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 역시 일본 남부 규슈의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회로선폭 3나노 미세 공정을 도입한 제2공장을 건설 중이다. 2021년 10월 처음 구마모토 투자 계획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22~28나노 수준의 구형 공정을 검토했으나 최근 시장 변화에 맞춰 삼성전자와 초미세 공정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최첨단 단계인 3나노 공정으로 설계를 격상했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이자 중동의 기술 강국인 이스라엘도 일본 투자를 강화한다. 7월 14일 로이터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칩 제조사인 타워세미컨덕터는 일본 정부로부터 10억달러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총 30억달러(약 4조1500억원)를 일본에 투자하기로 발표했다.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실리콘 포토닉스(광반도체)’와 고성능 ‘실리콘-게르마늄(SiGe)’ 생산 라인을 일본 아라이 시설에 구축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는 2014년 파나소닉의 몰락한 반도체 공장을 인수하며 일본에 뿌리를 내렸는데 일본 정부의 막강한 자금력을 업고 범용 제품이나 찍던 구형 공장을 ‘AI 광반도체’를 다루는 최고급 전초기지로 완전히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일본의 원천 기술과 손잡는 협력 사례도 등장했다. 파운드리 재건을 추진 중인 미국의 인텔은 지난 6월 5일 일본의 IT·인프라 대기업 히타치와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 양사는 반도체 제조 장비, 공장 자동화 등 5개 분야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핵심은 히타치의 정밀 측정·검사 장비 데이터와 프로세스 최적화 노하우를 인텔 파운드리에 통합하는 것이다. TSMC·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혀야 하는 인텔이 던진 일종의 ‘승부수’인 셈이다. 과거 영광이 남긴 독점적 소부장글로벌 거인들이 일본을 파트너로 낙점한 결정적 배후엔 일본 반도체가 40년간 칼을 갈며 다져온 대체 불가능한 ‘기초 체력’이 있다. 전 세계 반도체 생태계의 목줄을 쥐고 있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의 압도적 지배력이다.
원래 일본 반도체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절대강자였다. 하지만 미국의 견제와 내부적인 전략 실패가 겹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86년 미국은 덤핑 혐의를 씌워 일본산 반도체에 보복 관세를 부과했고(미·일 반도체 협정), 플라자 협정을 강제해 일본의 가격 경쟁력을 단숨에 약화시켰다. 여기에 일본 기업 특유의 경직성도 화를 키웠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보급되며 싸고 가벼운 D램이 주류로 떠오르던 시기에도 일본 제조업체들은 대형 컴퓨터용 고성능 D램에만 집착하다 시대의 흐름을 놓쳤다. 그 결과 2012년 D램의 자존심 엘피다가 파산했고 2017년에는 도시바마저 재정난 끝에 메모리 사업부를 분사해야 했다.
완제품 제조 왕좌는 그렇게 한국과 대만에 완전히 넘어갔다. 하지만 일본이 성문(완제품)을 내주는 동안 빼앗기지 않은 무기가 있었다. 바로 대장간의 핵심 도구인 ‘소부장’이다.
단적인 예가 반도체 공장의 필수 요소인 ‘물’이다. 반도체 미세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칩 표면의 이물질을 씻어내는 세정 공정은 기하급수적으로 중요해진다. 이때 사용되는 초순수는 분자 수준까지 불순물을 극단적으로 제거한 초정밀 용수다. 오르가노(ORGANO), 구리타공업, 노무라마이크로사이언스 등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한 일본 기업들이 전 세계 반도체 팹(Fab)에 들어가는 초순수 장비 공급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SK실트론을 필두로 국산화가 진행중이지만 아직까지는 대만과 한국 모두 일본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나머지 반도체 8대 공정들을 뜯어봐도 일본 소부장의 지배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다. 반도체의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 시장은 신에쓰화학과 섬코(SUMCO)가 전 세계 공급량의 60%를 장악하고 있다. 빛으로 미세한 회로를 그릴 때 쓰는 핵심 화학 물질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는 JSR과 도쿄오카공업 등이 글로벌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 중이다. 차세대 극자외선(EUV) 공정용 제품은 일본산이 없으면 라인 가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회로를 깎아내는 식각 공정용 초고순도 불화수소 역시 스텔라케미파와 모리타화학 등이 글로벌 초고순도(12N) 시장의 70%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
장비 영역 역시 장벽이 높다. 웨이퍼에 금속 가스를 입히는 화학기상증착(CVD) 장비 시장은 도쿄일렉트론이 미국 기업들과 함께 글로벌 ‘빅3’ 체제를 구축하며 시장의 80%를 지배한다. 칩의 불량 여부를 최종 판별하는 테스터 시장은 일본 어드밴테스트가 미국의 테라다인과 함께 전 세계의 90% 이상을 과점하고 있으며 웨이퍼를 정밀하게 이동시키는 프로버 장비 역시 도쿄일렉트론과 아크레텍이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최근 HBM(고대역폭메모리) 광풍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후공정(패키징)으로 가면 일본의 존재감은 더욱 압도적이다. 머리카락보다 얇은 칩을 미세한 균열 없이 잘라내는 다이싱 장비는 일본 디스코가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고사양 반도체를 탑재하는 FC-BGA 기판 시장 역시 이비덴과 신코덴키가 글로벌 점유율 70% 이상을 선점하고 있다.
