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신년기획
2025 위기극복 키워드 '한국인' ①
[편집자주]1987년부터 10년 간격으로 한국 사회는 크게 흔들렸다. 큰 사회적 변혁기이거나 국가적 재난의 시기였다. 이를 극복한 원동력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나선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보며 ‘의병(義兵)’이란 단어를 떠올렸다고 했다. 영어로는 제대로 번역할 단어도 없는 의병.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로 번역해봐야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세계에는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한국 사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현장에 등장했다. 임무가 끝나면 묵묵히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2025년은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고 한다. 올해도 위기에 강한 한국인 DNA가 발현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각목과 화염병, 최루탄과 곤봉이 난무하는 시가지. 1980년대와 1990년대 외국인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이런 장면을 떠올렸다. 이뿐 아니었다. 북한은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까지 했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였다. 내부적으로는 정치와 사회는 불안정했다. 경제는 매년 10% 가까이 성장했지만 정치와 사회체제의 변화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이 속도의 차이가 균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경제적 성장은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부채질했다. 대학생이 앞장서고, 넥타이 부대가 함께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스스로 얻어냈다. 결국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불완전했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이어졌다.
10년 후인 1997년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고속성장하던 한국 경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허약한 나라’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은 불안정성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한국 이미지는 한국인들에 의해 반전됐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은 세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달러가 부족하다고 하니 국민들은 집에 있는 달러와 아이들 돌반지, 결혼반지를 들고 나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갖고 있으면 가치가 올라가는 자산을 대가 없이 기부했다. 이 집단적 움직임이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며 한국은 IMF에서 빌린 돈을 조기에 전액 상환했다. IMF 체제를 가장 빨리 졸업한 나라로 기록됐다.
다시 10년 후. 2007년 12월에도 세계가 주목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도 생생한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이다.
유조선과 크레인 예인선이 충돌했다. 태안 앞바다는 순식간은 검게 물들었다. 죽음의 바다가 됐다. 전문가들은 수십 년 지나야 생태계가 복원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전에는 채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 후 물고기는 돌아왔고 2년이 지나지 않아 생태계 상당 부분이 복원됐다. 반전을 가능케 한 것은 국민들의 손길이었다. 일이 벌어지자 120만 명이 넘는 국민이 태안을 찾았다. 겨울 바다에 맨손을 집어넣고 해변가 돌 사이에 끼어 있는 기름을 일일이 닦아냈다. 그렇게 바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안의 기적’으로 불린다.
태안의 기적은 오래전 또 하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했다. 1960년대까지 한반도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거치며 황폐화됐다. 유엔(UN)은 한국의 산림은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박정희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민들은 배고픈 시절임에도 떼지어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다. 유명무실해진 식목일이 과거 공휴일이었던 배경이다. 1982년 UN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로 한국을 평가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시 최근으로 돌아와 태안 사건 이후 10년이 흐른 2016년 말과 2017년 초 한국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가 벌어졌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겨울 내내 광화문으로 나왔다. 분노가 깔려 있었지만 혁명의 과정은 평화로웠다. 공권력도 평화 시위를 보장했다. 그리고 2017년 3월 한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다. 이름 없는 시민들이 이뤄낸 평화적 혁명을 혁명의 나라 프랑스 사람들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문화적 유전자의 근거 : '밈(meme)' 1987년, 1997년, 2007년, 2017년 10년 간격으로 벌어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집단적 헌신을 보여준 한국인들의 모습은 무언가 다른 문화적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하기 충분했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도킨스는 “인간은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생존 기계다”라고 했다.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로 유전자에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먹고 살고 사랑하며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라는 얘기다.
집단적 헌신과 유전자의 복제, 뭔가 연결될 듯하다. 그 책 11장에 가면 의문이 풀린다. 그는 유전의 영역을 인간 문명으로 확대했다. 문화적 유전자, 밈(meme)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또 다른 자기 복제자’란 설명을 달았다.
