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그룹 서울 본사 전경. 한경 DB
애경그룹 서울 본사 전경. 한경 DB
애경그룹이 생존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경기도 광주의 명문 골프장인 ‘중부CC’를 매각한데 이어 핵심 계열사인 애경산업까지 매물로 내놨어요. 애경산업은 애경의 모태가 된 회사이자 그룹의 상징과도 같죠. 트리오 세제, 2080 치약, 케라시스 샴푸 같은 생활용품과 에이지투웨니스 같은 화장품 브랜드가 전부 이 회사 겁니다. 그럼에도 팔겠다는 건 그룹의 해체만은 막기 위한 승부수와 다름 없어요. 애경의 지주사인 AK홀딩스의 올 1분기 부채비율은 350%를 넘어섰습니다. 200%만 넘어도 부채가 많은 편으로 분류되는데, 350%는 굉장히 높은 수준입니다. 애경은 작년 말 기준 자산 총액이 7조원을 넘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되어 있어는데, 이번 계열사 매각으로 곧 대기업 집단에서도 빠질 듯합니다.

사실 애경의 어려움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로 기록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애경산업이 연루돼 오랜 기간 재판을 받았고 작년 말엔 179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주항공 참사로 또다시 큰 사회적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애경은 사고 때마다 고개를 숙였지만 신뢰가 훼손된 것뿐만 아니라 매출까지 크게 감소해 사업을 이어가는 게 힘든 상황이 됐어요. 애경은 과연 이 위기를 딛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제주항공, 참사에 업황까지 악화
애경은 채몽인 창업주가 1954년 애경유지공업을 설립하며 시작됐어요. 전쟁의 아픔을 딛고 나라가 재건할 때였죠. 세탁비누밖에 없었던 시절에 애경은 미용비누를 내놔 큰 성공을 거둬요. 1966년엔 국내 첫 주방세제 트리오도 선보였고요. 트리오는 설거지할 때뿐 아니라 야채와 과일을 씻거나 심지어 머리를 감을 때도 쓰였어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애경 하면 비누와 세제를 떠올리는 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에요.

이렇게 잘나가던 애경이 큰 위기를 맞은 건 1970년이었어요. 채몽인 창업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거든요. 당시 34세였던 부인 장영신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어요. 여자가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할 때였어요. 말도 안 되는 차별과 냉대 속에서도 장 회장은 꿋꿋하게 사업을 이어갔어요. 아니, 이어간 정도가 아니라 크게 확장했어요. 1970년대 후반 울산에 세제의 원재료를 만드는 화학공장을 세웠어요. 수직계열화를 한 것이죠. 지금의 애경케미칼입니다. 또 생활용품뿐 아니라 화장품으로 사업 영역도 넓혔어요. 또 1990년대엔 서울 구로에 백화점을 열고 유통업에 진출했죠.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 배경으로 나왔던 바로 그 백화점이었어요. 2005년엔 제주항공을 세워 항공업에도 뛰어들었어요.

현재 애경은 지주회사 체제로 되어 있어요. 1936년생인 장영신 회장과 그의 세 아들이 지주사인 AK홀딩스의 대주주로 있고 AK홀딩스를 통해 그룹을 지배해요. 문제는 사업이 전반 잘 안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무엇보다 무안공항 참사를 낸 제주항공이 너무 안 좋아요. 제주항공은 참사를 내기 직전까진 좋았어요. 코로나19 사태 때 억눌렸던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한 영향이 컸어요. 2022년 7000억원대에 불과했던 매출이 작년에 2조원에 육박했어요. 영업이익도 2023년 1600억원을 넘겼고 작년에도 800억원에 달했어요.

하지만 무안공항 참사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올 1분기에 325억원의 적자를 냈고 2분기엔 적자폭이 더 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사람들이 제주항공 이용을 꺼리고 있어서 그렇죠. 텅텅 빈 항공기로 다닐 수는 없어서 가격을 내려 비행기표를 팔고는 있는데, 그나마도 승객을 채우기 어렵다고 해요. 참사 여파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해요.

