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성장 엔진’이었던 독일…25년만에 ‘유럽의 병자’로 전락? [비즈니스 포커스]
독일은 한국을 비롯해 수많은 나라의 모델이었다. 자동차 등 제조업 강국에, 질서란 단어로 상징되는 사회 시스템, 질 높은 교육뿐 아니라 전범 국가로서 끝없는 사죄 등 국가의 품격도 높았다. 2010년 이후 지난 20여 년은 독일 경제의 ‘황금기’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 말까지 독일 경제는 24% 성장했을 정도다. 명목 GDP 기준으로 4조 달러에 달하는 세계 4대 경제대국으로, 유럽 내 최대 경제대국이다.

하지만 이런 독일이 과거의 영광을 잃고 있다. 경제성장은 멈추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떨어지고 있다. ‘유럽의 병자(the sick man of Europe)’라는 명칭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통일 직후 기진맥진하던 독일의 경제 상황을 일컫던 말이다.

IMF는 지난 10월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를 발표하며 G7(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만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행복도와 같은 조사 결과들이다.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등으로 인해 ‘먹고사니즘’에 쫓기는 시민들의 불안함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다.
유럽 ‘행복지수’ 꼴찌, 독일의 그늘
‘유럽 성장 엔진’이었던 독일…25년만에 ‘유럽의 병자’로 전락? [비즈니스 포커스]
유럽연합(EU)의 통계기구인 유로스탯(Eurostat)은 해마다 EU 국가들의 ‘행복도’를 발표한다. 유럽 내 시민들의 주관적인 행복도와 삶의 만족도에 대한 추세를 보여주는 지표다. 생활 조건, 주거환경, 고용 환경에 더해 다양한 경험과 선택, 삶의 우선순위, 가치관 등을 통합해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0 매우 낮음~10 매우 높음)를 스스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지난 12월 11일 유로스탯이 2023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독일은 6.5점으로 EU 27개 국가 중 26위를 기록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국가는 오스트리아(7.9)였다. EU 평균은 7.1점.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EU에서 경제 규모가 큰 다른 국가들 대부분은 평균인 7.1점 부근의 점수를 기록했다. 보통 개인의 임금 수준이 높을수록 행복도도 높게 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조사에서 독일 국민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유럽 내 꼴찌 수준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예상 밖이라는 평가가 많다.

2022년 발표됐던 같은 조사에서 독일 국민들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만족도는 7.1점으로 평균(7.2점)과 비슷한 점수를 유지했다. 2022년과 비교해 올해 독일 국민들의 행복도가 그만큼 크게 급감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뿐 아니다. 독일인들은 미래도 불안해하고 있다. 12월 초 독일 쾰른의 라인골드 연구소가 발표한 ‘독일 국민들의 행복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22%만이 ‘미래를 낙관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20%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9%는 “흥미를 잃고 위축돼 있는 상태다”고 답했다.
독일 경제 ‘황금기’ 끝났다
‘유럽 성장 엔진’이었던 독일…25년만에 ‘유럽의 병자’로 전락? [비즈니스 포커스]
유로스탯은 보고서에서 독일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가 하락한 원인을 따로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부의 규모보다는 가족이나 재정적 안정성 등이 삶의 만족도에 전반적으로 높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는 독일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인플레이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나치의 탄생을 목격했다. 이것이 전쟁까지 이어진 비극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 인플레이션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런 독일에 다시 인플레이션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팬데믹 기간 대규모 유동성 공급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이를 부추기는 요인이 됐다. 지난 8월까지도 인플레이션율이 6%에 달했을 정도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지났음에도 다른 주요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율이 지속됐다. 경기둔화와 맞물려 인플레이션은 독일인들을 압박했다. 생존의 기반이 되는 의식주를 둘러싼 빈곤 문제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독일 국민들의 ‘경제적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생활 전반의 만족도 또한 낮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IMF는 지난 10월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독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경기침체로 향해가고 있다”며 “높은 인플레이션과 제조업 침체로 인해 올해 독일 경제는 0.5% 역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7월 전망치(-0.3%)보다도 하향 조정된 수치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도 올해 경제가 1.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피에르 올리비에 고우린차스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수출 비중이 높은 독일 경제의 경우 세계 무역의 변동성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독일의 위기는 경기 순환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2월 17일 OECD 국가들 가운데 35개국의 2023년 경제 성적표를 집계한 결과 독일은 27위에 머물렀다. 2022년 대비 2023년의 근원 인플레이션 변화와 인플레이션 변화폭, GDP 변화폭, 취업률 변화폭 그리고 주가 상승률을 기반으로 분석했다.

독일은 특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변화폭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18.8%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나며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았다. GDP 성장률은 0, 취업률 변화폭 또한 0.7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주식시장의 성과를 보여주는 주가 상승률은 9%에 불과했다.
중국 약해지니 맥 못 추는 ‘수출 강국’

현재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구조적 약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높은 에너지 의존도와 제조업 비중, 과도한 관료주의와 낡은 인프라로 인한 투자 감소, 고령자와 비숙련 노동시장 구조다.

제조업은 독일 경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그동안 에너지는 러시아에, 수출은 중국에 의존했다. 팬데믹에 이어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위기까지 발생하며 ‘번영의 전제 조건’이 무너졌다. 실제 독일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22.6%에서 2021년 20.8%로 줄었다.

