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낚시 / 사진=CGV
영화 밤낚시 / 사진=CGV
12분 59초. 최근 극장에서 개봉한 어느 영화의 상영 시간이다. 국내외 개봉작의 상영 시간은 대부분 2시간 정도이다. 그런데 그 10분의 1 수준인 짧은 단편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것이다. 상영 시간이 짧은 만큼 티켓 가격도 저렴하다. 단돈 1000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밤낚시’로 14~16일, 21~23일 CGV에서 단독 상영됐다. 숏폼 콘텐츠를 선호하는 요즘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짧은 시간에 과자를 먹듯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스낵 무비’를 표방한 것이다. 짧고 저렴한 작품이지만 라인업은 화려하다. 배우 손석구가 출연해 주연을 맡았다. 메가폰은 영화 ‘세이프’(2013)로 칸국제영화제에서 단편경쟁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문병곤 감독이 잡았다.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캐나다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 국제단편경쟁 부문 경쟁작으로 선정됐으며 지난 1월엔 미국 ‘선댄스 영화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셰프 댄스’에 상영됐다.

그런데 이 작품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현대자동차가 기획을 하고 손석구의 1인 기획사 스태넘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된 소재는 자동차이다. 어두운 밤 전기차 충전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의 온전한 모습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의 낚싯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것이 걸리게 되고, 이를 시작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기업과 영화계가 만나 ‘브랜디드 콘텐츠’(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 그 이상의 참신하고 새로운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분야이든 전 세계적으로 시장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면서 기존의 고정된 틀과 방식으로만 사업과 마케팅 등을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그 가운데 첫 스낵 무비를 표방하며 나온 ‘밤낚시’는 기업과 영화감독, 배우 등이 만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틈새 전략을 펼치며 높은 화제성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물꼬가 터진 만큼 앞으로도 이 같은 시도는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장 전체의 흐름을 바꿀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보완재로선 충분히 역할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애플·생 로랑까지 영화를 만들다

기존의 간접광고(PPL), 브랜디드 콘텐츠는 일정 부분 한계가 존재했다. 과도한 PPL은 오히려 시청자나 관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브랜디드 콘텐츠는 기업이나 제품 광고를 재밌는 콘텐츠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PPL과는 차별화됐다. 하지만 온라인 중심이고 화제성이 높진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밤낚시’처럼 영화로 나오는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온·오프라인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알릴 수 있다보니 화제성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된다. 특히 단편 영화의 형식을 빌리면 길이가 짧으면서도 작품성·대중성을 두루 갖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품이나 브랜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해당 기업만의 차별화된 색깔과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낼 수 있다. ‘밤낚시’ 간담회에서 지성원 현대차 브랜드마케팅본부장은 “기업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객과 어떻게 가깝게 소통할까를 고민했다”며 “30초 광고가 3초 숏츠로 소비되는 시대에 우리 브랜드와 고객이 조금은 다른 방식과 포맷으로 만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 작품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밤낚시’엔 현대차가 내세운 전기차 아이오닉5는 직접 노출하지 않지만 관객이 차의 각종 성능과 장점 등을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아이오닉5에 탑재된 빌트인 캠과 전·후방 카메라, 디지털 사이드 미러 등 7개 카메라의 시점으로 각 장면을 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영화를 활용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최근 애플, 현대카드 등 다양한 국내외 기업에서 진행하고 있다. 애플은 각국의 유명 감독들과 함께 단편 영화를 잇달아 만들었다. 2022년 진행한 ‘Shot on iPhone(아이폰으로 찍다)’ 캠페인으로 미셸 공드리, 첸커신, 데이비드 레이치, 데이미언 셔젤 등과 각각의 작품을 만들었다.

국내에선 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박찬욱 감독과 함께 ‘일장춘몽’이란 단편 영화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일장춘몽’은 22분짜리 영화로 김옥빈, 박정민, 유해진 등이 출연했다. 사극인 만큼 작품엔 아이폰이 직접 노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마트폰만으로 영화 촬영을 할 수 있을 만큼 카메라 기능이 발전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제품의 장점과 가치를 부각시켰다. 박 감독은 2011년에도 아이폰으로 단편 영화 ‘파란만장’을 만들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단편 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 / 사진=유튜브
영화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 / 사진=유튜브
패션 브랜드 생 로랑은 아예 패션계 최초로 영화 제작사를 설립했다. 지난해 출범한 ‘생 로랑 프로덕션’으로, 이 제작사는 30분짜리 영화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Strange way of Life)’ 등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카우보이를 내세운 서부극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연출하고 에단 호크 등이 출연했다. 생 로랑에서 영화를 직접 제작한 것은 물론 의상까지 만들어 큰 관심을 얻었다.

현대카드도 2019년 ‘내 꿈은 컬러 꿈’라는 작품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 그린, 레드, 퍼플, 블랙 컬러를 내세운 4편의 단편 판타지 영화를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아이디어와 자본이 만나면?!
그렇다면 기업과 영화의 만남은 과연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기업 입장에선 단순한 제품 광고만으로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혁신적이고 참신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새로운 장르에 속한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은 기업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중 영화는 대중적이고 직관적인 장르라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많은 국내외 기업들이 클래식, 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후원을 하는 ‘메세나’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대중이 쉽게 알진 못하며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영화 제작과 투자는 여기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투자로 문화예술적 가치를 실현하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알릴 수 있다.

다양한 위협에 처한 영화계에서도 기업의 참여는 반가운 소식이다. 영화를 만들어 극장 개봉까지 해도 OTT의 확산으로 손익분기점을 넘는 일조차 어려워진 상황이다. AI가 시나리오를 쓰는 등 창작자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하고 있어 할리우드에선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을 통해 시장에 거액의 자금이 유입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기업의 투자로 영화를 만든다고 해도 드라마 PPL이나 브랜디드 콘텐츠처럼 노골적인 브랜드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작품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해주다 보니 창작자의 도전 욕구를 자극한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OTT가 확산됐다 하더라도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작품마다 1만5000원 이상의 티켓값을 지불하는 것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가격뿐 아니라 시간도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다. 숏폼 콘텐츠에 자주 노출되고 긴 호흡의 작품은 1.5배속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된 젊은 세대일수록 계속 한 자리에 앉아 2시간 이상 작품을 관람하는 것을 지루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객들에게 1000원, 10분 남짓만 투자하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가격, 시간 측면에서 모두 가성비가 높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스낵 무비의 등장은 침체된 극장가를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

물론 기업의 자본이 투입된 10분, 20분짜리 영상이 영화라는 종합예술적 특성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파격적인 시도 그 자체로 의의를 가질 뿐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유명 마케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존 헤거티는 이렇게 말했다. “오리지널은 없다. 그러니 신선함을 추구하라.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인이 당신의 아이디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장르의 틀과 범주 안에만 머무른다면 더 이상의 확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언젠가는 거대한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휩쓸려 도태되어 버리고 만다. 기업과 영화계의 만남은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막강한 자본이 결합됐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