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 차익’ 눈멀어 청약통장 거래하기도
규제정책 늘며 복잡해진 시스템, ‘묻지마 청약’ 양산

청약통장, ‘내 집 마련’에서 ‘투기’, ‘로또’의 수단으로 [청약통장의 모든 것①]
청약제도와 청약통장. 무주택자에게 내집 마련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40년간 많은 사람들은 청약통장으로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청약통장의 역사는 투기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투기는 반복됐다. 1977년 아파트 분양이 시작될 초기 여의도 목화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한 투기꾼이 2억원으로 청약통장 100개를 사들여 분양 신청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후에도 청약통장을 불법으로 매입해 응찰하는 사건 등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청약통장 가입자는 25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상당수는 내집 마련보다는 재테크 수단으로 통장을 들고 있다. 최근에는 로또 아파트의 잇따른 등장으로 청약통장의 쓸모가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집 마련에서 투기로, 투기에서 로또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청약 전문가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는 “주택청약은 ‘국가가 허락한 로또’다”라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서초구 반포동 소재 ‘래미안 원펜타스’였다. 1순위 평균 경쟁률이 527대 1을 기록했다. 주변 아파트 시세보다 싸게 나와 당첨만 되면 수억원의 차익을 낼 수 있다는 얘기에 178가구 모집에 9만 명이 넘게 몰렸다. 당첨자 중에는 청약 가점 만점자가 3명이나 나왔다. 부양가족까지 7식구가 15년 동안 무주택으로 버텨야 가능한 점수. 게다가 당첨자는 아파트 분양가인 20억원을 마련해야 하는 실수요자로 간주된다. 언뜻 봐도 7식구가 15년간 전세를 전전한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다.

정부는 즉각 하반기 분양단지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이겠다고 나섰다. 청약 부정행위 적발 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계약 취소, 10년간 재당첨 제한도 뒤따른다. 그럼에도 ‘수억원 로또’의 꿈은 너무나 달콤하다. 수십 년간 투기의 수단이 됐고 부정 청약이 발생해 온 이유다.

청약으로 대표되는 현행 주택공급 제도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정부는 분양가를 규제하고 진입장벽을 높여 실수요에게 주거 선호단지에 주택을 공급하려 하지만 ‘묻지마 청약’, ‘억대 시세 차익’이라는 결말로 마무리되고 있다. 소수의 당첨자는 웃지만 선택받지 못한 다수는 불편한 결말이다.

이 같은 문제는 약 반세기 전 탄생한 청약제도가 ‘공급 확대’와 ‘시장 관리’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련되면서 비롯했다. 수요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질 때마다 정부는 시스템을 손질했지만 더없이 촘촘해진 시스템 속에서도 ‘청약 대박’이라는 역사적 학습효과 속에 욕망은 손을 뻗고 있다. 청약제도 탄생시킨 강남 아파트 열풍
1978년 10월 잠실시영아파트 준공식 현장 모습. 사진=서울시
1978년 10월 잠실시영아파트 준공식 현장 모습. 사진=서울시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한국의 청약제도는 지금까지 분양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남 아파트에서 출발했다. 선분양 제도부터 국민주택과 민영주택 청약 요건이 각기 다른 ‘투트랙 시스템’과 무주택 및 세대주 분양, 1순위 요건부터 우선 공급(현재의 특별공급), 청약통장 납입, 재당첨 제한 등 강남 개발이 본격화한 1970년대 도입된 제도들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서울 도심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동 개발(강남 개발)에 착수한 정부는 지금의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 곳곳에 아파트지구를 지정하고 주택공급에 나섰다. 특히 반포와 압구정 등에 고학력 중산층을 겨냥한 아파트를 지으면서 인기를 끌게 된다. 그 시초 격인 반포주공1단지는 서울대 교수에게 특별분양하거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진 사택으로 공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택공급이 시급하던 당시에도 정부와 국내 기업은 아파트 개발사업을 할 만한 자금이 넉넉지 않았다. 반포주공1단지 중 3주구는 AID(미국 국제개발처) 차관을 들여와 지었을 정도였다. 특히 민간 건설사가 직접 자금을 조달해 토지를 사들이고 건축비용까지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

1977년 정부는 선분양 제도와 함께 분양가 규제를 도입하는 한편, ‘국민주택 우선공급에 관한 규칙’ 제정을 통해 국민주택 공급 시스템을 체계화했다. 이때 부양가족이 있는 무주택 세대주 요건이 생겼고 ‘순위’대로 당첨 우선권을 주기 시작했다. 국민주택청약부금에 가입해야 모집신청을 할 수 있었다.

