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해 CES 주인공은 자동차 회사가 아니었다. 엔비디아(NVIDIA)였다. 정확히는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CEO(최고경영자)인 젠슨 황이었다. 그는 CES 첫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가죽 재킷에 검은 바지. 막 오토바이에서 내린 것 같은 특유의 옷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바탕으로 한 AI 개발 현황을 설명했다. 이어 AI자동차용 슈퍼컴퓨터인 자비에(Xavier)를 선보이며 자율주행차의 두뇌라고 단언했다. 마치 엔비디아의 AI를 쓰지 않으면 자율주행차는 힘들 것이라는 투였다.
컴퓨터게임에 문외한이었던, 당연히 GPU의 중요성도 몰랐던 필자로서는 멍했다. 잘은 모르지만 엔비디아가 AI 시대를 견인할 것이란 생각은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2017 CES 리뷰’ 모임에 참석해서는 “무조건 엔비디아 주식을 사라”고 권했던 기억도 있다. 당시 주가는 100달러 안팎. 최근 900달러를 웃돌고 있으니 9배 넘게 뛰었다.
젠슨 황. 대만 출신으로 9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대만계 미국인. 1993년 실리콘밸리에서 엔비디아를 설립한 뒤 1999년 세상에 없던 GPU를 선보였다. 지금은 AI반도체 시장의 80%를 점유한 AI 시대 선구자다.
그런 그가 3월 19일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엔비디아 개발자 콘퍼런스인 ‘GTC 2024’에 등장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유의 가죽 재킷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2시간 동안 계단까지 가득 찬 1만6000여 명의 청중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는 엔비디아의 새로운 GPU인 블랙웰을 공개하고, AI의 미래인 로봇을 개발하기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겠다고 천명했다. 외신들은 ‘마치 테일러 스위프트의 콘서트장 같았다’거나 ‘AI계의 스티브 잡스가 나타났다’고 치켜세웠다.
다음 날 열린 미디어 간담회에서는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해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 테스트하고 있으며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삼성전자 주가는 하루 만에 5% 넘게 뛰었다. 삼성전자 투자자들은 “쌩큐, 젠슨 형!”이라며 반겼다.
엔비디아와 젠슨 황을 낳은 실리콘밸리. 1980년대 PC, 1990년대 인터넷, 2000년대 스마트폰, 2010년대 전기차, 2020년대 AI 시대를 열어젖힌 산실이다. 외국 출생자 비율이 40%에 이를 정도의 다양성, 스탠퍼드대 등 31개 대학에서 공급되는 인재들, 성공한 창업자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생태계, 기술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탈(脫)규제, 격의 없는 소통과 업무 방식 등 그동안 분석된 실리콘밸리 성공요인은 많다.
그중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은 기업가정신일 듯싶다. 세상에 없던 기술을 만들어내겠다는 창업자들의 끝없는 열정과 과감한 투자야말로 실리콘밸리와 젠슨 황을 만든 요인이다. 스티브 잡스 등에 비견됐던 이해진, 김범수 등이 플랫폼을 장악한 뒤에는 기존 대기업 흉내를 내는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긴 외국 기업인 삼성전자와 TSMC에 각각 60억 달러와 50억 달러를 지원키로 한 미국과 달리 지원금은커녕 뻔한 규제마저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데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느냐마는.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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