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총 1위는 시대의 상징
한때 반도체 '틈새시장' 노렸던 엔비디아
AI 단독 주연 오르며 글로벌 증시 흔들어
제너럴일렉트릭(GE), 마이크로소프트(MS), 엑손모빌, 애플, 아마존뿐이다. 인터넷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구글 모회사 알파벳조차 시총 1위에 오르지 못했다.
올해 한 곳이 늘었다. 엔비디아가 ‘21세기 시총 1위’에 올랐다. 5년 전만 해도 상위 20위 안에도 들지 못했던 엔비디아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세상의 변화를 상징한다.
제조업의 시대에는 GE가, PC시대에는 MS가, 석유 패권의 시대에는 엑손모빌이, 플랫폼 시대에는 아마존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업이었다. 미국이 세상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시총 1위 기업의 흥망성쇠는 곧 현대 인류의 역사다. 반도체 ‘틈새시장’을 공략하던 엔비디아가 시총 1위 자리를 차지한 것은 ‘AI 혁명’이 변곡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PC시대와 AI시대를 이끄는 MS, 모바일 시대를 주도한 애플의 성장 속도와 비교해도 엔비디아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애플이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후 3조 달러를 달성하는 데 6년이 걸렸고 MS는 5년이 소요됐지만 엔비디아는 지난 6월 불과 1년 만에 시총 1조 달러 기업에서 3조 달러 기업이 됐다.
시총 2조 달러에서 3조 달러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0일이었다. 엔비디아 시대의 파급력이 애플이나 MS를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제조업 시대의 GE, 석유 시대의 엑손모빌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GE는 미국 시가총액 1위를 10년 동안 지켰다. GE는 1993년 9월 미국 시가총액 1위에 처음 오른 이후 2004년에 마지막 1위를 기록했다. 특히1999년부터 2000년 2분기까지의 미국 경제지표는 호조라고 할 정도로 좋았다.
미국의 ‘골디락스’로 불리는 시기였다. 1999년 4.2%였던 실업률이 3.9%까지 낮아졌고 2000년 GDP 성장률은 5%에 달했다. 증시에서도 닷컴버블 주역인 시스코가 시가총액 2690억 달러를 기록하며 4위에 올랐고 에너지 기업인 엑손모빌과 제약회사인 화이자가 각각 시가총액 2, 3위에 올랐다.
하지만 GE로 대변되는 제조업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GE는 올해 3개 회사로 분할되면서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품질보다 숫자에 집착했던 잘못된 경영판단이 패착이었다.
2005~2007년은 ‘석유의 시대’였다.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강국의 경제성장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석유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 특히 중국이 고속성장하면서 2005년 배럴당 80달러 아래였던 유가는 2008년 중순 123달러까지 치솟았다. 수혜는 에너지 패권을 쥔 엑손모빌, 셰브론 등 미국 정유기업으로 돌아갔다.
2005년 엑손모빌은 GE를 제치고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에 등극했다. 2006년을 건너뛰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연속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기술주가 산업을 주도하면서 주연 자리를 뺏겼고 2020년 다우지수에서 92년 만에 퇴출됐다. ‘석유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 이벤트였다.
2010년대는 애플의 시대다.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출시한 후 2011년 시총 2위에 오르면서 1위인 엑손모빌을 위협했고 2012년 마침내 1위에 올랐다. 반면 모바일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MS는 2011년 시가총액이 세계 10위까지 곤두박질쳤다. MS 외에 에너지, 금융 등 다양한 기업이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짧은 전성기를 누린 기업도 있다. 모바일 시대가 열린 후 소프트웨어 플랫폼 기업이 주도권을 잡았던 2019년 아마존이 MS와 애플을 누르고 시총 1위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 전자상거래 시장을 장악하던 아마존이었지만 시총 1위 자리를 유지한 기간은 단 13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이커머스 시장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가는 IT 주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020년대 들어서는 온라인 사업이 커지면서 IT 기업이 순위를 장악하게 됐다. 지난해 말 기준 시가총액 1위 기업은 애플이었고 MS,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순으로 뒤를 이었다. AI 단독 주연 된 증시올 들어서는 AI가 증시와 산업의 단독 주연으로 떠오른 모습이다. AI를 등에 업은 MS가 올해 1월 애플 시총을 추월했고 또 다른 AI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은 2023년 50달러대였던 주가가 현재 173달러대까지 뛰면서 시가총액 10위 안에 들었다.
엔비디아발 AI 광풍은 일본과 대만 증시에까지 영향을 줬다. 일본 증시에서는 반도체 장비주가 들썩였고 대만에서는 TSMC, UMC 등 파운드리 기업과 디자인하우스 기업이 폭등했다.
엔비디아의 성장세는 기이할 정도다. 엔비디아는 초기 3D 비디오게임을 구동하는 GPU를 제조해 판매하면서 게이머들 사이에선 일찍이 이름을 알렸다. 2015년 이후 비트코인 열풍으로 코인 채굴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며 수요가 급증했고 코로나19 시기 원격근무가 늘면서 또 한 차례 실적이 급등했다.
엔비디아가 한때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던 인텔의 시가총액을 처음으로 추월한 건 2020년이다. CPU의 시대에서 GPU의 시대로의 전환을 준비하던 때였다.
2022년 챗GPT가 등장한 후 엔비디아의 상승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2022년 말 이후 주가는 9배 이상 뛰었다.
AI와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의 GPU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엔비디아 주가가 그야말로 날아올랐다. 오픈AI가 서막을 연 생성형 AI 시대의 주연이 확실해진 것이다.
미국 증시 역사에서 엔비디아처럼 단기간에 시총이 급격히 불어난 기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인텔은 이제 적수도 되지 않는다. ‘AI 모멘텀, 엔비디아 이펙트’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다. 엔비디아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증시를 쥐락펴락한다. GPU를 사실상 독점하는 엔비디아는 절대권력이 됐다.
전 세계적인 AI 붐이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엔비디아가 한동안 랠리를 이어 갈 것이란 전망이다. 엔비디아는 AI 모델 학습에 필수 반도체인 AI 가속기 시장의 약 98%를 점유하고 있으며 핵심 부품인 GPU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다.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 생태계 시장에 대한 기대도 있다. 엔비디아의 AI 개발용 소프트웨이인 ‘쿠다’는 AI 개발자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으며 엔비디아의 GPU에서만 작동한다.
월가에선 엔비디아의 화려한 부상으로 소수 AI 기업만 주가 랠리를 펼치고 있어 증시 전체의 취약성은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P통신은 지난 6월 “소수의 슈퍼스타들이 뉴욕증시 최고가 경신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잠재적인 위험에 더욱 취약하다는 뜻”이라며 “더 많은 기업이 등장해야 건강한 시장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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