반포1단지 이후 분양한 반포3단지는 이 같은 청약 제도를 적용받았는데 우선순위 적용자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1순위는 영구불임 시술을 받은 해외 취업 근로자, 2순위 영구불임 시술자, 3순위 해외 취업 근로자 순으로 분양 우선순위를 정했다. 한국에 인구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국가가 내건 슬로건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다. 산아제한 정책을 수용한 이들에게 아파트 우선권을 줬다. 이 단지는 불임 시술을 받은 입주민이 많다는 의미에서 ‘내시촌’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저출산 문제로 다자녀 특별공급, 신생아 특별공급이 생긴 지금과 달리 산아제한, 외화벌이에 힘썼던 당시 정부의 기조를 엿볼 수 있는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시장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신개념 주거상품이었던 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투기꾼들이 몰렸다. 이때부터 ‘딱지 거래’와 ‘통장 매매’가 성행했다. 1978년에는 내부에서 쉬쉬하던 ‘압구정 현대 특혜분양 사건’도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고위직 공무원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고위층 220여 명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

정부는 곧 민영주택의 분양가격 및 당첨자 선정에까지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국민주택과 민영주택을 아우르는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을 제정했는데 현재 1순위 공급 요건과 마찬가지로 국민주택과 달리 민영주택 공급 시에는 1가구 1주택자에도 분양 자격을 줬다. 재당첨 제한도 시작됐다. 청약 규제책·특별공급 자꾸 늘어
청약통장, ‘내 집 마련’에서 ‘투기’, ‘로또’의 수단으로 [청약통장의 모든 것①]
정책은 나름의 효과를 봤다. 정부는 수요자들이 납입한 청약통장, 국민주택채권 수익을 바탕으로 국민주택기금을 조성해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할 수 있었다. 수요자 입장에선 선분양을 통해 당장의 자금 부담 없이 내집을 마련하는 게 가능했다. 입주할 때 잔금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 건설사들은 수분양자들의 자금을 수혈받아 아파트를 올렸다.

권대중 서강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선분양과 청약제도는 자금력이 부족한 건설사들에 아파트를 지을 자금을 공급하면서 주택공급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며 “선분양은 한국, 일본 정도에나 있는 제도인데 민간아파트 공급까지 정부에서 관리하는 나라는 없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정부 입장에선 선분양을 하면 매매시장을 들썩이게 할 수 있는 대기수요자에게 2~3년 먼저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집값 상승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효과를 보게 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집값이 급등하던 시기마다 정부는 청약 관련 규제를 강화해 시장에 개입했다. 반대로 주택시장이 침체하면 규제를 풀었다. 국민소득이 급성장하던 1980년대 주택가격은 ‘3저 호황(저금리·저달러·저유가)’을 맞아 폭등했다. 이 시기 본격적인 분양가상한제와 분양권 전매 금지 정책이 시행됐다.

반대로 외환위기가 덮친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분양권 전매, 청약부금·예금 가입 자격 등이 완화됐다. 1999년에는 건설사 부도로 선분양을 받은 아파트 수분양자들이 피해를 입자 기존 주택사업공제조합을 대신해 주택분양보증을 제공하는 대한주택보증(현 주택도시보증공사)이 설립됐다.

2000년대 초부터 집값이 다시 반등하자 다시 규제는 강화됐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획기적인 ‘청약 가점제’를 도입해 숫자로 당첨 순위를 정하도록 했다. 정책 검토 초기계획과 달리 가구주 연령은 가점 항목에서 빠졌고 현재까지 무주택 기간(최고 32점), 부양가족 수(최고 35점), 청약통장 가입기간(최고 17점)을 기준으로 ‘84점 만점’ 시스템이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부활한 자금조달계획서도 이때 생겼다.

이처럼 집값 상승기에는 지난 규제가 부활하거나 새 규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청약제도가 적용되는 범위는 넓어졌다. 2019년에는 그동안 주택사업자들이 임의로 처리했던 부적격, 계약취소 물량 역시 ‘무순위 청약제도’로 편입됐다. 그러나 무순위 청약 역시 분양가 규제와 맞물려 ‘로또 분양’ 열풍을 낳게 했다. 300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며 청약홈을 마비시켰던 ‘동탄역 롯데캐슬’ 사태는 예고됐던 셈이다. 2021년에는 무순위 청약 물량 역시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무주택자’에 한해 공급됐다.

그럼에도 빈틈을 노리는 이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2023년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 분양한 부정청약 의심단지 50곳(2만352가구)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위장전입, 위장 이혼, 청약통장 거래 행위 등이 적발됐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 수도권, 특히 서울 주택공급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답이 없다”며 “수요 대비 공급이 항상 부족한 가운데 아파트 청약이 무주택 서민들의 ‘내집 마련을 위한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하기에 엄격한 요건으로 공정성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만 청약 가점제 시행 이후 현실적으로 서울, 수도권 아파트를 분양받기 어려워진 젊은 실수요자를 위한 특별공급 물량은 늘었다. 신혼부부 특별공급, 생애최초 특별공급이 2008년 도입됐고 신혼 특공 물량은 2018년 기존의 2배로 늘었다. 올해부터는 신생아 특별공급(우선공급) 물량도 나오고 있다.

이은형 위원은 “현행 청약제도하에서 일반분양을 받기 어렵지만 정책적으로 주택을 우선 공급해야 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특별공급 유형 및 물량이 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