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강순열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미술작품을 읽어 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시각적인 조형 요소로 시작해 그 이면에 담긴 특정적 메시지나 작가적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이 작용한다. 강순열 작품의 경우 표면적 특징은 동서양 회화의 조형적 양식이 융합한 ‘텍스트 회화 형식’으로 출발한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크게 동양의 정신성과 가족애 같은 개인의 주관적 관념이 양축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보통 ‘수행(修行)’이란 개념으로 강순열 작가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단어에 내포된 사전적 의미는 ‘행실이나 학문 혹은 기예 등을 닦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론 ‘생리적 욕구를 금하고 정신과 육체를 훈련함으로써 정신의 정화나 신적(神的) 존재와의 합일을 얻으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로 여겨진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금욕주의를 뜻하는 ‘asceticism’나, 엄하게 금욕생활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practice asceticism’ 등에 비유할 만하다. 그만큼 강순열의 단순 반복적인 조형 어법엔 ‘동양이든 서양이든 공감할 수 있는 강렬한 공통분모를 가졌다’는 면은 큰 경쟁력이 아닐 수 없다.
강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작품 제목으로 더욱 명료하게 제시된다. 정신성은 명상이나 수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되, 근간에 ‘어머니(엄마)’나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들어 약 4~5년 이전까지는 ‘사랑[sarang]:love, 마음[maum]:heart/mind, LOVE’ 등 한글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직접 드러내는 제목을 많이 사용했다. 최근의 다른 작품들도 제작 방식은 거의 같다. 흔히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처럼 일정한 규칙을 가진 글씨가 아닌, 불규칙한 조형성이 특징인 손글씨를 선호한다. 손글씨는 선의 움직임과 형태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직감적인 표현이 우선돼 자신의 감성을 개성 있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데 아주 용이하게 쓰인다.
강 작가에게 이러한 손글씨는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작 그의 손글씨는 타이포그래피 못지않게 굉장한 절제미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모가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같은 방식의 또 다른 작품들에 사용된 제목 ‘In Between’, ‘Deconstruction’, ‘Reconstruction’ 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말 그대로 ‘In Between’은 ‘어느 쪽이라고도 할 수 없는 중간에 낀 틈새’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아시아인(특히 한국인)으로 오랜 세월 유럽(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주된 화두일 수 있겠고, 자신의 작품에 드러난 혼합된 동서양 조형 어법의 특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제작 과정이 곧 수행, 명상의 기회
강 작가의 작업 방식은 정자(正字)로 쓴 글씨의 해체 과정을 통해 ‘텍스트 이면의 모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것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과 연결되는데, 어떤 ‘문자적 의미’나 ‘규범적 진리’와의 관계를 해체와 복원 과정으로 설명하려는 작가적 의지와 맞닿아 있다. 특히 ‘Reconstruction’이라는 단어엔 ‘복원이나, 재건축 혹은 재건, 재구성’이란 뜻도 있다. 재연이라 해도 ‘모든 세부적인 사실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역시 작품의 제작 과정을 통해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해체와 복원의 반복적인 행위로 완성해 가는 작품 방식은 완결점보다 그 과정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과정이 곧 수행이고,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명상의 기회가 작품의 의미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의 작품 제목에 ‘mindfulness’란 말이 등장한다. 번역하면 ‘마음 챙김’이나 ‘명상’이기도 하다. 마음을 챙긴다는 행위는 전통적인 불교 수행 과정에서 온 심리학적 구성 개념이다. 또한 ‘현재 벌어지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여 자각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마음 챙김’은 현재의 순간순간을 알아차리고, 연속적인 지각의 순간들에서 우리 내면에 실제로 일어나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강 작가는 작품으로 그 ‘과정의 힘’을 시각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때론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단어를 관람자가 반복적으로 읽도록 유도해 뇌파를 자극함과 동시에 잠들었던 감성의 수면에 파동을 일으킨다.
‘엄 마 엄 마 엄 마 엄 마 엄 마 엄 마….’ 마치 귓전에 맴돌듯 잉크로 쓴 손글씨 한글 ‘엄마’가 반복적으로 화면 가득 붙여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손글씨로 ‘엄마’를 쓴 다음, 그 한글 텍스트를 ‘엄’자와 ‘마’자로 따로따로 잘라서 원형 화면에 따라 나란히 붙인 것이다. 강 작가는 이 작품에 <무한한 사랑(Endless Love)>이란 제목을 붙였다. 한지의 손글씨를 지름이 약 1m인 원형 화면에 콜라주한 것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엄마’라는 단어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내포돼 있다. 강 작가 역시 작품을 통해 ‘엄마’라고 쓰고, ‘무한한 사랑’으로 읽도록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 작가의 최근 콜라주 작품들의 출발은 20여 년 전의 작품들과 맞닿아 있다. 가령 2000년
“사랑, 마음, 엄마…. 텍스트(text)로 쓰인 단어들은 개인적인 인생의 화두이자, 우리 모두의 성찰을 권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에 대한 상징적 성찰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서 현대 문명의 편리한 기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적인 ‘느림의 미학’을 생각해 보자고 권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이기도 합니다. 외국인 관람자들이 한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기호의 의미로써 상징적 원형은 통하기 때문입니다.” 강 작가의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소확행(小確幸)’이 대세다. 뜻은 그저 ‘일상에서의 작지만 진정한 행복’을 말하는 것으로 간단하다. 덴마크의 ‘휘게(hygge)’나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 calme)’과 맞닿아 있다. 우연성이 포함된 강 작가의 ‘과정예술(process art)’ 역시 ‘소확행의 실천미학’이란 생각이 든다. 느릿느릿한 작업 과정 자체가 곧 감성의 치유이며, 명상적인 삶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새로움에 대해 절실히 갈망하기보다는 익숙함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삶의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손글씨 콜라주 작품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말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의 좋은 표상은 아닐까. 강 작가 작품의 ‘50×50×2cm’ 크기 전시 가격은 약 900만 원 정도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 대표는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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