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시장 위축으로 수요 예측 줄줄이 실패…내년 밀어내기 상장 우려
기업공개(IPO) 시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올해 3분기 공모 금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0분의 1로 급감했고 4분기 들어선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다. 강원도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로 자금 시장이 경색된 데다 가파른 금리 인상과 증시 침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투자은행(IB)업계는 IPO 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가 지속된다면 비상장 기업의 줄도산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올해 상장 철회 건수 역대 최다올해 상장을 철회한 기업 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통신용 반도체 설계 기업 자람테크놀로지가 12월 6일 상장을 접으면서 철회 기업 수는 총 13곳으로 늘었다. 올해 초 현대엔지니어링이 상장을 접었고 5월 태림페이퍼·원스토어·SK쉴더스 등이 줄줄이 수요 예측에서 고배를 마셨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골프 열풍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골프존커머스도 기관투자가들에게 외면받았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실적이 좋은 기업에도 기관투자가들의 자금이 몰리지 않고 있다.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서재와 바이오인프라·제이오 등도 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공모 기업의 가치가 하락하고 상장 후 주가가 상승할 유인이 줄어들자 투자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요 예측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기업들이 쌓이자 ‘대어’로 꼽혔던 CJ올리브영·라이온하트스튜디오 등은 상장 시기를 연기했다.
연말까지 공모에 나서는 기업은 스팩(SPAC : 기업 인수 목적 회사)이 대부분이다. 지난해만 해도 공모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12월까지 IPO 시장이 호황을 이뤘지만 올해는 3분기부터 이상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레고랜드 사태가 계기가 됐다. 4분기 들어 IPO 시장이 본격적으로 침체기에 돌입하면서 신규 상장 건수도 감소했다. 올해 신규 상장 기업 수는 70곳으로 지난해(91곳) 대비 23%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공모 규모도 약 16조원으로 지난해 19조7000억원 대비 20% 정도 줄었다. 하지만 올 1월 상장한 LG에너지솔루션을 제외하면 공모액은 2조8000억원으로 줄어든다. 연간 평균 공모액인 5조원보다 적다. 증권가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의 착시 효과를 걷어내고 나면 IPO 건수나 규모 면에서 모두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우회 상장 통로인 스팩, 코넥스 상장 급증
IPO 여건이 악화하자 난도가 낮은 스팩 합병 방식으로 증시 입성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증가했다. 올해 상장한 스팩 수는 41개로 지난해 25개보다 약 두배 가까이 늘었다. 지금까지 스팩이 가장 많이 상장했던 해인 2015년 45개와도 맞먹는 수준이다.
스팩의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최근 공모 성적은 좋지 않다. 너무 많은 스팩이 난립하다 보니 투자 수요가 분산된 데다 상장 후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떨어진 스팩들이 증가한 때문이다. 합병 대상인 기업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해 합병에 실패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비상장 기업 스튜디오삼익은 합병안이 주주 총회에서 부결돼 상장에 실패했다. 스팩 합병이 실패한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이다. 공모 규모가 큰 대형 스팩들은 투자금 조달에 애를 태우고 있다. 공모 규모가 850억원에 달하는 대형 스팩인 미래에셋드림스팩1호는 수요 예측에서 기관투자가를 모으지 못해 상장을 잠정 철회했다.
코스닥시장 전 단계인 코넥스시장에 먼저 진출하는 기업도 많아졌다. 지난 11월에만 5개 기업이 코넥스시장 상장을 위한 예비 심사를 청구했다. 올해 코넥스시장에 상장하는 기업 수는 11곳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6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코넥스 신규 상장사는 2016년 50곳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매년 감소세를 나타냈다. 연도별 신규 상장사 수를 보면 2016년 50곳, 2017년 29곳, 2018년 21곳, 2019년 17곳, 2020년 12곳, 2021년 7곳 등이다.
증권가는 거래소가 올해 5월 내놓은 코넥스시장 활성화 대책이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거래소는 코넥스 상장사의 상장 주선 수수료 등 상장 비용을 50% 감면해 주고 코스닥 이전 상장 요건을 완화했다. 또 개인 투자자의 코넥스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기본 예탁금 조건과 소액 투자 전용 계좌 제도를 없앴다. 한국성장금융은 내년까지 코넥스 스케일업 펀드에 총 1000억원을 출자할 계획이다.
이러한 시장 활성화 대책에도 불구하고 투자 심리를 되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IPO 시장 참여자의 수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DB금융투자에 따르면 기관투자가의 수요인 공모주 펀드 설정액은 연초 대비 36.7% 감소했다. 개인 수요를 가늠할 수 있는 증시 주변 자금인 고객 예탁금과 미수금 규모는 46조8000억원으로 연초 대비 33.1% 감소했다.
공모주 수익률이 하락한 것도 이유다. 지난해 상장한 차량 공유 업체 쏘카와 2차전지 분리막 제조업체 더블유씨피 등은 공모가를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상장 후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면서 투자 심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연초부터 쏟아지는 대어…시장 분위기 좌우할 듯
내년에는 컬리·골프존카운티·케이뱅크 등이 공모에 나설 예정이다. 컬리와 골프존카운티는 지난 8월 22일 예비 심사 승인을 받아 내년 2월 22일 전에는 공모 절차를 끝내야 한다. 상장 예비 심사 효력이 6개월이기 때문이다. 케이뱅크는 3월 30일 이전에 상장하지 못하면 예비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이들 기업은 해외 기관투자가를 모집해야 하므로 ‘135일 룰’도 적용된다. 135일 룰은 해외 투자 설명서에 포함되는 재무 제표를 작성한 시점으로부터 135일 이내에 청약 대금 납입 등 상장 일정을 마쳐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3분기 재무 제표를 작성한 시점을 기준으로 2023년 2월 중순까지 공모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
증권가는 연초부터 대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IPO 시장의 불씨가 살아날지 주시하고 있다. 다만 일정이 겹치면 투자 수요가 분산될 가능성도 있다. 올 1월 LG에너지솔루션이 기관투자가의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이후 한동안 수요 예측 결과가 저조했던 사례도 있다.
투자은행(IB)업계는 내년에도 IPO 기업 수나 공모 규모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LG CNS·SK에코플랜트 등 2023년을 목표로 상장을 준비해 온 기업뿐만 아니라 지난해 상장을 철회했던 기업들까지 가세하면 지난해보다 공모 규모는 더 클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현재 약 50개 기업이 상장 예비 심사를 받고 있고 승인을 받고 공모 시기를 조율 중인 기업이 20여 곳에 이른다. 내년 상반기 밀어내기 물량이 몰릴 수 있다.
증권가는 현대엔지니어링·현대오일뱅크·SK쉴더스·원스토어 등은 상장 예비 심사를 한 차례 받은 경험이 있는 만큼 이른 시일 안에 공모 절차를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상장을 연기한 CJ올리브영·SSG닷컴·11번가 등도 주식 시장 입성을 노리고 있다.
관건은 내년 1분기 상장하는 대어의 흥행 여부다. 한 투자 운용사 관계자는 “연초부터 대어들이 줄줄이 수요 예측에서 실패한다면 시장 분위기가 더욱 악화할 것”이라며 “자금 조달이 시급한 기업들이 IPO를 하지 못하고 재정 위기에 빠지면 벤처캐피털과 사모펀드의 손실이 커지고 다시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예진 한국경제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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