결국 대만의 TSMC도 미국의 마이크론도 일본 소부장 생태계의 턱밑에 둥지를 틀어야만 가장 빠르고 안정적으로 첨단 칩을 생산할 수 있다는 계산기를 두드린 셈이다.
행정 지원도 파격적이다. TSMC의 투자 당시 보통 10년 넘게 걸리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착공 22개월 만인 2024년 2월에 준공시키는 전무후무한 속도전을 완수했다. 일본 정부가 TSMC 1·2공장에 투입하는 보조금 규모만 총투자액의 3분의 1 수준인 1조2000억엔(약 11조4000억원)에 달한다.
일본의 과감한 결정 배후엔 뼈아픈 안보적 각성이 자리 잡고 있다. 2019년 5월 미국이 화웨이에 대규모 제재를 가하고 중국과 대만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경제산업성 내부에서는 ‘일본이 반도체 접근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됐다. 반도체 소부장에선 세계 정상급 경쟁력을 쥐고 있지만 첨단 팹을 돌릴 자국 대기업 씨가 마른 상황에서 일본이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국경을 불문한 거인 유치’였다.
해외 거인들을 불러들여 안보의 급한 불을 끈 일본의 시선은 이제 반도체 자급체제의 최종 진화 형태인 자국 국책 기업 ‘라피더스(Rapidus)’로 향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오는 2041년 3월까지 반도체와 AI 분야에 총 101조6000억엔 규모의 민간·공공 투자를 추진하는 메가톤급 로드맵을 발표하며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메가 로드맵의 최전선에 선 라피더스는 도요타, 소니, NTT, NEC, 소프트뱅크, 덴소, 키오시아 등 일본을 대표하는 8개 주요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을 한데 모아 2022년 8월 출범했다. 과거의 영광을 ‘첨단 로직 칩 제조’로 되찾겠다는 일본 정부의 야심작이다. 현재 일본의 자체 로직 반도체 공정 기술은 40나노미터(nm) 수준에 멈춰 있지만 라피더스는 올해 말 2나노 시험 생산을 시작해 내년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한 뒤 2027년까지 완벽한 2나노 공정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파격적인 타임라인을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최근 라피더스의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이 “양산 체제가 갖춰지면 TSMC보다 같거나 낮은 가격(웨이퍼당 300만~350만엔)으로 책정하겠다”며 정부 보조금(2조3540억엔)을 등에 업은 파격적인 정면 승부를 선언해 글로벌 시장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국가 프로젝트인 라피더스도 성공을 장담하긴 어렵다. 초기 안정적인 수율 검증이 만만치 않은 데다 정작 일본 국내에는 이 초첨단 2나노 칩을 대량으로 소화해 줄 빅테크나 전방 산업 기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결국 라피더스가 만든 칩은 전량 미국 시장으로 수출될 수밖에 없어 자칫 미국 공급망의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구조적 한계도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부활하는 일본을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결정적인 리스크가 있다. 라피더스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 반도체가 가진 두 가지 강력한 무기가 한국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미·중 신냉전이 안겨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프리미엄이다. 대만이 안보를 크게 의존하는 미국, 그리고 그 미국의 핵심 우방인 일본이 결성한 끈끈한 ‘미·일·대만 3각 반도체 동맹’은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과거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졌던 일본이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두터운 경제안보 동맹이자 AI 시대의 핵심 파트너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더 위협적인 두 번째 리스크는 메모리 미세화 한계가 불러올 ‘소재 권력의 역습’이다. 현재 D램 시장은 한국 기업들이 고가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도입해 회로를 가늘게 그리는 미세화 기술로 왕좌를 지켜왔다. 하지만 D램이 10나노 이하의 물리적 임계점에 봉착하면 상황이 180도 반전된다. 기존 2D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칩 내부의 셀을 수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3D D램’으로의 패러다임 대전환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SK하이닉스 역시 10나노급 이하 공정부터 3D D램과 새로운 소재 도입을 공식화했다.
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차세대 적층 시대의 판도를 가를 핵심 열쇠가 바로 극도로 까다로운 ‘소재 혁신’에 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회로선폭을 줄이는 기존 미세 집적화 방식은 물리적 한계가 다가오는 만큼 3D D램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면 EUV 장비로 쌓은 미세공정 기술이 의미가 없어지고 D램 시장의 판이 완전히 뒤집힐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경쟁에서 글로벌 반도체 원천 소재 시장과 특허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소부장 기업들의 ‘소재 DNA’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거인들의 대장간 역할을 자처하며 15년 만에 초거대 투자 사이클을 맞이한 일본의 부활을 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전병서 소장은 “일본은 소부장 강국의 지위를 레버리지 삼아 미·일·대만 반도체 삼각 동맹의 핵심 노드로 자신을 재정립하고 있다”며 “한국이 이 구도에서 소외될 경우 반도체 지정학적 고립 리스크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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