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 거치며 현재 5대 은행 체제 완성…독점 비판하지만 ‘최선의 구조’라는 반론도

[스페셜 리포트]
서울 시내에 5대은행의 ATM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시내에 5대은행의 ATM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2008년 글로벌 경제를 얼어붙게 했던 ‘리먼브라더스 사태’는 글로벌 금융사가 세계 경제의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나게 했다. 거대 금융사의 도산은 대량 지급 불능 사태와 함께 실물 경제까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후 2011년, 미국의 씨티그룹·뱅크오브아메리카, 독일의 도이체방크와 중국은행 등 ‘G-SIB(초대형 은행)’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됐다.

한국도 은행이 망하는 경험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에 처한 한국에 국제통화기금(IMF)은 은행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은행이 기업에 대출해 준 채권이 부실해지자 이를 조속히 털라는 요구였다. 이 과정에서 몇 개 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의 5대 금융지주 체제로 재편된 출발점이었다.

은행은 ‘주식회사’지만 위기 시에는 도산을 막기 위해 공공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인프라의 기능이다. 공적 자금을 투입해 살려 놓았기 때문에 은행장 인사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2023년 은행의 ‘역할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부는 공공재라며 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의 은행들이 작년 사상 최대 이익을 낸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분위기다. 고금리·고물가에 대부분의 경제 주체들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의 엄청난 이익이 도드라져 보인 것이다. 각종 규제로 보호받고 있는 현재의 은행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라는 인식에 따라 대통령과 금융 당국은 은행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때마침 터진 미국 은행들의 연쇄 도산이다. 이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관심이다. 한국 경제에서 은행 산업이 거쳐 온 길을 돌아보며 은행의 ‘제 역할’을 짚어 봤다.
1921년 완공된 조선은행 본관. 현재 한국은행 본관이다.(사진=한국경제신문)
1921년 완공된 조선은행 본관. 현재 한국은행 본관이다.(사진=한국경제신문)

1. 금융 산업의 태동기

대한민국에 ‘은행’ 영업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78년이다. 금융감독원의 ‘금융 산업 역사’에 따르면 그해 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낸 것이 한국 최초의 은행 영업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은행 지점을 한국 최초의 은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은행은 어디일까. 금융인들은 조흥은행이라고 답한다. 1897년 한국의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설립됐다.

지금이야 우리·KB국민·하나·신한·NH농협이 ‘5대 은행’ 체제를 완성하고 있지만 외환 위기 전만 해도 ‘조상제한서’가 5대 은행이었다. 설립 연도 순서에 따라 조흥(1897년), 상업(1899년), 제일(1929년), 한일(1932년), 서울은행(1959년)을 말한다.

1899년 대한천일은행으로 발족한 상업은행은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해 대동은행·삼남은행 등을 흡수·합병했다. 1972년에는 한국 은행 최초로 민영화됐다. 하지만 IMF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됐다. 한일은행은 1932년 설립된 조선신탁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후 한빛은행은 2011년 우리금융지주에 편입됐다.

1929년 ‘조선저축은행’에서 시작된 제일은행은 1945년부터 일반 은행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 후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됐다가 2005년 스탠다드차타드에 인수되며 ‘SC제일은행’이 됐다.

1959년 설립된 서울은행은 1962년 전국 은행으로 인가받았다. 이후 외환 위기 부실 은행에 지정돼 여러 외국계 은행들에 매각 절차를 밟다가 2002년 하나은행에 인수됐다.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의 합병을 하루 앞둔 2006년 3월 31일 서울 조흥은행 본점 외벽의 간판이 철거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의 합병을 하루 앞둔 2006년 3월 31일 서울 조흥은행 본점 외벽의 간판이 철거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 확장과 구조 조정의 반복

정리하면 1960년대는 은행 제도 정비기로 볼 수 있다. 정부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은행을 활용했다. 저축은 은행을 통해 기업들의 자금으로 제공됐다. 조흥·상업·제일·한일·신탁은행이 주요 플레이어였다. 중소기업을 돕는 중소기업은행과 서민 금융을 위한 국민은행, 기업들의 외환 거래를 지원하는 외환은행, 건설업 자금 조달과 국민들의 주택 마련을 지원하는 주택은행 등이 모두 1960년대에 설립된다. 이와 함께 1도 1은행 정책에 따라 전국적으로 10대 지방 은행이 설립됐다.