뇌를 통해 자기복제를 하며 유전되는 문화, 이를 밈이라고 칭했다. 언어, 의식과 관습, 신이라는 개념, 좋은 아이디어, 오랜 기간 내려오는 문화적 전통 등이 밈에 해당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밈이란 단어의 용도와 공통점이 있다. 뇌를 숙주로 활용한다는 점과 전파력이 있고 오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화유전론의 관점에서 봐도 위기의 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한국인들에게는 특정한 밈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외신들이 코로나19 극복 과정을 보며 “한국인들의 취미는 위기 극복인 것 같다”고 평가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도 “1960년 가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한국이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단어 ‘문화’밖에 없다”고 했다. 2024년 말 한국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비상계엄이라는 군사독재의 탄약 냄새가 풍기는 구시대적 도발을 국민들의 힘으로 막아냈다.
야당 대표는 계엄령이 떨어지자 국회로 향하며 유튜브 방송을 했다. “국민 여러분의 힘만이 계엄령을 막을 수 있다.” 국민들은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의 장갑차를 막고 경찰과 대치하며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계엄선포 2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다. 그들은 내란혐의를 받는 대통령 탄핵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여의도로 달려나갔다. 11일 만에 국회에서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응원봉 시위는 K-시위라는 또 다른 장르를 만들어냈다.
2025년에도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내적 위기에 미·중 무역전쟁과 트럼프의 등장, 세계화의 해체, 유럽과 중동의 두 개의 전쟁 지속 등이 동시에 겹쳐 다가오는 위기다. 조윤제 연세대 특임교수는 “한국은 국민이 강한 나라다”라고 했다. 한국인들은 위기에 다시 그들의 DNA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 밈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대강 살펴봤다.
'생존능력'과 '담대함' :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첫 번째는 생존능력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다. 한민족은 생존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라는 제국의 침략을 수천 년 버텨냈고, 유럽까지 점령한 몽골의 7차례 침입에도 정복당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됐지만 항일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헌신성이 생겨났다.
조선이 아닌 한국에서는 형태를 달리하며 나타났다. 기업인들은 입만 열면 사업보국을 외쳤다. 원양어선을 탄 어부들도 달러를 벌어 애국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금모으기 운동도 생존능력과 연관된 헌신이었다. 이는 국가뿐 아니라 조직과 자식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이는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한국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공동체 밈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인들은 우리 집, 우리 딸, 심지어 우리 와이프, 우리 남편이라는 표현도 쓴다. 외국인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럽다.
이는 공동체에 자연스러운 애착으로 연결된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보이면 한국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집단적으로 구해내는 장면도 그 사례다. 때로는 집단주의가 지나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비판도 받아야 했다.
다음은 담대함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4대 강국에 대한 두려움도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한국 역사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모르면 두렵지만 역사 속에 이들 강대국은 모두 한국인들에게 극복의 대상이었다. 세계 4대 강국이 이럴진대 나머지 나라들은 대충 ‘오랑캐’로 퉁쳐 버리는 엄청난 스케일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업 경영에서도 스케일은 나타났다. 대륙의 기질과 자부심은 못 오를 산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삼성은 1980년대 이후 ‘넘사벽’이었던 소니를 타깃으로 했고, 현대자동차는 무모하게 자동차를 만드는 데 도전했다. 둘 다 성공했고 기업인들은 신화가 됐다.
한국의 밈 중 대표는 역시 '빨리빨리'다. 1990년 공중전화박스 살인사건이 있었다.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고 앞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 한국인들의 조급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됐다. 한국인들은 인터넷이 잠깐 버벅거리면 참지 못한다. 커피자판기에 동전을 넣음과 동시에 손도 들어간다. 엘리베이터에 ‘닫힘’ 버튼은 대부분 닳아 없어져 있다.
