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의무 소각 담은 3차 상법 개정안 11월 처리 유력…기업들 비상
소각 규모 72조 달해..M&A·방어막 사라져 행동주의 펀드 공세 거세질 듯

최근 2500억원 상당의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LG / 한국경제신문
최근 2500억원 상당의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LG / 한국경제신문
정부가 추진 중인 3차 상법 개정안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을 오는 11월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소각 기한은 ‘즉시 소각’부터 ‘5년 유예’까지 다양하게 발의돼 있으나 ‘1년 내 소각’이 유력하다. 법이 시행되면 상장사들은 임직원 보상용 주식을 제외한 나머지 자사주를 모두 없애야 한다.

◆72조 강제 소각…대책 마련 분주한 상장사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발간한 ‘상장기업 자기주식 운용 실태와 제도 변화의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법 시행 후 국내 상장사들이 강제 소각해야 하는 자사주 규모는 72조원에 달한다. 국내 연구개발(R&D) 투자 상위 1000개 기업이 작년에 쓴 R&D 비용(83조6000억원)과 비슷한 규모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는 63조6000억원, 코스닥 상장사는 8조1000억원 규모다. 상반기 기준 전체 자사주(76조9000억원) 중 기업들이 주가 부양 목적으로 매년 자진 소각하는 물량(4조2000억원)과 임직원 보상용 보관 물량(1조원)을 제외한 나머지 주식이다. 소각 대상 자사주 규모는 상장사들이 보유한 전체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의 52.1%에 해당한다.

전체 상장사 중 자사주를 보유한 곳은 71.5%다. 기업 한 곳당 보유 자사주 비중은 전체 주식 대비 평균 4.5%다. 대형 상장사 위주인 유가증권시장은 이 비율이 2019년 5.4%에서 지난해 5.8%로 더 높아졌다.

자사주 보유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자사주 비중이 40%에 달하는 A 증권사는 최근 회계법인에 상법 개정안 통과 시 활용 방안에 대한 컨설팅을 의뢰했다. 이 회사는 높은 자사주 비중 덕분에 주주환원 정책 수혜주로 꼽히며 주가가 연초 대비 세 배 가까이 올랐다. 그러나 최대주주 지분율이 20%에 불과해 소각 이후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A사 대표는 “주주들의 환원 요구가 거세지만 경영권 위협이 커져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사주를 M&A에 활용하려던 B 제조업체도 비상이 걸렸다. 자사주 비중이 32%인 이 회사는 주가 방어와 유동성 확보를 위해 꾸준히 자사주를 사들여왔다. B사는 “주주가치 제고 차원에서 자사주를 적극적으로 매입해왔는데 소각이 강제되면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자사주 비중을 낮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들어 소각 5배 급증

혼란을 우려한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자사주 소각에 나서고 있다. 국내 상장사의 자사주 소각 금액은 작년 10조4986억원으로 집계됐다. 2019년 1조180억원에 불과했으나 5년 사이 10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소각 결정 건수는 같은 기간 23건에서 165건으로 7배로 늘어났다. 배당가능이익 내에서 취득한 뒤 이사회 결의로 소각한 사례만 집계한 결과다. 2019년부터 올해 6월 말까지 누적 소각 결정 건수는 총 561건, 소각 금액은 약 37조5053억원이었다.
자사주 소각은 올해 들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상장사들은 올해 1~6월 146건, 15조983억원어치에 달하는 주식을 소각했다. 반기 기준 사상 최대 규모다. 연간 소각 규모는 작년의 두 배인 2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증권가는 추정하고 있다. 자사주 소각 공시는 올 1~9월 221건으로 지난해 연간 공시 건수(184건)를 넘어섰다. 업종별로는 금융회사의 자사주 소각이 두드러졌다. 올해 상반기 전체 소각 건수의 17.1%, 소각 금액의 30.7%가 금융회사 주식이었다.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매각하거나 임직원에게 나눠주는 등 처분한 건수도 상반기 224건이었다. 처분 금액은 2조2721억원이다.

최근엔 LG그룹 지주사 (주)LG가 2500억원 상당 자사주 302만9580주(전체 발행 주식의 1.92%)의 소각을 결정했다.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하림지주는 자사주 1432억원어치(약 1474만 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교환사채(EB) 발행을 결정했다. 자사주 의무 소각을 포함한 상법 개정이 이뤄지면 EB 발행 등을 통한 유동화가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에 미리 움직였다는 게 증권업계 시각이다. 지난 7월에는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하이비젼시스템과 세방이 45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맞교환했다. 자사주 일부를 활용해 우호 주주(백기사)를 확보한 것이다.
'보물'에서 '짐' 된 자사주…72조 소각 카운트다운 [전예진의 마켓 인사이트]
'보물'에서 '짐' 된 자사주…72조 소각 카운트다운 [전예진의 마켓 인사이트]
◆“주가 부양” vs “기업 경쟁력 악화”

증권가에선 자사주 의무 소각이 중단기적으로 증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자사주를 없애면 자본금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식 수만 감소하기 때문에 수급이 개선된다. 기업의 주당순이익(EPF)과 주당순자산가치(PBS)가 올라가는 효과도 생긴다. 증권업계는 “국내 증시의 대내외 신뢰도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며 대체로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최우식 브라이트자산운용 대표는 “미국은 이익의 80% 정도를 자사주 소각과 배당에 쓰지만 우리는 40% 수준에 그쳤다”며 “이번 개정안은 ‘국내 기업이 마침내 주주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인식을 글로벌 투자자에게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기업의 장기 성장성을 위축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주주가치를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배당 여력이 약화하고 불확실한 투자 환경에서 신속한 자금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사주를 통한 주가 안정이나 지배구조 안정 수단이 사라지면 기업의 투자 매력도 낮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기업들은 자사주를 인수합병(M&A)용 지분 교환에 활용하거나 이를 기초자산으로 EB를 발행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경영에 활용해왔다. 중장기적인 투자 재원으로도 활용돼 왔다. 이를 한꺼번에 소각하면 기업의 투자와 경영활동 전반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강제 소각 규모 72조원은 지난해 국내 1000대 기업의 R&D 투자액(83조6000억원)의 약 90%에 육박하는 수치다.

상장사들의 경영권 방어에도 균열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우호 세력에 넘기면 의결권이 살아난다. 기업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헤지펀드들은 이 점을 활용해 국내 기업을 공격할 때 자사주 소각을 요구해왔다. 법이 시행되면 국내 상장사들은 유일한 방어 수단이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행동주의 펀드들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스틱인베스트먼트가 대표적 사례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미리캐피털과 얼라인파트너스는 소액주주들과 연대해 스틱에 13.5%에 달하는 자사주 소각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의 지분율은 19.3%로 도용환 스틱 회장과 특수관계인 지분율(19%)을 앞선다. 자사주가 소각되면 경영권 방어가 사실상 어려워진다.

법이 시행돼 자사주가 소각되면 국내 상장사들을 향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최대주주 우호 지분이 30% 미만인 상장사가 현재 571개사지만 자사주를 소각하면 707개사로 늘어날 것으로 분석했다.



전예진 한국경제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