1970년대는 두 차례 석유 파동으로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하면서 은행도 구조 조정을 겪었다. 시중에는 조흥·상업·제일·한일은행과 신탁은행과 서울은행이 합병한 서울신탁은행(1976년) 등 5개 은행이 살아 남았다. 그럼에도 수출 드라이브를 계속하기 위해 한국수출입은행(1976년)이 세워졌다.

1980년대는 한국 금융이 민간 중심으로 이동하는 시기였다. 은행이 산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신한은행·동화은행·동남은행·한미은행·대동은행 등이 모두 1980년대에 등장했다. 시중 은행이 급증한 것이다. 소득 증가로 은행은 개인들이 저축한 돈을 기업으로 보내는 기능을 넘어 독자적 영역을 확장하는 시기였다.

이런 확장은 1992년 평화은행 설립까지 이어지며 정점을 찍는다. 은행 산업의 성장은 한국에서 중산층의 확대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 중산층의 비율은 1994년 70%에 육박하며 정점을 형성했다. 이는 개인 자산의 증가와 금융 산업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은행들은 1990년대 초까지 산업화의 매개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금리를 비롯한 주요 금융 정책을 총괄한다. 사진은 
금융통화위원회 정기회의의 모습.(사진=한국경제신문)
한국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금리를 비롯한 주요 금융 정책을 총괄한다. 사진은 금융통화위원회 정기회의의 모습.(사진=한국경제신문)

3. 중앙은행의 등장

한 나라의 금융 경제의 주체인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금리를 비롯한 주요 금융 정책을 총괄한다. 한국의 중앙은행은 1909년 구 한국은행의 설립으로 일본 제일은행이 종전 한국 내에서 담당하는 업무를 양도받으면서 시작됐다. 구 한국은행은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한국의 중앙은행이 본격적으로 기틀을 갖춘 것은 1950년의 일이다. 1950년 5월 ‘한국은행법’이 공포되면서 조선은행이 폐쇄되고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창립됐다.

당시 한국은 격심한 인플레이션과 함께 금융 제도도 갖춰지지 않아 경제 질서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화 신용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갖춘 중앙은행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탄생한 한국은행은 1950년 7월 한국은행권을 최초 발행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의 역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부침을 겪었다. 한국은행법이 제정된 후 10년이 지난 1962년 당시 정부가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간 한국은행이 운영해 오던 외환 정책 기능을 정부로 이관했다. 또 한국은행의 예산에 대해 정부의 승인을 얻도록 하는 등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후퇴했다.

1997년에는 한국은행법에 많은 개혁이 이뤄졌다. 통화 신용 정책 운영의 자율성이 제고됐지만 한국은행은 은행 감독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그 대신 중립성 보장이 법률에 명시됐고 한국은행 총재가 정책 결정 기구(현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이 됐다.

외환 위기를 겪고 난 2003년 한국은행법은 그간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개선됐다.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의 구성원이 되고 대통령이 임명하면서 중립성이 강화됐다. 또 지급 결제 제도에 대한 감시 기능을 한국은행이 관장하게 됐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은행 예산의 범위를 급여성 경비 예산으로 축소함으로써 자율성이 커졌다.

한국은행은 “종전의 한국은행법 개정은 독립성과 기능을 약화시켰지만 2003년 개정은 진보적 개선을 이룸으로써 한국의 경제 발전 단계에 부합하고 국제기구가 요구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가에도 여전히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논란이다. 요즘은 ‘기획재정부 광화문 출장소’라는 소리는 듣지 않지만 정부의 정책 기조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 금융 통화 정책을 취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의 딜링룸.(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중구 하나은행의 딜링룸.(사진=한국경제신문)

4. 은행 역사는 IMF 전과 후로 나뉜다

1997년 한국 경제는 연초부터 몰락의 구간에 진입했다. 1월 재계 서열 14위 한보그룹의 부도가 시작이었다. 이어 기아 등이 줄줄이 쓰러졌다. 은행들이 기업에 빌려준 채권은 부실 채권이 됐고 은행들이 도산 위기 직전에 처했다.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긴급 구제 금융 지원을 요청했고 총 570억 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안에 합의했다.

