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 포스터 / 사진=쇼박스
영화 '파묘' 포스터 / 사진=쇼박스
“원래는 마니아만 보는 장르 영화를 만들었는데 실수로 대중 영화가 된 듯하다.”
영화 ‘파묘’를 만든 장재현 감독은 작품 흥행 이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얘기대로 그가 정말 실수를 했다면 이보다 성공적인 실수가 또 있을까.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소비됐던 오컬트 영화가 올해 첫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타이틀은 이뿐만 아니다. 국내 오컬트 영화 가운데서도 최초, 비성수기인 2월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도 최초의 천만 영화에 해당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해외 133개국에 판매됐으며 주요 국가에서 개봉도 속속 확정되고 있다. 이미 개봉한 지역에선 이례적인 흥행 기록까지 세우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선 현지에서 개봉한 역대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 1위에 올랐다. 베트남에선 개봉 첫 주에만 40억원, 대만에서도 같은 기간 1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 오컬트 영화의 열풍. 심지어 50대 이상의 중장년 관객들이 오컬트 영화를 보러 대거 극장을 찾는 진풍경이 펼쳐질 줄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장 감독의 얘기처럼 ‘실수 아닌 실수’ 덕분이 아닐까. 이 작품은 오컬트의 요소와 특성을 활용하는 데 철저히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오컬트에 국한됐던 장르적 한계를 벗어나 대대적인 확장을 이뤄냈다. ‘파묘’는 그렇게 스스로 ‘파묘’하여 K오컬트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혔다.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비주류 장르

‘오컬트(Occult)’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롭고 초자연적 현상’을 의미한다. 이 용어 자체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도 2015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오컬트 애호가들도 ‘엑소시스트’부터 ‘오멘’, ‘13일의 금요일’, ‘컨저링’까지 해외 오컬트를 감상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국내 시장에서 오컬트 제작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원조로는 유명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박광춘 감독의 영화 ‘퇴마록’(1988)이 꼽힌다. 하지만 ‘퇴마록’은 원작과 다른 내용으로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오컬트 작품은 한참 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오랜 기다림에 부응이라도 하듯, 2015년부터 강력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2015년 개봉한 장 감독의 ‘검은 사제들’이 그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영화는 서양 오컬트 작품에서 주로 활용됐던 기독교적 세계관에 한국적 배경을 결합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54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오컬트 영화의 부활을 널리 알렸다.
잘 만든 오컬트 영화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주고, 오랫동안 회자될 수 있는지 알린 작품도 있다. 2016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오컬트에 접목해 큰 화제가 됐다. 서구의 오컬트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던 국내 관객들은 보다 가깝게 오컬트 장르를 인식하고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687만 명의 관객을 동원, ‘파묘’ 이전 오컬트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오늘날까지 “뭣이 중헌디”라는 명대사도 자주 회자되고 있다.
결국 국내 명작 오컬트의 탄생은 서구식 오컬트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요소를 결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성공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컬트 작품이 꾸준히 제작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 기세를 몰아 영화 ‘사바하’와 드라마 ‘손 the guest’, ‘악귀’ 등이 잇달아 나오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낯설면서도 진입 문턱이 높은 장르의 벽을 허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오컬트 장르를 지키며 외연을 확장해 나간 ‘장인’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 장인의 수는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적긴 하다. 하지만 장재현 감독을 비롯해 나홍진 감독, 연상호 감독 등이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 K오컬트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장 감독은 ‘검은 사제들’을 시작으로 ‘사바하’, ‘파묘’ 3부작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완성했다. ‘검은 사제들’은 가톨릭, ‘사바하’는 사이비종교, ‘파묘’는 무속신앙으로 각각 소재를 달리 활용해 매번 새롭게 관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장인정신은 ‘파묘’에 이르러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장 감독은 영화를 위해 장례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들이 최대한 연기에 몰입하고,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CG(컴퓨터그래픽)도 최소화했다. 그만큼 특수 분장, 각종 촬영 기법 등을 총동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뚝심으로 자신만의 연출 철학을 지키며 영화를 완성했다.
나 감독은 ‘곡성’에 이어 태국 영화 ‘랑종’(2021)으로 오컬트의 확장을 시도했다. 이 작품은 나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으로 ‘곡성’에 나온 무속신앙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에 함께 녹여냈다. 연 감독 역시 ‘방법: 재차의’, ‘괴이’, ‘선산’ 등 오컬트 장르를 꾸준히, 그리고 깊게 파고들고 있다. 그중 ‘선산’은 넷플릭스 시리즈 가운데 비영어권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 '곡성' 포스터/ 사진=20세기 폭스 코리아
영화 '곡성' 포스터/ 사진=20세기 폭스 코리아
‘장르의 풍요 속 빈곤’을 말끔히 해소하다
‘파묘’의 흥행이 영화계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비주류 장르도 얼마든지 산업의 주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장 감독이 장르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설정과 촘촘한 구성을 더한 덕분이다. 이에 따라 입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 입소문은 판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작품에서 우선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힙한’ MZ세대 무당의 등장이다. 화림(김고은 분)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굿을 하고, 봉길(이도현 분)은 경문으로 새긴 문신을 하고 헤드폰을 쓴 채 운동을 한다. 사람들이 갖고 있던 무속신앙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더욱 참신하게 다가간 것이다.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모순적’, ‘이중적’ 설정도 재미를 더한다. 영근(유해진 분)은 장의사인 동시에 기독교 신자이며, 상덕(최민식 분)은 풍수사이지만 그의 딸은 우주공학을 전공했다. 상덕은 이를 언급하며 “풍수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는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과학과 무속신앙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전혀 상이해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과학의 시대에도 무속신앙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컬트라는 장르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항일 코드를 통해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과 정서를 깊이 파고든 것도 흥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가 항일 코드를 심은 방식도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초반엔 항일 코드가 잘 드러나진 않는다. 그저 미국에 살고 있는 한 가족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묘를 해야 한다는 정도만 나온다. 하지만 갈수록 그 이면에 있는 ‘험한 것’의 정체가 드러나고 항일 코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진 않는다. 오컬트라는 장르의 특성을 한껏 살리면서도 세련되게 담아낸다. 영화는 ‘험한 것’이 있는 묫자리의 위치를 통해 풍수지리학으로 항일 코드를 녹여낸다. 그리고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강렬한 대사 한마디로 영화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국, 나아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여우는 범의 허리를 끊을 수 없다”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장르(Genre)의 어원은 라틴어인 ‘종류’란 의미를 가진 ‘Genus’이다. 생물학에선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을 의미한다. 장르라는 용어는 오늘날 문화예술 분야에선 작품의 소재, 특성, 내용 등에 대해 공통된 특징을 가진 하나의 작품군을 뜻한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장르 역시 생물처럼 분화하고 정착·변용하며 발전한다.
과거 국내 콘텐츠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장르는 많지 않았다. 로맨스, 가족극, 스릴러, 호러 정도였다. 넷플릭스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엔 K좀비, K크리처물이 확산되며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설정이 반복되고, 신파 논란까지 일면서 해당 장르들에 대한 열기도 잠잠해졌다. 이 가운데 사람들의 새로운 장르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파묘’는 장르의 풍요 속 빈곤이 해소되는 쾌감을 선사했다. 앞으론 또 어떤 K오컬트가 탄생하게 될까. ‘파묘’ 이후에도 많은 수작이 나와 대중의 시간과 마음을 빼곡히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