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간 ‘오픈 이노베이션’ 열풍…맥주 부산물로 만든 시리얼 바 등 성공 사례 속속 등장
[비즈니스 포커스] 맥주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 맥주 효모 등과 같은 부산물이다. 맥주 부산물은 칼로리가 낮고 단백질과 식이섬유 등 영양소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마땅히 활용할 방법이 없어 맥주 업체들은 맥주를 생산하고 남은 부산물들을 모조리 폐기해 왔다.오비맥주는 이렇게 아까운 자원을 재활용하지 못하고 버려는 것에 대해 늘 고민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이를 다시 사용할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기고 있다. 푸드 재활용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리하베스트’와 손잡은 것이다.
리하베스트는 다양한 부산물들을 재가공해 식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맥주 부산물도 잘 가공하면 밀가루를 대체하는 가루로 제조할 수 있다고 오비맥주에 제안했다. 오비맥주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 회사는 독점 공급 계약을 하고 맥주 부산물을 에너지바·시리얼 등으로 제품화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들은 일반 밀가루로 만든 시리얼 등과 맛은 비슷하지만 칼로리는 약 30% 낮추고 단백질과 식이섬유는 각각 2배, 21배까지 높인 것이 특징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힘을 합치자 그간 쓸모없이 버려지던 맥주 부산물이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함께 힘을 모으는 오픈 이노베이션 효과에 최근 기업들이 주목하고 있다. 수많은 기업들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활용한 혁신 사례를 만들어 낸 데 따른 것이다.
맥주 부산물의 시리얼 바 변신 역시 오비맥주가 꾸준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자사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스타트업을 물색한 결과다.
오비맥주 외에도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LG디스플레이·유한양행 등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대기업들, 잇단 CVC 설립도 주목자동차업계도 더 획기적인 신기술을 내부에 탑재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데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또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앞세워 이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벤츠코리아는 지난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두 곳의 한국 스타트업과 손잡았다.
첫째는 파이퀀트다. 파이퀀트는 손가락 접촉만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를 보여주는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이다.
알코올에 반응하는 파장대에 빛을 쏜 뒤 이를 분석해 혈중 알코올 여부를 알아낸다. 벤츠코리아는 이 기술을 글로벌 시장에서 출시 예정인 신차들에 탑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술을 마신 운전자들이 시동을 걸기 전 알코올 농도를 측정하도록 해 음주 사실이 드러나면 아예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둘째는 랭코드다. 대화형 인공지능(AI) 솔루션 개발 업체인 이곳을 통해 벤츠코리아의 사내 메신저를 구축했다. 이뿐만 아니라 랭코드는 독일 다임러(벤츠코리아의 모기업)의 AI 관련 자회사와도 기술 협력을 완료했다. LG디스플레이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신사업을 준비 중이다. 스마트 미러 제조사인 미러로이드와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미러로이드는 헤어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 미러 제품을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이 제품을 설치한 헤어숍을 이용한 고객은 AI와 증강현실(AR)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미러에서 사진을 찍고 본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이나 컬러 등을 가상으로 체험해 볼 수 있고 AI의 추천도 받을 수 있다.
고객의 스타일 상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미용 현장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LG디스플레이와 미러로이드는 헤어숍 외에도 스마트 미러 디스플레이를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찾고 있다
유한양행도 빼놓을 수 없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투자의 대표적인 성과가 폐암 신약 ‘렉라자’다. 유한양행은 2015년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도입하면서 오스코텍의 미국 자회사 제노스코와 손잡았다. 이후 꾸준히 연구·개발(R&D)을 거쳐 렉라자는 2021년 1월 31호 국산 신약으로 허가받았다. 현재 미국·유럽 허가 및 1차 치료제 허가 확대를 진행하고 있다.
향후에도 다양한 오픈 이노베이션 성공 사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들어서도 KT·현대건설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기업들이 오픈 이노베이션 행사를 열고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급변하는 소비자 니즈가 열풍의 배경
오픈 이노베이션은 개방적 혁신을 의미한다. 스타트업과 같은 외부 기업의 기술 또는 아이디어를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구축이나 제품 생산, 서비스 혁신을 이뤄 내는 것이다. 대략적인 과정은 이렇다.
한 기업이 스타트업 등을 대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데이’와 같은 행사를 열고 참여 기업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잠재력 있는 기업을 선정해 투자 또는 협업하는 방식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급변하는 산업 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경영 환경은 모든 기술 개발을 기업 스스로 해결하는 자체적인 R&D에 한계를 안겨줬다.
R&D는 긴 시간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제품 기획부터 예산 책정, 제품 출시 가능성 등 다양한 부분을 고려해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R&D를 통해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 니즈를 따라잡는 것이 어려워졌다. 막대한 기간과 돈을 투자해 선보인 제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이에 기업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내부의 자원과 외부의 기술력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오픈 이노베이션이었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잘만 진행되면 양측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다. 대기업은 R&D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여 적기에 제품을 내놓을 수 있고 스타트업은 대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투자를 받거나 판로 확대를 통한 수익 창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고 과거보다 소비자 니즈가 더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을 보이면서 기업들의 경영 환경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수많은 대기업들이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설립하고 있는데 이 또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행보다.
과거에는 금산 분리 원칙에 따라 일반 지주회사가 금융사인 CVC를 보유할 수 없었는데 2021년 12월 30일 개정 공정거래법이 시행되면서 CVC 보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현재까지 동원·GS·F&F·효성·빗썸·포스코·CJ 등의 대기업들의 기업집단이 지주회사 내 CVC를 설립·인수했다.
VC가 단기적인 투자 차익을 내기 위한 투자인 반면 CVC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타트업과의 성장과 협업 가능성 등을 들여다보고 지원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사업적 연관성이 높은 벤처기업은 경영권을 인수할 수도 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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