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자유화 협력체 APEC, 회원국 통상외교에 기여
美中 패권 전쟁 속 실적 필요한 바이든, APEC 활용할 것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1980년대 말에서야 독자적인 대외통상정책을 수립했다. 이전에도 양자 및 다자간 통상협상이 있었지만, 이들 국가는 겨우 자국 관점에서만 이를 검토했을 뿐 국제관계 속에서 주도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통상전문 인력이나 협상 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1986년 국제사회는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세계 무역자유화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로 명명된 이 협상은 초기 몇 년을 허송세월하다가 1980년대 말에 들어서야 의미 있는 진전을 거두게 됐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럽연합(EU)이 추진되고 있었고, UR 협상이 부진해지자 미국은 북미 지역 무역자유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의 블록화에 위기감을 느낀 국가들은 UR 협상의 중요성을 그제야 인식하게 됐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위기감은 더욱 컸다. 주로 유럽 국가와 교역을 하던 호주는 EU 결성으로 주력 수출시장 상실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에 1989년 호주는 아시아 유일 선진국이던 일본과 협의해 아시아·태평양(아태) 지역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장관급 모임인 아태경제협력체(APEC) 결성을 제안했다.

초기 APEC에는 호주·뉴질랜드·한국·일본·미국·캐나다와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 등 6개 선발 아세안 국가들이 참여했고,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의장국을 맡기로 했다. 1993년 의장국은 미국이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장관급에서 국가정상급으로 회의를 격상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APEC은 각 회원국의 최고 통상정책 포럼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후발 아세안 4개국이 가입했고 칠레·페루·러시아 등도 참여하면서 회원국 수는 21개로 늘어나 APEC은 명실공히 아태지역 최대 경제협의체로 발전했다.

APEC 무역자유화 논의는 당시 진행되던 UR 무역협상과 맞물려 추진됐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APEC 정상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통상협상 인력과 조직을 확충했고, 각 회원국은 APEC을 전담하는 상설조직 외에 다수 관련 부처에 지원 조직을 가동했다. 이 정상회의는 자연스레 UR 협상을 이끌어 나가는 동력을 제공하게 됐다.

이러한 통상인프라 구축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도 기여하게 됐다. 이 시기에 APEC은 자체 무역자유화 모멘텀을 만들어냈다. 회원국들은 자국의 통상정책 및 무역자유화 내용을 보고서(IAP)로 매년 제출하기로 했고, 이는 회원국의 개방정책을 이끌어 내는 압력(Peer Pressure)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중국이 WTO 가입 절차에 돌입했다. 중국은 자국의 WTO 가입을 위한 시장개방의 구체적 내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채널로 APEC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APEC 회원국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2001년 중국은 드디어 대망에 그리던 WTO 정회원국 지위를 획득했고, 13년 후 세계 1위 무역 국가로 등극했다.

안타깝게도 이후 APEC의 역할과 위상은 서서히 약화됐다. 무엇보다 미국의 관심이 줄었다. 또한 자유무역협정(FTA) 지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구속력 없는 협의체인 APEC에 대한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APEC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됐다. 금년도 APEC 정상회의는 오는 11월 중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중국 견제를 위해 지난해 미국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창설했다. APEC 회원국 대부분은 IPEF에 참여하고 있다. IPEF 협상과 APEC 정상회의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을 짐작할 수 있다.

경제 부진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미 대선에서 대외정책을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내세워야 한다. 따라서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올해 APEC 정상회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APEC 위상이 회복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적지 않다. 오히려 지난 2018년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미·중이 격돌했던 상황이 올해 재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