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애정과 신뢰 훼손…일터에서 나를 보는 관점 바꾸기, 도움 구하기로 연결하기

[안주연의 다시, 연결]
“승진 누락, 원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안주연의 다시, 연결]
직장 생활 29년 차 50대 중반의 가장입니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에서 근무했습니다. 지방 지점에서 직장 생활을 16년간 했지만 본사의 요청으로 서울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서울 영업 지점 근무 중 지점장이 판매 성과를 조작하는 일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이행하고 제 업무 성과를 형편 없이 폄훼하는 행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타 부서로 이동을 요청해 해외 주재를 하게 됐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근무 기간 후반기에 데자뷔 같은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당시 저는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도 수행했고 터무니없이 부여받은 목표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성과 조작으로 예상대로 승진에서 누락됐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알기 어렵지만 지방 출신이라 마땅히 무시해도 되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의문도 들었습니다.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원동력이 사라져 현재는 휴직한 상황입니다. 다행히 제2의 월급은 만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늦은 자녀 양육과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일과 시간에 집에 있고 가족과 대화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아직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복직과 동종 업계 이직을 준비하려니 트라우마가 심하고 휴직 중인 현재의 삶도 크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승진 누락, 원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안주연의 다시, 연결]
경호(가명)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경호 님의 편지에 요약된 것은 대기업에 입사해 약 30년간 일한 시간과 경험들입니다.
우선 성실하고 꾸준하게 달려오신 경호 님의 노력과 성과에 경의를 표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 온 회사에서 그렇게 노력해 이룬 실적이 폄훼를 넘어 조작당하는 일을 두 차례나 겪으며 느낀 ‘무방비 상태로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고통 또한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편지를 읽으며 떠오른 첫 느낌은 “아, 경호 님은 굉장히 ‘으른’이구나”였습니다. ‘으른(어른)’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말인데, 말맛을 살리기 위해 소리나는 대로 적어 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으른’은 세상의 편견이나 제약을 현실적으로 감안해 받아들이며 감정을 느끼지만 그 표현이 절제돼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역할과 일을 파악해 성실히 해내고 본인의 능력을 불공정한 방법으로 출세하거나 타인을 괴롭히는 데 사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가요, 경호 님. 경호 님은 이런 어른이 되고자 노력해 오지 않았나요. 경호 님의 노력들에 대해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애도 많이 쓰셨습니다. 실제로 경호 님 덕분에 같이 일했던 많은 직원들이 성과도 내고 지지감을 얻으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이쯤 읽으면 누군가의 얼굴들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떠오른 후배와 통화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넌지시 제안해 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심리적 발달 단계와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에릭 에릭슨의 중년기 과제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40~60대에 성숙한 사람은 직장·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통해 유한한 삶의 의미와 궤적을 남기는 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에릭슨은 이러한 생산성(generativity)이 다음 세대를 양육하며 지도하는 돌봄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중년은 미래의 세대를 가르치고 안내하고 격려해 주는 멘토의 역할, 자녀 양육에 힘쓰는 부모 노릇, 예술적·창의적 표현 등을 통해 자신의 생산성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는 ‘어른스러운 면모’를 갖춘 경호 님이 실질적 업무 성과 외에도 동료과 후배 직원들을 보호하고 이끄는 폭넓은 생산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조직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을 힘들게 한 조직 내의 적절하지 않은 보상, 공정성 문제가 후배들에게도 지속되지 않도록 자신의 리더십과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 온 것, 이것이 경호 님의 가장 큰 강점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강점에는 약점 또한 내포돼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으른’에 투영돼 있는 사람됨이란 사실 연속적이기 어렵습니다. ‘으른’의 뒷모습에는 의외로 아이 같은 면도 많이 있겠다 싶은 거죠. ‘어른됨’이라는 의젓하고 멋진 모습을 유지하는데 애를 쓰다 보면 어느 부분의 덜 어른됨은 부정당하거나 숨겨지며 ‘없는’ 취급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는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대처 기술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혹시 경호 님이 직장에서 두 번의 큰 사건도 ‘어른스럽게’ 견뎌 내느라 고통과 분노를 억압하고 싸움이나 외부 갈등을 줄여 가며 상황을 수습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경호 님의 동료와 회사, 나아가 세상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훼손됐을 수 있습니다. 담담히 쓰셨지만 사연에서 상처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생의 에너지를 잡아먹다가 비슷한 걱정이나 자극이 들어오면 당사자를 불안하거나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호 님에게 휴직 기간 동안 꾸준히 심리 상담을 받아보길 권합니다. 상담을 통해 눌러왔던 아픔과 응어리를 어느 정도 풀어 낼 수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경호 님은 타인과 소통하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나갈 때 빛이 나고 행복한 분입니다. 회복 시기가 마무리되면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며 특유의 생산성을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복귀를 생각하면 실망이나 배신감을 느낄 일들을 다시 겪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설 수 있어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예전과 다른 모습을 준비해 보기를 제안합니다. 경호 님은 이미 실력과 생산성을 갖춘 분이기에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삶의 가치관 혹은 사람됨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살아온 궤적에 몇 가지의 관점 혹은 전략을 새롭게 취하는 정도로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어른스러움과 자기다움을 적절히 배합해 삶의 새로운 평형과 동력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앞서 대처 기술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화가 날 때 화를 적절히 내고 싸워야 할 순간에 싸우고 도망가야 할 상황에선 빨리 도망치는 것이 바로 적절한 대처 기술의 사용입니다. 그중에서 경호 님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서의 인식와 감정의 교류입니다. 경호 님의 강한 책임감은 일하지 않는 아빠를 보는 아이들의 걱정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하지만 휴직 기간은 아이들과 아빠가 시간을 충분히 공유하며 사랑의 마음을 나눌 기회이기도 합니다. 부인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생활의 보완, 일상적인 사랑과 관계를 누리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에릭슨의 중년기 과제의 모습과도 맞닿습니다. 그러나 숙제가 아니라 경호 님의 진심이 움직여 줘야 가능한 일이죠.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지금-여기’를 배우는 다시 못 올 기회입니다.

