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는 경기중·고와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엘리트 중 엘리트다. 젊은 시절 악상이 떠오르면 즉석에서 작곡했다. 천재였다.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아름다운 사람’ 등 주옥같은 노래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도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그랬다. 1991년 사비를 털어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한 뒤 2024년 폐관할 때까지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공연문화 확산을 위해 몸을 던졌다.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중단한 이유를 설명하며)는 말마따나 돈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김장하는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가난했다.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한약방에서 일했다. 낮에는 약초를 썰고 밤에는 공부했다. 만 18세 때 최연소로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했다. 19세 때인 1963년 ‘남성당 한약방’을 개업한 뒤 2022년 은퇴할 때까지 60년 일했다. 약효가 좋아 전국 한약방 중 세금을 가장 많이 낼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력은 이처럼 다르다. 하지만 삶의 흔적은 너무 닮았다. 김민기는 ‘뒷것’을 자처했다. 철저하게 배우나 가수를 앞세웠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장현성 등 배우와 고 김광석등 가수를 ‘앞것’으로 키워내면서 자신은 ‘뒷것 중의 뒷것’이라며 꼭꼭 숨었다. 언론 인터뷰도 극구 사양했다. ‘땅위의 조용필, 땅밑의 김민기’인 시절 조용필과 만나서도 자신은 가수가 아니라며 노래 한 곡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2024년 그가 작고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슴 시려한 것도 뒷것 김민기의 삶이 전해주는 묵직한 울림 때문이었다.
김장하는 ‘어른’이다. 한약방으로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세상의 병든 이들,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돈이기에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 된다”(명신고 이사장 퇴임사 중)는 소신을 실천했다.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뒤 국가에 헌납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조건 없이 장학금을 주었다. 김장하 장학생인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인사 가자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사회에 갚으라”고 했다.
평생이 그런 식이었다.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인권 분야 등에 두루 지원하면서도 자신은 나서지 않았다. 정치나 정치권과는 철저히 거리를 뒀다. 각종 수상도 거부했으며 언론 인터뷰도 사양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줬으면 그만이지’와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도 주변 인물 인터뷰를 통해 구성했을 정도였다.
한우물을 파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나눠줬다는 점, 그러면서도 자신은 철저히 뒤로 숨었다는 점에서 ‘뒷것 김민기’와 ‘어른 김장하’는 정확히 닮았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것도 뒷것들과 어른들이 있어서였다. 밤낮없이 일한 근로자들과 기술개발에 몸을 던진 엔지니어들, 헌신적인 공무원 등 뒷것들과 사회의 중심을 잡아준 고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들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지금은 다르다. 죄다 앞것뿐이고 어른은 보기 힘들다. 경제가 어렵고 정국이 혼란한 최근엔 더욱 그렇다.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면서 진정한 사회 통합을 위해 몸을 던지는 ‘뒷것 어른’이 절실해지는 가정의 달이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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