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2022년 당시 색다른 제목과 디자인을 적용한 교보증권의 리서치 보고서. 사진=교보증권
2022년 당시 색다른 제목과 디자인을 적용한 교보증권의 리서치 보고서. 사진=교보증권
지금은 돈을 내고 음악을 듣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음악은 공짜란 인식이 강했다. 우후죽순 생겨난 불법 사이트에서 음원파일이 무료로 공유되면서 가수들은 급기야 앨범 발표마저 주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음악계는 단체 기자회견을 열고 “공짜 음악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행여 집단이기주의로 비치진 않을까 우려했다. 음악을 공짜로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생긴 웃지 못할 현상이었다.

음원 다음엔 웹툰이 ‘공짜 논쟁’에서 오랜 시간 헤어나오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거리에 나와 웹툰의 지식재산권에 대해 부르짖어야 했다. 최근에는 공짜로 저작물을 짜깁기해 자가발전에 이용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모두 무형자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생긴 문제들이다.

그런데 그 어느 산업보다 숫자에 예민한 자본시장에서도 무형자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증권사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들이 펴내는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다. “10원짜리보다 못한 보고서” “바닥에 떨어진 애널리스트의 지식재산권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지난해 5월 독립리서치 리서치알음은 공격적인 제목의 보고서 한편을 발표했다. 제목은 ‘길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보다 못한 애널리스트 보고서’.

리서치알음은 에프앤가이드가 증권사 리서치 자료의 유통을 독점하면서도 리서치센터에는 충분한 수익을 분배하지 않고 있다고 작심 비판하며 당시 국내 한 증권사와 에프앤가이드가 체결한 콘텐츠 유통 관련 계약서 일부를 공개했다.

이들이 당시 입수한 계약서에 따르면 국내 한 중형 증권사의 경우 에프앤가이드와의 계약으로 지난 3년간 받은 수익이 800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클릭당 수익이 평균 10원에도 미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에프앤가이드는 투자자들에게 월 33만원을 내면 증권사 리서치 자료를 무제한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플랫폼은 정보 제공으로 인당 월 33만원을 챙기지만 정작 이 정보를 만들어 전달한 생산자 리서치센터는 아주 적은 수익이 돌아가는 형태로 정산되는 시스템이다. 리서치알음은 이러한 보고서 유통 독점 문제가 애널리스트의 지식재산권 보장과 직결된다고 비판했다.

금융정보 제공업체인 에프앤가이드는 2020년 코스닥에 상장한 후 리서치 보고서 유통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개인투자자들이 급증하면서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회사의 매출액은 2020년 3분기 누적 기준 156억원에서 2023년 3분기 누적 기준 218억원으로 39.7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5억원에서 44억원으로 25.71% 늘었다.

