초강세가 탈달러화를 촉진해 ‘포스트 달러 시대’가 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루치르 샤르마 록펠러 인터내셔널 회장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에서 하나의 통화가 기축 통화로서 달러를 대체하지 않고 여러 통화가 기축 통화 역할을 담당하는 ‘포스트 달러 시대’가 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금융 역사상 기축 통화가 누린 수명이 평균 94년이기 때문이다. 1921년부터 기축 통화로 쓰인 달러의 나이는 100세가 넘었다. 과거 기축 통화 유지 기간을 살펴보면 포르투갈(1450~1530년) 80년, 스페인(1530~1640년) 110년, 네덜란드(1640~1720년) 80년, 프랑스(1720~1815년) 95년, 영국(1815~1920년) 105년이었다.

달러 전의 기축 통화 역할을 했던 영국 파운드가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에 기축 통화 지위를 내주면서 패권까지 이양했던 것처럼 달러 패권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달러화가 기축 통화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달러 위기론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달러의 기축 통화 지위 상실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미국·중국 패권 전쟁 속에서 중국 위안화는 달러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최근 세계 국가의 외환 보유액에서 중국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외환 보유액 통화 구성(COFER)’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세계 외환 보유액 가운데 위안화 비율은 2.88%를 기록해 직전 분기 2.79%보다 0.09%포인트 올랐다.

하지만 기축 통화를 대체하기에는 위안화가 가진 한계가 뚜렷하다. 중국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는 관치 금융을 이어 가고 있는 데다 위안화의 외환 보유액 적립 비율과 자본 거래 시 사용 빈도가 달러화에 비해 현저히 낮아 달러를 대신하는 기축 통화가 되기는 시기 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