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리스크 처한 일본…M&A로 후계자 찾아주며 1조 부자 된 90년대생
-지브리 스튜디오도 후계자 못 찾고 매각
이름대로 일본에서 시작되고 성장한 브랜드다. 하지만 지금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다.
1932년 초크 제조소는 나고야에서 하고로모 분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3대째 세계적 분필 브랜드로 성장했다. 늘 공장을 ‘풀가동’했던 이 회사는 2014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와타나베 다카야스 사장의 건강이 악화했고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는 없었다. 결국 80년을 이어왔던 회사가 문 닫을 위기에 놓였다.
그때 한국 입시학원 수학 강사였던 신형석 세종몰 대표가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제안했다. 후계자가 없던 와타나베 사장은 생산 기계와 노하우를 신 대표에게 모두 전수했다. 그때부터 하고로모 분필은 경기도 포천에서 생산되고 있다. 일본 기업 54% “후계자 없다”
하고로모의 사례는 일본 산업계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 기업의 절반 이상은 리파운더는커녕 후계자가 없다. 일본 시장조사기업 제국데이터뱅크가 2023년 27만 개 회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무려 54%가 후계자가 없거나 미정이라고 답했다. 자식도 직원도 경영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후계자 리스크’는 오랫동안 일본 산업계의 과제였다.
기업이 흑자를 내는데도 경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문을 닫는다.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2022년 휴업하거나 폐업한 중소기업의 약 55%가 흑자를 유지한 채 폐업했다. 이 중 30%가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계자가 있어도 리파운더로 불릴 수 있는 탁월한 리더가 나올까 말까 한 현실을 감안하면 일본 경제의 앞날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후계자 리스크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은 또 있다. 최근 일본에서 1990년대생 억만장자가 나왔다. ‘M&A리서치인스티튜트’를 설립한 사가미 슌사쿠 대표다. 이 기업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고령의 사업가에게 최적의 인수자를 찾아준다. 2018년 설립 당시 27세였던 사가미 대표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기업이 후계자를 찾지 못해 폐업하는 모습을 보며 이 같은 서비스를 내놨다. 회사는 고속성장했다. 2022년 6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이 기업은 2023년 8월 도쿄증시에서 우량기업만 모아놓는 ‘프라임 시장’으로 이전했다. 사가미 대표의 순자산도 늘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그의 순자산은 2023년 5월 기준 9억5000만 달러(약 1조2700억원)에 달한다. “AI로 후계자 찾아드립니다”
일본 90년대생 억만장자 등극M&A리서치인스티튜트의 매출 증가세를 보면 일본 기업에서 후계자가 없어 기업을 매각하고자 하는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업의 2023년(일본 회계연도 기준) 순매출은 약 86억4251만 엔(약 785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121% 뛰었고 영업이익은 45억7925만 엔(약 416억원)으로 118% 급증했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53%에 달한다. AI 솔루션인 M&A 어드바이저로 높은 영업이익률을 달성하면서도 올해 104명을 신규 채용했다.
2023년 실적발표를 통해 “회사는 경영자의 고령화와 후계자가 없는 기업의 증가로 인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뤘다”며 “M&A를 통한 사업 승계를 장려하는 정부 정책 등에 힘입어 사업이 확대됐다”고 밝혔다.
실제 일본 기업의 승계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2023년 경영을 승계한 기업 중 35.5%가 회사의 임원이나 직원을 등용한 ‘내부승격’을 통해 CEO를 앉혔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는 ‘가족승계’가 늘 1위를 차지했지만 2023년에는 이 같은 추세에 변화가 있던 것이다. 이후로 ‘M&A’(20.3%)와 ‘제3자 승계’(7.2%) 등도 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민관이 M&A를 통한 사업승계를 적극 지원하면서 이 비율이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에서 사업승계와 관련한 중소기업 M&A 청약 수는 2022년 1681건으로 5년 전보다 2.4배 늘었다.
