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부 장관·경찰청장 즉각 책임 물었어야” “참사를 투쟁의 불쏘시개로만 삼으려 한다”
홍영식의 정치판 정치는 타이밍이다. 재난 대응이든, 정책이든, 인사 문제든 적기를 놓치면 효과를 내기 어렵고 때론 정권을 위험으로 몰기도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때를 놓쳐 위기를 키운 사례가 또 하나 쌓였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처다.그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와 인사 타이밍을 놓쳤다. 사건 초기 매일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애도를 표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국정 총체적 책임을 진 대통령이 큰 참사에 대해 도의적이라도 맨 먼저 해야 하는 게 사과다. 하지만 애도를 표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과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의 첫 공식 사과가 나온 것은 사건 발생 엿새 만인 11월 4일이다. 윤 대통령은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추모 위령법회에 참석해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며 “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과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이미 정권으로 향하는 비판의 강도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 사태의 주무 장관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에 대한 경질 시기도 놓쳐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크다. 특히 이 장관은 사건 발생 이튿날인 10월 30일 “(경찰 인력을)미리 배치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해 화를 더 키웠다. 더욱이 윤 대통령이 이 장관을 조문에 동행시킨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장관·청장은 사법적 책임 앞서 정무적 책임 지는 자리
국민의힘의 한 중진 의원은 “사건 초기엔 사태 수습에 총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경질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다”며 “경찰의 부실 대응 사실이 적나라하게 적힌 112 녹취록이 공개돼 파장이 커진 11월 2일엔 대통령 사과와 함께 적어도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에 대한 인사 조치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인사 적기를 놓치면서 야당의 공격에 빌미를 줬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기 힘든 상황을 만든 꼴이 됐다.
윤 대통령이 사건 발생 9일째인 11월 7일에야 대국민 사과와 함께 책임자 문책을 언급했지만 때를 놓치면서 떼밀리 듯 했다는 인상을 줬다. 윤 대통령은 “철저한 진상 규명 결과에 따라 엄정히 그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때도 즉시 경질이 아닌 ‘진상 규명 후 문책’ 방침을 분명히 했다. 장관과 경찰청장은 사법적 책임에 앞서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무직 자리라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 장관은 경찰청·소방서·지자체 등을 관할한다. 예방·대응·구조 등 모든 측면에서 늑장, 허술함이 드러나 골든 타임을 놓쳐 참사를 키운 만큼 즉각 책임을 지지 않고 부하 직원을 희생양 삼는 모습을 보인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자신이 관장하는 경찰 수사팀이 조사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 국민이 얼마나 수긍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즉시 경질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권은 내년도 부처 사업과 예산 계획 수립 등을 이유로 대지만 차관과 경찰청 차장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장관과 윤 청장이 어차피 물러날 것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물러난다고 야당의 공세가 수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물러나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할 것이고 대통령 책임을 묻는 수순을 밟을 것이 뻔하다. 그럴 바엔 수습해 놓고 그만두는 게 정상으로 봤다.”
반론도 적지 않다. 어차피 버리는 카드라면 미리 던져 불길 확산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야당의 공세는 지속되겠지만 장관과 청장이 사퇴한 마당에 야당이 계속 강공을 취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란 얘기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적기에 대응하지 못해 지지율이 하락한 사례는 많다. 윤 대통령이 9월 유엔 방문 중 일어난 비속어 파문도 그렇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이XX들”의 대상이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라고 주장했다. 한국 국회를 대상으로 했더라도 일찌감치 해명과 사과를 하고 국정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비속어 논란이 확대 재생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선 이태원 참사를 정략으로 활용한다는 논란이 크다. 야권 인사들은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는 바람에 이번 참사가 났다(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위원장)” 등 가짜 뉴스까지 동원해 이 사태의 책임이 윤 대통령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11월 5일 서울과 일부 도시에서 열린 추모 촛불 집회는 명분은 추모지만 곳곳에서 “윤석열 끌어내리자” 등 정권 퇴진 구호가 대거 쏟아졌다. 비극적 참사를 반정부 투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민주당도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의혹도 받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 캠프의 상임본부장을 맡았던 인사가 ‘이심민심’ 단체 대표를 맡아 집회 참가를 독려했다. 그는 또 민주당 의원들이 참여하는 텔레그램 ‘1번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참사 직후 “민주당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는 공당”이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완벽하게 지켜 내지 못한 책임에 대해 깊이 사죄드린다”고 한 것과 다른 것이다.
야권 인사들은 세월호 등 보수 정권 때 일어난 대형 재난 사고만 집중 부각하고 있다. 박찬대 민주당 최고위원은 “사람이 바뀌니 좋은 재난 방지 시스템이 이어지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때 비슷한 유형의 참사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9명 사망)와 인천 영흥도 낚싯배 침몰 사고(13명 사망), 2018년 밀양 세종병원 화재(47명 사망), 2019년 경기도 용인 물류센터 신축 공사장 화재(5명 사망), 2020년 이천 물류센터 창고 신축 공사장 화재(38명 사망) 등이 꼬리를 물었다.
국조·특검 모두 동원, 정쟁으로 질질 끌겠다는 것
민주당은 국정 조사와 함께 특별 검사 카드까지 들이밀고 있다. 이 대표가 “시급한 건 철저한 국정 조사에 임하는 것”이라며 “결국은 특검도 논의할 때가 됐다”고 불을 댕기자 지도부와 의원들이 일제히 지원에 나서고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수사와 국조, 특검의 동시 진행을 주장하고 국민의힘이 거부한다면 국조를 단독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실시된 국회 국정 조사를 보면 강제 수사권이 없는 한계 등으로 대부분 진상 규명은 제대로 못한 채 정쟁판으로 전락했다. 특검도 여당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특검과 역할, 활동 기간 등을 정한 뒤 수사 개시까지 수개월이 걸린다. 민주당이 검찰 상설 특검도 편파적이라며 외면하고 국회가 법을 만들어 별도 특검을 하자고 하는 것은 거대 야당의 입맛대로 끌고 가겠다는 속셈이다. 이태원 참사를 정략화해 윤석열 정부에 지속적으로 흠집을 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신군부가 광주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윤석열 정부가 젊은이들을 떼죽음하게 했다”,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체 희생자 명단을 확보해 추모 공간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마약과의 전쟁이 참사 원인이다” 등 민주당은 이태원 참사를 투쟁의 불쏘시개로만 삼겠다는 의도다.
여든, 야든 참사 원인을 밝혀내고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데 온 힘을 모아야 할 시기다. 여권은 윗선부터 합당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야당은 참사를 제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여야 모두 국민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고 있는 정치 현실을 다시 한 번 목도하고 있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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