1990년대 빨리빨리는 한국을 조롱할 때 주로 쓰였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 해서 냄비근성이라는 비하적 표현도 들어야 했다. 최근 한 국회의원의 말대로 금방 잊어버리고 또 찍어준다고 해서 민중 개돼지론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빨리빨리란 밈은 그러나 한국 사회가 발전하자 다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못 참는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가 됐다. 세계에서 초고속인터넷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가 됐고 인천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심사능력을 자랑한다. 이런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한국 시장에서 통하면 세계 시장에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치적으로도 빨리빨리는 활용됐다. 대통령 탄핵이 그 사례다. 최근 비상계엄이 발령되고 순식간에 해제하고, 이후 11일 만에 대통령을 탄핵해버렸다. 블룸버그통신은 한국 사회의 빠른 대응과 결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의 효율성과 갈등 해결 능력의 기반이라고 분석했다.
빨리빨리란 밈의 탄생은 급격한 발전과 밀집화의 결과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선진국에서 200년 걸린 산업화, 민주화를 60~70년에 마무리하다 보니 뭐든 빨리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한국인을 특징지었다는 설명이다. 부작용도 있다. 밀집화는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긴장감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사고와 행동은 조급하거나 빠르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리더십의 돌연변이가 필요한 시간 한국인들은 IQ가 125쯤 되면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만든 리처드 파인만의 IQ는 125였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과 1, 2위를 다툰다.
이런 한국인들의 대학진학률은 세계 1위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공부까지 해대니 전체적인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고 이는 경쟁을 치열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전반적인 사회의 수준이 빨리 높아지고 코로나19 같은 위기에 대응하는 데 어느 나라보다 유리하다.
또한 한국인 특유의 실용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유리한 것을 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왕조적 전통의 소멸이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갔다. 그 전통은 한국인들의 삶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궁궐과 종묘는 관광지일 뿐이다.
역사적 유적은 당대에는 문화였다. 문화는 당대에만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주자학과 왕조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 왕조의 전통이 사라진 표면적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실용주의를 삶의 전략으로 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왕은 조선에서나 의미가 있었지 한국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깨끗이 내다버렸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현대 한국인들은 불교 대신 기독교를 선택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기독교가 제1의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구조가 똑같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 자체가 기복신앙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절에 가서 아이들 대학 시험 잘 보게 비는 것이나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이나 구조는 같다. 어차피 같은 것,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가는 선택을 했다.
한국을 집단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그 밑에는 개인의 역동성이 꿈틀거렸다. 산업화 시절 도시의 노동력을 공급한 것은 농촌의 인력이었다. 민족대이동으로 불렸다.
이들은 집단적 의지에 의해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출세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개인적 결단이었다. 집단주의 이면에는 개인의 역동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4년 대통령 탄핵의 광장으로 몰려온 이들도 비슷했다. 개인적으로도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인 계엄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창의성과 수용성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한국인은 오랜 기간 창의성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억압적 교육 시스템을 뚫고 K팝, K무비, K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은 창의성 외에 설명할 단어는 별로 없다.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창의성의 근거로 시래기와 누룽지를 들었다. 버릴 것을 리사이클링해 별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즐겨먹는 뼈해장국, 순대, 족발 등도 비슷한 과정의 산물이다. 이어령 선생은 “버려야 할 것을 다 끌어안고,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로 만드는 것이 창조정신이다. 그중 가장 창조적인 정신은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 창조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한국인의 조상이 한반도에 자리 잡은 것을 두고 젊은이들은 “선조들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고 표현한다. 산이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제대로 된 자원도 없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결핍은 창조정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창조성이 생겨났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받아들이려고 했다. 대표적인 결과물이 K팝이다. K팝은 힙합, 발라드, 댄스, 록 등 한국적 전통이 전혀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뒤섞어 세계의 주류 음악으로 올려놨다.
2025년 한국에는 수많은 난제들이 놓여 있다. 이 과정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의 문화적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을 할지 궁금해진다. 진화의 조건은 돌연변이다. 한국 사회가 위기를 이겨내고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돌연변이가 필요하다. 그 돌연변이는 새로운 리더십일 수밖에 없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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