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재무부 발행 백금 1조 달러어치 동전을 미 중앙은행(Fed)이 사는 형태

같은 각도로 조 바이든 정부가 공화당의 반대로 연방 부채 상한이 조정되지 않으면 국가 부도 방지 최후 방안으로 거론되는 백금의 화폐화 방안은 미 재무부가 발행하는 백금 1조 달러의 동전을 미국 중앙은행(Fed)이 사주는 방안을 말한다. 영구채(consol bond) 발행, 바이 백(buy back) 등 제3의 부도 방지안도 함께 거론된다.
모든 경제 정책은 양면성을 갖는다.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작용이 크게 나타나 정책 당국이 경제를 망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부채의 화폐화와 같은 비전통적인 정책일수록 ‘정부의 실패’로 연결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위기 국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정상화시키는 출구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세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진 부채는 총 300조 달러에 육박해 한국 돈으로 35경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됐다. 작년 한 해 세계 200여개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의 4배에 달하는 것으로, 모든 세계인이 앞으로 4년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털어 넣어야 갚을 수 있는 규모다.
세계 부채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돈이 많이 풀린 데다 기준금리를 제로 혹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낮춰 경제 주체가 빚의 무서움을 모르게 하는 ‘부채 경감 징후군(debt deflation syndrome)’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자 조급해진 정책 당국이 가계와 기업에 부채를 권장한 것도 가세됐다.
부채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금융 위기 이전에는 선진국은 공공 부채가 주로 늘어났지만 금융 위기 이후에는 신흥국의 가계 부채가 급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세계 부채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금융 위기 전에는 22%에 불과했지만 작년 말에는 60%를 넘어 불과 10년 남짓 기간에 3배 이상 급증했다.
앞으로 부채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해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진 데다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위기가 계속됨에 따라 빚을 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3월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 방지 차원에서 금리를 올리자 빚이 또 다른 빚을 부르는 ‘나선형 악순환 고리’에 빠질 것이란 경고가 잇따른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부채가 과도하게 많아지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통화 정책 전달 경로(transmission mechanism : 통화 공급→금리 하락→총수요 증가→경기 부양)’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금융과 실물 간 따로 노는 ‘이분법 경제(dichotomy)’에 처하게 돼 돈을 풀어도 실물 경제에 들어가지 않고 금융권에서만 맴돌아 자산 거품이 쉽게 발생한다. 미국은 더 심하다.
재정 정책은 시차가 길어진다. 시차는 정책 입안에서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내부(행정) 시차’, 정책 확정 이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외부(집행) 시차’로 구분된다. 각종 선거 표심에 가장 민감한 부채가 많아지면 내부 시차가 길어지는 폐단이 있다. 확정된 재정 정책도 공공 지출 증가가 민간 수요를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 경기 부양 효과도 반감된다.


한국도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국난을 당할 때마다 국력을 소모하는 세 가지 고질적인 논쟁이 있다. 국가 채무, 외환 위기, 화폐 개혁 논쟁이다. 3대 논쟁 중 재정 지출이 가뜩이나 많은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 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부도나지 않겠느냐는 ‘국가 채무 논쟁’이다.
특정 국가가 부도날 가능성은 국민소득 대비 국가 채무 비율로 판정한다. 선진국은 100%, 신흥국은 70%를 넘지 않으면 재정이 건전한 국가로 분류된다. 최근 들어서는 같은 선진국과 신흥국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별로 차별화가 심해 판정 기준을 좀 더 세분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국가 채무는 소속 기관과 부채의 성격에 따라 세 가지 개념으로 구분된다. 협의 개념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가진 현시적 채무다. 광의 개념은 협의 개념에 공기업이 가진 현시적 채무가 더해진다. 최광의 개념은 광의 개념에 준정부 기관까지 포함되고 모든 기관의 현시적 채무뿐만 아니라 묵시적 채무까지 포함된다.
세 가지 개념대로 한국의 국가 채무 비율을 따져보면 협의 개념으로 45%, 광의 개념으로 73%, 최광의 개념으로 145% 내외로 추정된다.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세 가지 개념별로 국가 채무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난다. 공기업과 준정부 기관이 지나치게 많고 국가 채무 관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속해 있는 신흥국 위험 수준이 70%인 점을 감안하면 협의 개념을 적용하면 ‘재정 건전국’, 광의 개념으로는 ‘위험 경고국’, 최광의 개념으로는 ‘국가 부도 우려국’으로 분류된다. 한국의 대외 위상이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에 놓여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신흥국처럼 ‘국가 채무 위험 수준 70% 룰’을 적용받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다.
국제적으로 재정 건전성 분류 기준은 ‘협의 개념’으로 삼는다. 한국 내부적으로 국가 채무 논쟁이 일 때마다 ‘한국의 재정은 건전하다’는 국제 평가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세계 3대 평가사가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과 전망을 유지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재정이 건전하다면 현대통화론자(MMT)의 주장처럼 “빚을 내 더 써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국가 채무는 평상시에는 협의 개념이 적용되다가 위급하면 최광의 개념이 부각될 때가 많다. 윤석열 정부는 국가 채무 비율이 차이가 나는 점이 개선될 수 있도록 부채의 화폐화 논의에 앞서 공기업과 준정부 기관부터 정비해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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