IMF는 구제 금융의 조건으로 강도 높은 금융 산업의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에 대량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부실 은행을 우량 은행에 합병하는 과정에서 부채가 자본을 초과하는 부분에서는 예금보험공사가 공적 자금을 지원해 주고 은행이 갖고 있는 부실 채권은 자산관리공사가 처리해 주면서 건전성을 높였다.

은행은 줄줄이 간판을 내렸다. 1998년 1월 정부는 제일·서울은행을 부실 금융회사로 결정하고 공적 자금 지원 요청과 감자 명령을 내렸다. 또 그해 연말에는 12개 은행에 적기 시정 조치가 이뤄졌다.

같은 해 설립된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동화·동남·대동·충청·경기은행 등 5개 부실 은행이 퇴출됐다. 부실 증권사와 금융회사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한편 1999년에는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신용관리기금을 통합한 ‘금융감독원’이 설립됐다. 2002년에는 조흥·한빛·외환·평화·광주·제주은행이 2차 은행 구조 조정 대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 대형은행은 조흥 한빛 외환 제일 서울 은행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존해 승자가 된 신한· 하나· 국민 은행 등에 비해 기업대출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개인을 대상으로 담보를 잡고 안전한 이자놀이를 하는 은행들은 승자가 됐고, 기업을 대상으로 모험자본 창구 역할을 했던 은행들은 패자가 됐다"는 인식이 확산된 시기다. 현재 은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저변에는 "사회발전에 생존해 승장가 된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지금은 욕먹고 있지만 카카오뱅크라는 새로운 은행의 등장에 금융 소비자들이 환호한 배경이기도 하다.

1997년 한국의 은행 수는 무려 26개였다. 당시 은행은 금융 자율화에 속도가 붙고 금융 시장이 개방되면서 점포 수와 직원 수 모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은행들은 해외에서 1년 미만의 단기 자금을 빌려와 기업들의 재무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저금리로 대출을 해 줬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해 단기 자본을 개방했는데 이는 외환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IMF는 금융 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요구한 것은 경제에서 차지하는 은행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정부는 공적 자금의 60%를 은행 구조 조정에 투입해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 증자를 지원했다. 또 대규모 합병과 퇴출로 과감한 구조 조정을 시행했다. 구조 조정이 끝난 직후인 1998년 한국의 은행 수는 20%, 점포 수는 1000여 개, 직원 수는 3만8000여 명이 줄어들었다.


5. 5대 은행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의 은행들이 덩치를 키운 것은 정부 주도의 구조 조정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5대 은행’ 체제는 IMF 이후 인수·합병(M&A)과 2000년대 지주회사 전환을 겪으며 굳어졌다.

시중 주요 은행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은 2019년 창립 120주년을 맞은 우리은행이다. 1899년 대한제국 시절에 문을 연 대한천일은행이 전신이다. 고종 황제가 황실 자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하고 정부 관료와 조선 상인이 주주로 참여한 한국 최초의 민족 자본 은행이다.

대한천일은행은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했고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변경했다. 이후 IMF 구조 조정을 거치면서 1999년 한일은행과 대등 합병해 한빛은행이 됐다. 이후 2001년 평화은행을 흡수·합병하면서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거듭났다. 지주사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창립 120주년인 2019년의 일이다.

KB국민은행의 시작은 서민 금융 전담 국책 은행으로 1963년 출범했다. 이후 1995년 민영화됐고 외환 위기 당시 한국장기신용과 대동은행을 흡수했다. 뒤 이어 동남은행을 흡수했던 한국주택은행과 2001년 통합하면서 KB국민은행이 탄생했다. 그후 2008년 9월 KB금융지주 설립으로 종합 금융 그룹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총 13개의 자회사를 갖추게 됐다.

신한은행은 2006년 ‘100년 역사’의 조흥은행을 인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신한은행은 1982년 재일상공인들이 설립한 은행으로 현재 5대 은행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짧다.

신한은행의 조흥은행 인수는 은행권에서 ‘막내의 반란’으로 불렸다.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을 모태로 둔 조흥은행은 외환 위기 이전만 해도 부동의 1위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IMF 당시 조흥은행·강원은행·충북은행이 3자 합병했고 이후 2006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흡수·합병했다. 2001년에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현재 신한금융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1971년 한국투자금융에서 출발한 하나은행은 1991년 은행으로 전환됐다. 1998년 충청은행을 인수, 1999년에는 보람은행과 합병, 2002년 서울은행과 합병하면서 덩치를 키웠다. 이후 2005년 ‘하나금융그룹’을 출범시켰다.

