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에 ‘실수요 적체’ 시작, 2011년 연상케 해
‘빌라왕’ 사태에 구축 소형 아파트 전세도 가격상승 전망
일각에선 금융위기 이후인 2010년 가을 이사철부터 본격화됐던 ‘전세대란’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당시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상승한 보증금만큼 소액의 월세를 내는 일명 ‘반전세’가 등장하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 정부의 규제로 부동산 공급이 위축된 데다 아파트 대체재인 다세대·다가구주택이 ‘전세사기’ 여파로 된서리를 맞은 여파다. 아파트 전세 쏠림 현상이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아파트 전세와 빌라 전세의 보증금 차이는 크지만 기존에 선호도가 떨어졌던 구축 복도식 소형 아파트 전세가격까지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억눌렸던 주택공급, 수요 따라 다시 감소
주택은 전통적으로 경기에 따른 수급 탄력성이 매우 높은 상품으로 통한다. 무엇보다 수요 탄력성이 매우 높기에 공급물량이 이에 따라 출렁이게 된다.
부동산 경기가 좋은 상승기에는 매매 수요가 앞으로 집값이 오를 것에 대비해 ‘미래에 필요한 수요’까지 당겨 주택 매수에 나서게 된다. 반면, 하락기에는 “앞으로 집값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당장 실거주 주택이 필요해도 매수를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련 전문가들은 하락기에도 상승기에 집중될 수요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장에서 당장 만들어내는 다른 제품들과 달리 주택공급은 토지 확보부터 인허가, 공사까지 최소 5년여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주택공급 상황은 그렇지 않다. 주택경기가 호황이던 지난해까지 공급된 물량도 충분치 못한 상황이다. 이미 일부 전문가와 기관들이 이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주택산업연구원은 문재인 정부 5년간 증가한 가구 수와 멸실 공가 등으로 수요가 307만 호 증가한 데 비해 공급은 260만 호 규모로 47만 호의 공급부족이 누적됐다고 보고서를 통해 설명했다. 이로 인해 집값이 30.4%나 오르면서 전 정부는 급하게 3기 신도시와 도심 공급 확대를 추진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여파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직방에 따르면 올해 12월 총 2만2196가구가 입주하는데 이는 2014년 이후 가장 적은 물량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울은 올해 5월 이후, 인천은 2021년 3월 이후 처음으로 입주가 ‘0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달은 경기도에서만 7518가구 입주하며 수도권 입주 가구 수는 전년 동기 대비 41% 감소했다.
내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입주 물량은 감소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2024년 예상 입주 가구 수는 30만6403가구로 올해 32만1218가구보다 약 5% 정도 소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수도권의 감소폭이 18%가량으로 큰 편이다. 주택공급 선행지표인 인허가 실적 역시 줄고 있다. 정부 규제로 인해 수년간 하락세를 그리던 아파트 인허가 실적은 2021년부터 반등해 지난해 10월 기준 34만7867가구, 연간 총 42만7650가구를 기록했으나, 올해 10월까지 23만4722가구를 기록하며 다시 20만 가구대로 떨어진 상태다. 조달금리와 공사비가 높아진 데다 신규 아파트 매수 심리가 꺾이면서 분양실적 역시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분양업계 관계자는 “현재 분양 물량 대부분이 사업자의 자금융통을 위한 ‘울며 겨자 먹기식’ 밀어내기 물량으로 내년부터 주택공급이 크게 줄 것”이라며 “주택 분양 이후 입주까지 2~3년가량 걸리기 때문에 3년 뒤부터 입주물량 부족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파트, 살 사람은 다 샀다
주택공급이 줄어도 실수요가 매매수요로 전환되기는 어렵다. 시장 분위기가 꺾인 데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실수요가 많은 수도권에서 더 심화하고 있다.