리서치알음 측은 사실상의 독점 플랫폼인 에프앤가이드에 네이버 등 무료 유통 플랫폼마저 가세하면서 보고서의 가치 하락은 물론 리서치센터의 지속가능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성환 대표는 “미국에는 리서치 유료 문화가 잘 정착돼 있는 반면 한국의 애널리스트 자료들은 모두 무료로 공개돼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이 불가한 상태”라며 “애널리스트의 지식재산권도 음반시장에서의 음원 소유권을 인정하는 수준의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보고서는 정보의 집합체다. 기업과 산업 그리고 시장경제에 해박한 전문 지식인들이 분석한 알짜 정보다. 여기에 그들이 기업과 시장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담은 숫자 이면의 이야기,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담아 인사이트를 전달한다. 교수나 일반 연구소의 연구원들과는 다르다. 시장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는 게 가장 큰 차이이자 특징이다.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개별 기업이나 시장에 대한 취재 탐방부터 작성까지 보고서 한 편에 한 달이 소요되는 일도 적잖다. 예컨대 연말에 쏟아지는 각 증권사의 연간전망 보고서는 웬만한 경제학 서적 못지않은 지식이 담겨 있다.
최근 화제인 저PBR주를 분석한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의 보고서. 보고서 한 장에는 최근의 가장 뜨거운 이슈와 이에 대한 애널리스트 각자의 분석이 담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표는 필수다. 사진=신한투자증권
최근 화제인 저PBR주를 분석한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의 보고서. 보고서 한 장에는 최근의 가장 뜨거운 이슈와 이에 대한 애널리스트 각자의 분석이 담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표는 필수다. 사진=신한투자증권
문제는 이 무형자산의 쓰임새다. 플랫폼 등을 통해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보니 유튜버, 블로거, 투자카페 운영자가 무단으로 가져가 수익을 창출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콘텐츠 생산자는 따로 있는데 플랫폼이나 중간 소매상이 콘텐츠를 재가공해 이익을 취하는 형국이다. 10년 차 애널리스트 A 씨는 “소속이 어디인지 어떤 전문성을 갖췄는지 백그라운드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겐 매월 유료로 콘텐츠를 구독하는데 라이선스가 있는 애널리스트들의 정보는 신뢰하지 않고 공짜로 제공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자자들이 믿고 따르는 인플루언서 중에는 애널리스트의 보고서가 재료가 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꼬집었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애널리스트가 아닌 유튜버, 블로거, 투자카페 운영자 등 소속이 확인되지 않은 인플루언서란 점도 작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리서치알음은 지난해 5월 펴낸 보고서에서 애널리스트 보고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고, 스타 애널리스트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입시 강사 시장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 강사가 있는 것처럼 애널리스트 분야에도 같은 현상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유튜브를 통해 개인들이 열광하는 주식시장의 리더들이 나오고 있는데 애널리스트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작물로 보호”…공공재의 반란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증권사에서도 콘텐츠 보호 움직임이 일고 있다. KB증권은 ‘KB리서치’라는 전용 뷰어 플랫폼을 통해 KB 계좌를 보유한 고객에게만 리포트를 공개하며, NH투자증권은 일부 리포트에 한해 홈페이지에서 전체 내용을 열람할 수 있게 했다. 한국투자증권과 DB금융투자는 요약본은 무료로 제공하되 전문은 자사 고객만 열람 가능하도록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이는 리포트가 무분별하게 재가공되거나 개인 유튜브 채널이나 투자자문사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증권사의 한 리서치센터장은 “주요국 중 리서치 보고서가 이렇게 공공재인 나라가 거의 없다”며 “무형자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증권사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도 최근 나왔다. 지난 1월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2부(부장판사 이영광)는 현대차증권이 증권 분석 사이트 ‘에쿼티’를 운영하며 증권사의 리서치 보고서를 유료로 배포한 한빛아이에이홀딩스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침해 중지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애널리스트들의 독창적인 분석과 예측을 담은 보고서가 저작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보고서의 창작성을 인정하면서 한빛아이에이홀딩스에 3000만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앞서 한국투자증권도 동일 문제로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승소했지만 ‘반쪽짜리 승리’란 평가가 우세했다. 증권사의 저작물로 인정하면서도 한빛아이에이홀딩스의 리서치 게재로 인해 증권사가 청구한 손해에 대해선 모두 기각했으며, 향후 증권사들이 내놓을 리서치 보고서에 대한 게재 금지 청구 역시 기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차증권은 장래의 보고서에 대한 활용 금지 대신 손해배상을 청구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무단 활용은 차단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얻은 이익보다 손해배상금이 더 크다면 콘텐츠 업로드 억제 효과를 가질 것이란 기대다.

하지만 한빛이 이번 판결에 불복하며 사건은 항소심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한빛 측은 지난해 9월 홈페이지를 통해 “증권사들이 공표하는 리서치 자료는 반드시 투자자들에게 ‘공시’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며 “이러한 규정은 투자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금융당국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입장문을 전했다. 이 사건은 앞으로도 법조계와 자본시장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