여기에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 제주항공 같은 저비용 항공사 영업에 더 안 좋아요. 저비용 항공사의 주력 노선은 일본과 동남아인데요. 이렇게 더우면 이들 지역에 사람들이 덜 나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즘 일본과 동남아 노선에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특가 항공권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오사카나 도쿄 왕복 티켓이 10만원대에 나오기도 하죠. 이 탓에 제주항공뿐 아니라 티웨이항공이나 진에어 같은 저비용 항공사 상당수가 올 들어 적자를 내고 있어요.
◆캐시카우 애경케미칼도 수익성 뚝
유통 계열사인 AK플라자의 손실도 엄청나요.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2020년부터 매년 내리 적자를 내고 있거든요. AK플라자는 수원, 분당, 평택, 원주에 총 4개의 백화점을 운영 중이에요. 요즘 백화점 장사가 잘 안되고 있죠. 그나마 되는 곳은 명품 브랜드가 잔뜩 있거나, 규모가 엄청 크거나, 서울 핵심 지역에 있는 곳뿐인데요. AK플라자 백화점은 여기에 해당 사항이 하나도 없어요. AK플라자가 운영하는 쇼핑몰 7곳도 상황이 비슷해요. 오프라인 유통업이 추락하고 있어서 딱히 반등의 계기가 없어요.

애경케미칼은 이들 계열사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좋아요. 매출 규모가 조 단위로 크고 매년 수백억원의 이익도 내고 있어요. 하지만 업황이 크게 안 좋아지고 있어요. 2022년 한때 매출은 2조원을 넘겼고 영업이익은 1000억원에 육박했는데요. 이때를 정점으로 매출, 이익이 계속 감소하고 있어요. 작년엔 1조6000억원대의 매출을 내고도 이익이 150억원대 수준까지 쪼그라들었어요. 이익률이 1%에도 못 미쳤어요. 이익을 낸 게 다행일 정도죠. 화학 업황은 중국의 공격적인 증설과 수요 감소로 인해 앞으로 더 안 좋을 것이란 전망이 많아요.

가장 사정이 나은 계열사는 애경산업이죠. 매출은 6000억원대 수준에서 매년 조금씩 늘고 있고 영업이익률도 5~10%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 회사는 매출의 약 60%를 생활용품으로, 40%를 화장품으로 내고 있어요. 경기에 상관없이 꾸준하게 실적을 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강점이에요. 애경이 그룹을 살리기 위해 애경산업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죠. 다른 계열사들 업황은 쪼그라들거나 적자를 낼 만큼 수익성이 안 좋아 내놔도 제값 받고 팔기 힘들어요. 반면 애경산업은 캐시카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독을 들이는 곳이 많죠.

더구나 요즘 한국 화장품 산업은 전성기를 맞고 있어요. K뷰티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메가 트렌드가 되고 있어요. 애경산업이 이 트렌드에 올라 탈 수 있죠. 애경산업은 수십 년간 화장품 사업에서 업력을 쌓아 최근 새롭게 부상한 K뷰티 브랜드와는 달라요. ‘올드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만큼 충성고객도 많아요. 더구나 애경산업은 충남 청양에 기초와 색조화장품을 생산하는 공장까지 두고 있어요. 공장 없이 제조를 코스맥스나 한국콜마에 맡기는 대부분의 K뷰티와 차별화된 부분이죠.
◆참사 이후 회복 못한 선례도
애경이 그룹의 핵심이자 캐시카우인 애경산업까지 매물로 내놓은 것은 그룹 전체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라 볼 수 있어요. 매각 자금의 일부는 채무 상환에, 일부는 계열사 정상화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특히 무안공항 참사 이후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제주항공에 대한 자금 수혈이 시급해요. 제주항공은 코로나19 시기에도 3년간 약 2600억원의 자본을 AK홀딩스에서 수혈받아 간신히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참사 이후 다시 수백억원의 피해자 보상과 법적 대응 비용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제주항공의 회생은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저비용 항공 시장 내 과당 경쟁, 글로벌 경기 둔화, 환율·유가 변동성 등 외부 변수에 더해 참사로 인한 브랜드 이미지 훼손이 국내외 수요 회복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노르웨이 파트네어나 이집트 플래시에어라인처럼 항공 참사 이후 회복에 실패한 항공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포스트 장영신’ 체제의 리더십 과제도 남았어요. 올해 만 89세인 장 회장은 아직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장남 채형석 부회장이 이미 65세입니다. 이제는 ‘2세 승계’를 넘어 3세 분할 승계까지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세 형제가 이끄는 공동 경영 체제는 당장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자산을 나누고 계열사를 분할해야 하는 3세 승계 국면으로 접어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애경은 지금 ‘생존’이라는 단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생존이 가능하려면 참사의 상흔을 이겨내고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데요. 애경그룹의 역사와 유산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안재광 한국경제신문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