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대실패였다. 트럼프 정부 4년 내내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경한 중국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경제력 격차는 좁혀졌다.
‘미국의 위기’ 속에 조 바이든 정부가 출범했다. 최우선 대선공약이었던 기후변화 대책을 뒤로하고 2021년 7월 말부터 제조업 부활 대책을 추진했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산업대책은 중국의 전유물인 ‘굴기’라는 명칭을 붙여 맞대응했다.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것도 이때부터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근간은 ‘설리번 패러다임’이다. 미국의 기득권을 포기한 나바로 패러다임과 달리 십분 활용한 대책으로 적중했다. 트럼프 정부 마지막 해에 10년 이내로 좁혀졌던 중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다시 30년 이상으로 벌어졌다. 첨단기술제품도 부가가치가 높을수록 격차가 더 벌어졌다.
중국 경제는 위기상황을 맞았다. 대미국 수출이 막히면서 모든 경기부양책을 동원하더라도 효과는 보지 못하는 ‘경제정책 무력화’ 명제에 빠졌다. 중국 경제 앞날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는 내부적인 시각과 달리 조만간 디플레이션(이하 디플레) 국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서방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표방한 이후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노동집약적 제품을 중심으로 디플레 수출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은 첨단기술을 제외한 모든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윌리엄 페섹(블룸버그 칼럼니스트)이 경고한 차이나 쇼크가 현실로 닥쳤다.
최근에 시 주석이 택한 디플레 수출 대상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제품이다. 미국 제조원가의 최대 70%를 넘지 않는데 덤핑수출로 미국 첨단기술 산업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전략이다. 팍스시니카 구상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위안화 절하 카드까지 동원하겠다는 것도 원화 절하로 고민하는 우리로서는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중국의 2차 디플레 수출에 대한 미국의 고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국의 첨단기술 산업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와 다른 하나는 위안화 절하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두 과제 모두 미국 국민의 자존심과 직결된 만큼 대선을 향해 가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창구인 USTR은 이미 경제패권과 연관된 첨단기술 제품일수록 고관세를 부과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위안화 절하에 대해서는 조만간 발표될 환율보고서를 ‘환율심층대상국(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100% 보복관세를 때릴 수 있는 슈퍼 301조를 발동할 수 있다.결말은앞으로 미·중 관계는 어느 쪽으로 흐를 것인가. 양국 관계를 조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을 게임이론 관점에서 설명하면 전자는 참가국 간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시식’ 이기적 게임, 후자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섀플리-로스식’ 공생적 게임에 해당한다.
1970년대 들어서자마자 ‘핑퐁 외교’로 상징되는 미·중 간 관계는 ‘커플링(coupling·동조화)’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별세한 헨리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이끌어냈다. 닉슨의 방문 이후 베트남 종전이 선언된 데 이어 1979년에는 미·중 간 국교가 수립됐다.
국교 수립 이후 2012년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까지 미·중 관계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된다.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정치경제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개념은 중국을 포함한 비서구 국가를 글로벌화와 시장경제에 편입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략을 말한다.
미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중국의 대외경제정책 기조인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인 독일을 포함한 유럽 부흥에 기여했던 ‘마셜 플랜’이라 부를 정도로 중국이 성장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편향적으로 만들었다. 마치 중국이 없으면 대외경제정책이나 기업경영전략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총소득(GNI)이 WTO 가입 직전 미국의 17% 수준에서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에는 55%로 3배 이상 높아졌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글로벌 시대에 동참해 급성장한 것은 미국에 도움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과의 경제패권 경쟁자로 키우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미·중 간 관계가 커플링에서 디커플링으로 변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인 팍스시니카 야망을 꿈꾸었던 시 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대외경제정책 기조를 ‘주동작위(主動作爲·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로 급선회했다. 행동계획으로 중국의 세력 확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순차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양국 간 충돌이 정점에 이른 것은 이슬람 율법의 ‘키사스 원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라 강경한 중국정책을 추진했던 트럼프 정부 시절이다. 미·중 간 관계 개선에 다리를 놓았던 키신저마저 “제3차 세계대전이 우려될 정도다”라는 극단적인 비관론이 나오자 디커플링 전략의 한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중국이다. 중앙아시아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랭경온(政冷經溫·정치군사적으로 냉랭한 관계 속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 기류로 바뀌면서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잇달아 초청했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지난 3년 동안 가려졌던 수정된 워싱턴 컨센서스인 ‘설리번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반도체 전쟁 1000일째를 맞아 과연 양국 관계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 시대로 넘어가 대립에서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해 디리스킹에서 디커플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는 세계경제와 증시를 비롯한 국제금융시장, 그리고 한국 경제의 앞날을 좌우할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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