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튜더 작가 인터뷰
2025년 분열된 한국, '리컨택트' 필요
한국 정치, 판돈 키우는 포커게임 같아
대선주자 '구세주'로 대하는 메시아적 정치
정책 방향보다 '거물'의 존재가 중요
다니엘 튜더 작가 인터뷰 “2025년 한국 사회의 키워드를 꼽자면 ‘리컨택트(recontact)’다. 분열된 사회에서 다시 연결된 사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영국 태생 다니엘 튜더 작가의 글과 말은 단순히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이 아니다.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한 그는 한국 정치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날카로운 문장으로 전해왔다.
2012년 발간한 책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식 경제성장과 그 사이에서 잃은 '개인'의 가치를 담아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금융업 경험이 있어 경제 분석도 치밀하다. 2014년 조선업 종사자 수가 정점을 찍을 때 한국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예측했으며 영국의 러스트벨트 사례를 들어 사회적 문제를 경고했다. 또한 ‘K-밸류업’ 등장 10년 전부터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을 잘못된 지배구조에서 찾았다.
2002년 월드컵부터 계엄사태까지 경험한 튜더 작가는 한국 사회가 극심한 ‘냉소주의’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는 단절과 개인화가 심화됐다. 지금은 오히려 영국에 갔을 때 사람들 간의 ‘정(情)’을 느낄 정도”라며 “한국이 끈끈하게 화합했던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 특파원 2년 만인 2012년 책을 썼다. 짧은 시간에 한국을 파악한 비결은 무엇인가.
“유명한 사람들만 만나는 ‘우아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 한국에 대한 책은 서양 사람들의 선입견에 의해 하향식으로 써진 내용이 많았다. 주제는 삼성전자, 북한, 성형수술, 개고기 등 극단적이고 단편적인 내용이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섬세함이 없었다. 택시기사, 주부, 대학생, 직장인 등 보편적인 사람들을 만나며 진짜 한국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은 민주화,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국가다. 어떻게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다고 보나.
“한국 ‘민족’의 특수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족의 특수성이 있었다면 ‘북한은 왜 전혀 다른 시스템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근현대사와 문화로부터 나오는 ‘한국인’의 특수성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트라우마의 역사다. 식민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전쟁 트라우마, 독재 트라우마가 쌓여 있고 이를 치열하게 극복한 경험이 있다. 저항과 전복을 겪으며 만들어온 역사가 곧 한국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콩글리시 ‘파이팅’ 정신이랄까.”
-그럼에도 한국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역사가 짧은 나라다.
“아시아에서 진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는 한국과 대만 정도다. 김대중과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한국의 민주주의 의식을 보여준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민주주의가 서구의 개념이고 아시아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문화가 우리의 운명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했다. 한국은 독립 후 미군정 통치 과정에서 민주주의적 제도가 마련되고 선거가 치러졌다.
이승만 정부는 겉치레로라도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춰야 했다. 대한민국은 독재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도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야당이 존재했다. 이러한 야당의 존재는 권력에 대한 견제를 가능하게 했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 의식이 빠르게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2024년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남녀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등 많은 갈등이 결국 정치 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한국 정치는 서로를 적대시해야 살아남는다. 마치 판돈을 계속 키우는 포커게임처럼 서로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매장시켜야 하는 구조다.
정당의 정책 방향보다 ‘거물’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제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은 새로운 대선주자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모든 의심을 거두고 한 사람을 띄워준다.
영국에서는 총리가 내각 의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일 뿐 한국처럼 큰 영향력을 갖지는 않는다. 한국도 메시아적인 정치를 벗어나 정당의 정책 방향을 논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치로 가야 하지 않을까.”
-영국처럼 내각제를 택해야 한다는 말일까.
“영국인의 시선에서는 내각제가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국 정치 역시 많은 다른 문제가 있지만 내각제라는 ‘시스템’에서 발현되는 문제는 없다. 하지만 한국은 정치 문제의 상당수가 ‘시스템’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5년간 임기를 누리고 인기가 떨어지면 곧 현 대통령을 심판할 새로운 영웅 서사가 만들어지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인사’로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 하고 정책적인 논의보다 다른 정쟁에 포커스가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가끔 해외 기업 컨설팅을 하는데, 이들의 가장 큰 의문은 ‘정책의 지속성’이다. 정책 지속성과 일관성이 떨어지는 정치 환경은 해외 기업이나 투자자들이 한국을 고려할 때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영국은 한국보다 계층 분별이 뚜렷하다. 이에 따른 갈등은 없나.
“귀족에 대한 개념은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 계층 간 갈등도 거의 없다.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처럼 서로가 전혀 다른 시대를 사는 것처럼 양극화돼 있지 않다. 대신 영국인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류층인지 하류층인지를 판단한다. 주로 발음이나 억양으로 자라온 환경과 출신, 교육 수준을 알 수 있다.
1990년대까지는 상류층인지 아닌지가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주긴 했다. 보수당 출신의 마이클 헤젤타인 전 부총리가 처음 정계에 입문했을 때 다른 귀족 출신 정치인에게 “이 사람의 문제는 가구를 직접 사야 했다는 것”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가구가 없다는 비유를 통해 ‘헤리티지’가 없다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10년 전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한 경쟁이 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경쟁이 초래하는 갈등은 더 다양한 갈래로 뻗어 나가고 있다. 2022년 OECD가 발간한 한국 경제보고서에 ‘황금티켓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명문대에 진학하고 누구나 아는 직장에 가거나 전문직이 되면 성공한 인생이 보장된다고 믿는 현상이다. 한국인은 이를 위해 극도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에 황금 티켓이라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젊은 세대에게는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오는 압박감과 경쟁이 젊은 세대의 심리적 박탈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성의 박탈감은 남녀 갈등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초래한다. 아버지 세대에는 여성과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로도 같은 뜻의 ‘Male Malaise(메일 멀레이즈)’라는 표현이 있다. 경제 구조로 좌절된 남성의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순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남자든 여자든 어렵다."
-갈등으로 인해 깊게 파인 한국 사회를 회복할 희망의 단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유연함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 사회가 겪는 문제를 영국에 비해서 훨씬 빨리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가진 역동성 때문이다. 계엄령이 터지고 봉합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역시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 튜더는…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기사를 쓴 기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으로 지낸 튜더 작가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서 정치, 경제,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미국계 증권사와 한국 증권사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헤지펀드 회사를 다니며 금융업계에서 경험을 쌓았다. 한국에서는 책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이후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해왔다. 청와대 해외언론 비서관실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경험도 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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