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들어오는데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고? [하영춘의 경제이슈 솎아보기]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거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1984년 무렵부터 지하철역에선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방송이 나오면 지하철을 기다리던 우리는 친구들을 선로 쪽으로 밀어내는 장난을 치곤 했다.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것은 선로로 내려가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물론 그렇게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된 안내 방송이 고쳐진 것은 1991년쯤이다. ‘안전선 밖’이라는 표현이 논란을 빚자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꿨다. 무려 7년여 동안 우리는 안전선 밖에서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열차가 들어온다는 것은 위험신호다. 그런데도 ‘안전선 안’이 아니라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안내는 지금도 반복된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 고갈 예상시기는 2055년. 31년후면 바닥난다. 지금 32세인 사람들은 평생 연금을 납부해도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기초자료를 국회에 제공한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투다. 여야는 21대 국회 막바지에야 “모수개혁부터”(더불어민주당)와 “구조개혁과 함께”(국민의힘)를 주장하다 빈손으로 돌아섰다. 연금고갈 시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답은 정해져 있다. 더 내고 덜 받는 방법밖에 없다. 좋아할 국민들은 당연히 없다. 정부와 국회가 이를 감내하고 연금개혁을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더 위험한 열차는 저출산이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2명.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가장 낮다. 올해는 0.68명으로 더 떨어질 전망(통계청)이다. 이러다보니 “한국은 인구소멸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데이비드 콜맨 옥스퍼드대 교수)이라거나 “한국의 인구감소가 흑사병으로 인한 유럽의 인구감소를 능가한다”(뉴욕타임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업들은 인력부족과 내수기반 붕괴로 조만간 외환위기 같은 경제위기가 닥칠 것(한국경제인협회 조사)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도 저출산대책은 제자리걸음이다. 담당 부총리 신설, 재정투자 확대, 평생 돌봄서비스 제공, 비혼장려 등의 얘기가 쏟아지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직 없다.

작게는 획일적인 최저임금제도 승강장에 들어오고 있는 열차다. 2001년 이후 작년까지 소비자물가는 61.9% 올랐다. 반면 최저임금은 418% 급등했다. 그러다보니 2023년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근로자는 전체의 13.7%에 달했다. 업종별로는 농림어업(43.1%)과 숙박·음식점업(37.3%)이, 규모별로는 5인 미만 사업장(32.7%)이 특히 많았다. 업종별·규모별 차등화가 안 되면 안전선밖으로 떠밀려 범법자가 되는 고용주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는 많다. 의료개혁, 상속세·종부세·금투세 등 세재 개편, 반도체 전쟁 대응, 미국 대선 영향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탄핵열차’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항만 툭툭 건드리고 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5월 초 “과거에 해왔던 기조대로 가면 대한민국이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바꾸지 않으면 힘들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막 개원한 22대 국회를 보면 별로 바뀔 것 같지 않다. 열차는 들어오고 있는데 하염없이 안전선 밖에서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