하나은행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외환은행의 자회사 편입이다. 2015년 하나금융지주가 외환은행 인수를 마무리하면서 하나은행은 외환 부문에서 큰 경쟁력을 갖게 됐다. 외환은행은 한국의 외환 거래 대부분을 책임지는 독보적 경쟁력을 보유한 은행이었다. 직원들의 사기 진작은 물론 양 사의 조직 통합을 위해 김정태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부터 함영주 현 회장은 모두 ‘통합’을 1순위로 내세웠다. 지난해 연말 하나은행 행장에 취임한 이승열 행장이 외환은행 출신이다.

1961년 농업은행과 통합 농업협동조합이 설립됐다. 농민을 위한 금융회사의 시작이었다. 2012년 농협법 개정에 따른 신용·경제 분리 방침에 따라 현재의 농협금융지주가 세워졌다.
은행에 걸린 오늘의 금리 안내문.(사진=한국경제신문)
은행에 걸린 오늘의 금리 안내문.(사진=한국경제신문)

6. 은행이 직면할 미래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금융지주는 지난해 15조8506억원에 이르는 역대 최대 당기 순이익을 올렸다. 이자로만 총 39조6000억원을 벌었다. 은행은 고금리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을 외면한 채 ‘돈 잔치’를 벌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연일 쏟아졌던 은행권의 고연봉·성과급·퇴직금 보도는 은행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정부는 눈치도 보지 않는 은행의 행보의 주원인을 ‘독점’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5대 은행 체제를 깨기 위해 금감원은 인가를 세분화하거나 제4의 인터넷 은행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른바 시장에 ‘메기’를 투입하겠다는 의도다.

금융 당국은 인허가를 쪼개는 스몰 라이선스, 소규모 특화 은행, 인터넷 전문 은행이나 지방 은행 추가 인가 등 다양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여기에 카드사나 보험사 등 비은행업권인 제2 금융권이 은행 영업에 진입하도록 허용하는 종합 지급 결제업(종지업)도 고려하고 있다. 카드사나 보험사에 ‘지급 계좌’ 취급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다. 테크핀 회사들도 금융업 전반에 대한 진입 장벽 완화를 요청했다. 테크핀 업체들은 은행업의 신규 플레이어로 진입할 수 있도록 소규모 특화 은행과 예금·대출·외환 등 일부 업무를 테크핀 등 제삼자가 대리 수행하는 ‘은행 대리업’의 도입을 예로 들었다.

금융 당국은 은행의 인사도 들여다볼 예정이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은행의 지주회사 전환은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 전문성을 키웠다. 하지만 여전히 금융지주에서 은행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다. 4대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들 역시 은행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인물들이 다수다. 또 증권·보험·카드 등 비은행 계열사에도 은행 출신 CEO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은행도 억울한 점이 있다. 지난해 11월 금융 당국은 은행권에 수신 금리 인상 자제를 요청한 바 있다. 시중 은행에서 금리를 인상해 수신 경쟁이 발생한다면 은행권에 돈이 몰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출 금리와의 차이가 더 벌어졌는데 이를 ‘이자 장사’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은행 산업 체제가 IMF 관리체제를 거친 후 마련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03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소가 퍼낸 ‘외환위기 이후 금융 구조 조정이 한국의 은행 산업 경쟁도에 미친 영향’에서는 “외환 위기 이후 금융 구조 조정을 통해 한국의 은행 산업이 과거 관치 금융의 틀을 벗어나 수익을 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로 탈바꿈했고 그 결과 은행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형화·겸업화를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단순히 은행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이를 ‘독점’으로는 볼 수 없고 영업 환경과 신규 플레이어의 진입 가능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2003년의 분석이지만 현재의 은행 산업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은행 스스로 이익 구조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4대 금융지주에 속한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은 지난해 33조원에 가까운 이자 이익을 냈다. 이는 전년보다 23.2% 증가한 것이다. 금융지주의 실적에서 은행이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하면 지난해 이들이 기록한 최대 실적에서 이자가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간 한국의 은행들이 부동산을 담보로 한 가계 대출 등 비교적 ‘안전한’ 대출에 몰두하면서 손쉽게 이익을 창출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