일본에서 가족승계가 줄어드는 이유는 상속·증여세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은 2018년 사업승계 특례 조치를 도입해 중소기업의 승계에 따른 세금 부담을 낮췄다. 이 조치는 2세 경영인이 기업을 물려받으면 회사를 매각하거나 폐업하기 전까지 상속·증여세를 전액 유예·면제하는 것이다. 2세 경영인이 회사 문을 닫기 전까지 내야 하는 현금은 0원이다. 하지만 자식도 직원도 기업을 물려받을 의지나 능력이 없어 승계를 포기하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지브리,
리파운더 안 찾은 걸까 못 찾은 걸까 중소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그룹과 유니클로 운영사 패스트리테일링, 세계 최대 모터회사 일본전산 등 일본 대표 기업도 창업자는 고령에 접어들었지만 마땅한 후계자를 구하지 못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85년에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는 올해 일본 민영 방송사 니혼테레비에 경영권을 넘겼다. 스즈키 도시오 지브리 사장이 지분 양도를 하며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대기업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지브리는 충분히 후계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답게 실력을 갖춘 크리에이터들이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미야자키 감독의 성에 차지 않았다.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이 정해놓은 ‘지브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낼 후계자가 필요했다. 미야자키 감독만의 힘으로 제작사를 끌어가기는 어려웠다. 회사가 커지면서 지브리 작품을 계속 흥행시킬 만한 감독을 배출해내야 지속가능한 구조였다. 하지만 주력인 제작팀이 2014년 해체됐고, 미야자키 감독은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지브리가 애플이나 MS처럼 자신을 뛰어넘을 ‘리파운더’를 찾았다면 지브리의 명맥도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스타 감독들이 지브리를 거쳐갔다.
미야자키 감독이 후계자를 키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왜 젊은 내가 없는가”라는 초조함을 안고 살 정도로 후계자를 키우고 싶어했다.
미야자키 감독의 후계자 실험은 몇 번 있었다. 첫 번째 주자는 모치즈키 도모미. 모치즈키 감독은 1993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바다가 들린다’를 연출했다. 미야자키 감독과 다카히타 이사오 감독의 손을 거치지 않은 지브리의 첫 신인 감독 프로젝트였다.
지브리는 제작 과정에서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보자는 취지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작진 역시 전부 신인으로 이뤄졌다. 이때까지는 지브리에도 혁신과 새로움에 대한 의지가 살아 있었다. ‘바다가 들린다’는 TV시리즈로 먼저 방영돼 17.4%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지브리의 새로운 ‘청춘물’로 호평을 받았다. 등장인물이 모두 고등학생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서사부터 기존 지브리의 방식과는 달랐다. 또 환상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 작품을 ‘최악’이라고 평했다. 모치즈키는 이후 지브리에서 배제됐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이를 두고 “미야자키가 자신은 절대 만들 수 없는 작품이 지브리에서 나온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고 한 다큐멘터리에서 밝혔다.
미야자키 감독은 첫 신인 프로젝트로 나온 작품을 마구 비판했다. 도전이나 차이,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야자키 감독이 질투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내부 스태프와 젊은 작가들은 주눅이 들어 재능을 키울 수 없었다. 결국 미야자키 감독의 영광은 후계자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그늘이 됐다.
미야자키는 2년 뒤인 1995년 보란듯이 ‘지브리식 청춘물’을 내놓는다. 그의 오른팔이었던 곤도 요시후미에게 감독을 맡겨 ‘귀를 기울이면’을 발표했다. 곤도 감독은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평가받았지만 1998년 과로사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썸머워즈’, ‘늑대아이’를 연출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 역시 지브리를 거쳐갔다. 호소다 감독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연출을 맡았지만, 2년 만에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이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다시 미야자키 감독의 손으로 넘어간다. 호소다 감독은 이후 슬럼프를 겪었지만 2007년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하고 이후 내는 작품마다 흥행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3대장’으로 올라선다.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을 뛰어넘는 후계자를 찾지 못한 이유는 본인이 만들어낸 유산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리더와 혁신이 불가능한 시스템은 창작자들에게 창작의 자유 대신 틀에 갇힌 억압을 선사했다.
‘리파운더’의 부재는 한 기업의 존망만 결정짓는 문제가 아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현재 문제를 안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경영 후계자를 찾는 데 실패하게 된다면 2025년까지 약 22조 엔가량의 GDP 손실과 6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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