이 와중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치명타가 됐다. 전쟁 전인 2020년 기준 독일의 전체 가스 수입량 중 절반 이상인 55.2%가 러시아에서 공급됐다.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공급에 차질을 빚으며 자동차, 유리, 비료 공장 등이 줄줄이 멈춰 서야 했다. 에너지 가격도 빠르게 상승하며 기업의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성장판이었던 중국도 독이 됐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다. 2021년 기준 독일 GDP 대비 중국 수출은 3.2%에 달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 내 국가들과 비교해도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지난 9월 독일 중앙은행 또한 보고서를 통해 “중국과의 무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독일의 경제가 위험에 처한 주된 이유 중 하나다”고 분석하며 “독일 기업들이 중국 외에 공급망과 해외 직접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기도 했다.

중국 또한 최근 빠른 속도로 최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국 기업 제품의 판매량이 늘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자동차 산업이다. BMW, 메르세데스, 폭스바겐 등 독일의 대표적인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향후 전기차 수요의 증가를 전망하고 큰 베팅을 했다. 그 결과 2014년 40만 대 미만이었던 이들 기업의 중국 시장에 대한 자동차 판매량은 2022년 기준 270만 대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BYD, 지리자동차 등 로컬 브랜드들의 점유율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35.7%에서 올해 55.5%로 크게 증가했다. 독일의 가장 큰 시장이었던 중국 자동차업체들이 중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까지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경쟁자’가 된 상황이다.

늙어가는 인구, 고숙련 노동자가 부족하다

독일 시장에 대한 투자 매력도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 또한 독일의 경제 위기를 부르는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실제 지난 몇 년간 독일 기업의 해외 투자는 증가하고 있는 반면, 독일 시장으로의 외국 자본 유입이 감소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은 전통 산업에서 오랫동안 뛰어난 성과를 거뒀지만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다”며 “독일의 GDP 대비 IT에 대한 투자는 미국과 프랑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고 지적했다.

재정 건전성을 우선순위에 두는 독일 정부의 성향으로 인해 인프라와 같은 공공 투자가 너무 적었고, 관료적 보수주의도 독일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관심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독일에서 해외 기업이 사업 운영을 위한 면허를 취득하는 데는 120일 정도가 걸린다. OECD 국가들의 평균과 비교해도 2배 이상 긴 기간이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봤을 때 가장 장기간에 걸쳐 독일 경제를 괴롭힐 수 있는 문제는 ‘인재의 부족’이다. 독일의 노동 가능 연령 인구는 64%다. 그러나 현재 독일 인구의 평균 연령은 45세로, 미국(39세) 등과 비교해도 높다. 독일은 향후 5년 동안 약 2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 근로자가 은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이 은퇴하고 나면 ‘고숙련 기술을 갖춘’ 노동자를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독일 내 기업들 또한 ‘적합한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꼽고 있다. 이에 대비해 독일 정부 또한 이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중이다. 지난 2020년 EU 외부에서 더 많은 노동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이민 정책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을 통해 동유럽을 포함한 많은 지역으로부터 우수한 인력을 유치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동유럽뿐 아니라 다른 지역들의 경제가 성장하고, 임금 수준이 높아지면서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인재의 유입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젠다 2010’의 기적, 재현할 수 있을까

독일은 지금껏 여러 차례의 경제위기를 극복해 낸 저력이 있는 국가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폐허가 된 독일은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노사 간의 파트너십을 도모하며 경제적인 성공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저력은 1999년 독일이 ‘유럽의 병자’가 됐을 당시에도 발휘됐다. 당시 독일은 통일 이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독일 정부는 동독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동독의 경제 발전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경직된 고용 시장으로 인해 특히 동독을 중심으로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2009년 11.1%까지 상승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1.2%로 낮았다. 독일은 ‘유럽의 병자’라는 꼬리표를 얻기도 했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를 지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도입한 강력한 노동 개혁인 ‘하르츠 개혁’의 역할이 컸다. 당시 슈뢰더 총리는 ‘어젠다 2010’이라는 대대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았는데, 이 가운데 노동시장과 관련된 ‘하르츠 1~4법안’을 일컫는다. 당시 장기 실업자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 시장 유연화를 확대한 반면, 실업지원금 수령 조건을 강화한 것이 주 골자다. 노사 간의 대타협을 통해 그 누구보다 ‘과감한 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이후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의 제조업 수요와 신흥 시장의 호황을 등에 업고 7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잡운더(Jobwunder, 고용의 기적)’ 시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독일 경제가 타격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꼽힌다.

독일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은 유럽 경제의 4분의 1 규모를 차지하는 ‘유럽 최대 경제대국’이다. 독일의 경제성장이 정체될 경우 EU 전체 성장률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EU 실업률 또한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유럽계 컨설팅업체 롤란드버거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독일의 현재 실업률은 5.9% 수준으로 지난 2000년대와 비교하면 양호한 수준이지만, 독일 경제가 침체에 돌입하면 고용 시장도 영향 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로 인해 EU 내 약 30만 명이 실직할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인 25만 명이 독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현재 독일이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는 ‘어젠다 2010’이 실행됐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젠다 2010’만큼 강력한 경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9월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의 크리스티안 제빙 최고경영자(CEO)는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 비용, 낙후된 철도망과 숙련 노동자의 부족, 과도한 관료주의 등이 독일의 ‘병자’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며 “지금 독일 경제를 약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독일 경제가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고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이정흔 객원기자 luna.jh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