다음으로는 일터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보는 일입니다. ‘지방 출신이라 마땅히 무시해도 되는 인격’이라는 표현은 경호 님이 겪은 사건들 속에서 풀리지 않는 지점을 되뇌다가 스스로 찾아본 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답은 보통 맞지 않습니다.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어렵고요. 일반적인 세상이나 조직의 시선이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신은 농담으로라도 자기 자신을 무시해도 되는 인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부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집중하면 자신을 자꾸 증명해야 하고 그것이 경호 님을 더 피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되 그 대신 그 시선 왜곡의 책임 또한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고통스러운 사건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발견한 경호 님만의 대처 방식과 강점·매력들을 통합해 더 복합적이고 단단한 직장 내 정체성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도움 구하기입니다. 보내준 편지를 읽으며 매우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 준 행동 그 자체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이때야말로 마음이 가장 열려 있을 때니까요. 경호 님, 이렇게 도움을 구하는 행동들을 사적인 관계망 안에서도 조금씩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까이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를 좀 도와줘’라고 말하며 요청해 보세요. 취약성을 드러내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효과적인 리더십 행동입니다. ‘의젓하고 책임감 강한’ 어른들이 가장 어색해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더 노력해 볼 여지와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색함을 버티고 나면 서로가 연결되는 순간이 옵니다. 권해 드린 심리 상담 또한 자신의 내면과 잘 연결되기 위한 일종의 도움 구하기입니다.

경호 님, 삶의 후반기에 서서히 접어든다는 현실과 함께 사회와 조직 내에서 역할 변화가 찾아오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믿는 방향을 향해 잘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의 질적인 변화일 수 있습니다. 인생 후반기에는 감정 인지, 정체성 재확립, 도움 구하기 등의 시도를 통해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자신의 면모들을 발견하고 통합해 가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온 실력과 생산성에 휴직 기간 동안 탐색한 자기다움과 자긍심을 더하는 것이지요. 가정 내에서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서 여태 다뤄지지 않았던 방향의 접근도 해보길 응원합니다.

진심으로 수십년간 애쓰셨습니다. 자신에게도 꼭 그 말을 해주세요. ‘나 정말 그동안 수고했고 고마웠다’고요. 그리고 홀가분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경호 님의 행복한 후반전을 기대합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