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문학과 문화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그렇다면 왜 지금 우리들의 거울 속엔 디스토피아상 콘텐츠가 끊임없이 담길까.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디스토피아 코드를 따라가 보자.

지난해 이맘때, 아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 지구에 닥칠 위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최근 우리가 겪었던 상황은 단순한 예측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의 것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1986년 자신의 저서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가 겪게 될 다양한 영역에서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인류가 태동한 이래 지진이나 홍수 등 자연이 초래하는 여러 위험은 늘 존재해 왔지만, 과학기술적 진보를 겪고 난 이후에 발생하는 위험은 지구 전체에 보편적인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벡의 ‘위험사회’론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변해 버린 우리의 현실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초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게 될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고, 그중 상당 부분은 우리의 염원과 다르게 현실화됐다. 비단 디스토피아의 유형과 의미에 대해 경고하는 집단이 학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대중문화계는 학계보다 훨씬 폭넓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삶 위에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을 펼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역주행하는 디스토피아 콘텐츠

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크게 각광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단위의 전염병과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를 다룬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시 읽기 열풍을 일으켰다. 지난 3월 말을 기준으로 국내에서 <페스트>는 약 1만8000부가 판매됐고, 코로나19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페스트>가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고 한다.

예전에 개봉했지만, 코로나19와 유사한 소재를 다루어 새롭게 관심을 끈 콘텐츠도 있다. 전염병과의 사투를 그린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아웃브레이크(Outbreak)>, 2011년에 개봉한 <컨테이젼(Contagion)>, 2013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감기>가 그 예다.

코로나19 사태 전후로 웹 서비스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된 픽션과 논픽션 영상 콘텐츠도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제공된 <판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 <킹덤>, 왓챠플레이가 제공한 HBO의 <체르노빌>, BBC의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는 직접적으로 전염병 사태를 다루거나, 암울한 현대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점 때문에 이목을 끌었다.

디스토피아 콘텐츠의 시대적 변화
예전에 발표됐던 디스토피아 콘텐츠가 소위 ‘역주행’하는 현상은 문득 과거의 사람들이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했던 맥락과 오늘날 우리가 이를 소비하는 맥락 간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묻게 만든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몇 가지 차이만 살펴보자면 이렇다.
우선 과거의 디스토피아 콘텐츠가 만들어진 배경이 오늘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지금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졌던 시대에 그려진 디스토피아는 그로 인해 공포심을 조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소비하는 대중의 관점에서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어쩌면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로 이런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계몽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앞서 언급한 <페스트> 또한 발표 당시 유토피아적 세계관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자 풍자로 받아들여졌음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지금의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계몽적 효과를 직접적으로 노리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 가정하고,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대한 그럴싸한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종합해 이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정도의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대중에게 일종의 시뮬레이션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디스토피아, 사회적 인식의 거울
한편 과거와는 다른 맥락에서 소비되고 있는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디스토피아 콘텐츠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이 오늘날의 현실 세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인식이 디스토피아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는 물론,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현실 반영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셈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의 이유도 존재할 수 있다.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살아남았다’라는 안도감을 갖게 될 수 있다. 디스토피아 콘텐츠에도 서사의 처음과 끝이 존재하듯 현실적으로 비치는 어떤 상황도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끝을 콘텐츠로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우리는 결과적으로 디스토피아의 생존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디스토피아 콘텐츠 소비를 통한 거울 효과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그를 통해 앞으로의 위험을 인지하고 적절하게 대비하도록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하는 한국 사회적 맥락을 조금 더 부각할 때, 다음의 2가지 배경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현실의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전 지구화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부분이 디스토피아 콘텐츠 안 상황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 다른 배경으로 정서적 평등주의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겪어 왔고, 앞으로도 계층 간 양극화가 심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염병과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사회 계층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순간적이긴 하지만,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안 정서적 평등주의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구상에서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도 어떤 방향성이 생겨날지 모른다.

디스토피아 콘텐츠의 미래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이전보다 더 많이, 더 빈번하게 등장할 것이다. 디스토피아라는 ‘판도라의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지만, 이 같은 예측 가능성 때문에 디스토피아는 우리의 현실과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동시에 디스토피아적 상상 안에서 보다 많은 가설과 음모론, 대안 세계가 그려질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회자되는 수많은 ‘대안적 진실’과 ‘페이크 뉴스’가 디스토피아에 대한 핍진성(逼眞性)을 높이고 있는 덕분이다.

이와 같은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소비하는 측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은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접한 덕분에 ‘디스토피아’라는 어떤 현실에의 가정에 무감각해졌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디스토피아적 서사 때문에 자포자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반응에 대한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역설적으로 비치지만,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접한 이후 일정한 학습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향후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잠재의식 속에서 해결책을 끌어 낼 수 있다.

절망적인 환경을 헤치고 나갈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과 같은 회복탄력성도 키워진다. 또한 역사의 순환성이나 인류의 본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평온한 시대였다면 절대 생각해 보지 않았을 문제들을 곱씹으며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우리에게 ‘21세기적 생존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하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