주택산업연구원이 집계한 10월 전국 입주율이 70.9%로 전월 대비 5.8%p 상승한 가운데 수도권 입주율은 전월 81.5%에서 80.7%로 떨어졌다. 특히 서울 입주율이 85.4%에서 82.2%로 3.2%p 하락했다. 서울은 집값이 높아 대출 등 자금부담 또한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주택 매매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기존 주택, 분양권 등의 처분 또한 어려워지고 있다. 같은 자료에서 미입주 원인으로 ‘기존 주택매각 지연’이 41.7%를 차지했다. 이는 전월 36.2%보다 높아진 것이다. ‘분양권 매도 지연’ 응답 역시 한 달 만에 10.6%에서 14.6%로 늘었다. 현재 수도권에 쌓인 주택 매물은 25만 가구에 달하고 있다.
주산연은 “서울은 시중은행의 높은 대출금리와 특례보금자리론 대상 축소 등으로 인해 매매거래가 감소하고 매물이 증가하면서 아파트 입주율이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 수요자들의 매수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불확실성”이라며 “올해 금리인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없애준 고정금리 정책금융상품인 특례보금자리론 일반형이 판매되면서 ‘살 사람은 다 샀다’고 봐도 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은 “주택매수는 대부분 전세보증금을 보유한 실수요자들이 대출을 일으켜 하게 되므로 고금리에 집값 하락 우려까지 있는 상황에서 이들 상당수가 시장을 관망하는 상태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非인기 ‘복도식 구축’ 전세도 오를까 이처럼 매수가 줄면서 매매가격은 약세를 보이는 반면, 금리인상으로 주춤했던 전세시세는 점차 오르고 있다. KB부동산이 지난 11월 발표한 ‘월간KB주택시장동향’에 따르면 전국 주택매매가격은 전월 대비 0.0% 증감률을 보이면서 보합에 머물렀으나 전세가격은 0.18% 상승했다. 특히 서울 아파트는 매매가 0.04% 오르며 보합에 가깝게 소폭 오른 한편, 전세는 0.62% 상승했다.
지난해 말부터 부동산시장을 휩쓴 ‘빌라왕’, ‘건물왕’ 사태 역시 아파트 전세가격을 끌어올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은 주거 선호 지역 내 신축 아파트가 전세가 상승을 이끌었다면, 앞으로는 다세대·다가구 전세의 대체재로서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저렴한 구축 아파트 전세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서울에선 강남권보다 신규 공급이 부족한 동북, 서남권 아파트 전세가격이 많이 올랐다. 한국부동산원 집계에 따르면 11월 4주(11월 27일 기준) 아파트 전세가격 변동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남권으로 양천구와 동작구에서 전세가가 각각 0.34%, 0.26% 올랐다. 일명 빌라촌이 많아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랐던 강서구도 0.22% 올랐다.
한국부동산원은 최근 서울 전세가격 흐름에 대해 “고가매물의 경우 계약 성사를 위해 하향조정되는 모습 보이나 학군지 및 선호단지 위주로 거래‧매물가격이 상승을 유지하는 중”이라며 “매매 관망세에 따른 일부 전세수요 전환 등으로 혼조세가 진행되는 중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동안 선호도가 떨어졌던 구축 초소형 아파트가 선전하며 밑바닥부터 전반적인 전세시세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학렬 스마트튜브 소장은 “빌라 기피 현상으로 인해 저렴한 아파트 전세 매물들이 시장에서 재평가받을 수 있다”며 “그동안 인기가 없었던 옛날 복도식 소형 아파트 수요가 늘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 같은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그동안 신규 택지공급과 재개발·재건축 등 도시정비사업 규제 완화에 힘썼다면, 최근에는 단기간에 공급이 가능한 오피스텔 등 비(非) 아파트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11월 15일 열린 ‘제18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여 있는 강남구 삼성동·청담동·대치동과 송파구 잠실동에서 토지거래허가를 받아야 할 대상을 아파트 용도로 한정하는 조정안을 통과시켰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도 이에 발맞춘 발언을 하고 있다. 박 후보자는 “과거 오랫동안 갖고 있던 아파트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도심에서 소규모로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빠른 시간 내에 공급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협력해 방안을 찾아볼까 한다”고 말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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