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물길 따라  ‘봄꽃’ 에 취하다

[한경 머니 기고=글·사진 양보라 여행전문기자] 삽상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섬진강 물길 따라 무작정 걷고 볼 일이다. 봉우리를 열어젖히기 시작한 봄꽃이 흐드러지고, 맛이 차오르기 시작한 봄 먹거리가 풍성해진다. 섬진강의 봄은 향긋하고 구수하다.


섬진강은 지리산을 굽어 흐르다 남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긴 강이다. 길이가 212㎞에 달하고 전북 남원·정읍·임실·순창·진안·장수, 전남 곡성·광양·구례, 경남 하동·남해 등 3개 도(道) 12개 시군을 지난다. 아기자기한 마을 곁을 훑는 섬진강은 고요하고 고고하게 흐른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섬진강을 품은 벽촌은 자못 소란스러워진다. 누구보다 빨리 봄을 맞으려 남하한 상춘객으로 가득해서다. 섬진강이 뭇사람의 여행욕에 불을 댕기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꽃’이다.

섬진강 물길 따라  ‘봄꽃’ 에 취하다

섬진강에 눈이 폈다
꽃은 우리나라 여행 산업의 가장 강력한 콘텐츠다. 해마다 봄이 되면 여행객들은 계절을 화려하게 수놓는 꽃을 좇아 섬진강으로 한달음에 달려온다. 거주 인구 15만4000명에 불과한 전남 광양에는 3월 한 달간 120만 명의 여행객이 찾아온다. 산기슭을 가득 메운 매화꽃을 보기 위해서다. 한가로운 벽촌에 서울 시내 금요일 오후를 방불케 하는 교통 체증이 벌어지곤 한다.


봄이 떠들썩하게 내려앉는 곳은 다압면 청매실농원이다. 청매실농원의 매화는 3월 초 꽃망울을 틔운다. 19만8347㎡에 달하는 너른 땅에 10만 그루가 넘는 매화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청매실농원은 섬진강이 자랑하는 농장이자 정원이다. 3월 한 달간 청매실농원은 눈송이처럼 피어난 매화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청매실농원을 일구고 가꾼 이는 1997년 농림수산부로부터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된 홍쌍리 여사다. 홍 여사는 법정 스님의 조언을 얻어 농원을 꾸렸다. 매화 언덕 중간 즈음 초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임권택 감독은 영화 <취화선>을 찍었다. 멀찌감치 흐드러진 매화와 어우러진 매화농원을 바라보면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빨려들 것 같다.


농장은 천천히 둘러보는 데 20분이면 족하다. 하지만 매화가 내뿜는 달콤한 향에 취해 있다 보면 몇 시간이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올해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생겼다.
3월 6일부터 일주일간 예정돼 있던 광양매화축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전격 취소됐다. 임시 주차장 등 광양시 측이 제공했던 여행객 편의가 불투명해졌다. 그래도 꽃은 핀다. 매화농원은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아름다우니 섬진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거닐며 유유자적하게 봄꽃을 감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허리를 숙이고 걷는다
지리산을 품은 전남 구례도 이름난 꽃 여행지다.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강변과 마을 어귀마다 꽃으로 노랗게 물든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산수유의 70%에 해당하는 약 200만 그루의 산수유가 일제히 노란 꽃을 피우는 덕분이다. 하지만 ‘꽃동네’ 구례 사람에게 봄을 알리는 꽃은 따로 있다. 바로 ‘야생화’다. 누구는 들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우리 꽃이라고도 부르는 작고 소박한 꽃이다.


구례 사람이 야생화로 계절을 체감하는 이유가 있다. 겨울 끝자락에 구례 사람은 한 해 농사를 준비하고자 땅을 재정비합니다. 정수리 위 꽃나무가 꽃을 맺었는지 맺지 않았는지 눈치를 챌 틈 없이 땅을 갈다가 논두렁, 밭두렁, 길섶에 핀 야생화를 보곤 봄을 실감한다. 수백 송이가 무리지어 흐드러지게 핀다든지, 강력한 향기를 퍼트린다든지 하는 화려한 맛은 없지만 봄 야생화는 농부 곁을 지켜온 친근한 꽃이다.


야생화 탐방에 <색향미 야생화는 사랑입니다>의 저자 정연권 전 구례군농업기술센터 소장이 동행했다. 정 소장이 야생화 탐방지라고 데리고 간 곳은 구례 서부 유곡마을, 그것도 감나무, 매화나무를 가꾸고 있는 섬진강변의 과수원이었다. 야생화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섬진강 물길 따라  ‘봄꽃’ 에 취하다
“옛 농부들은 ‘지심(잡초) 베기 징글징글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제초제를 사용하면서 농부는 ‘노동 해방’을 이뤘을지도 모르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야생화까지 죽이고 말았죠. 반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밭을 잘 살펴보면 야생화가 눈에 띄어요. 꽃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어요.”


농약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다는 과수원은 꽃 천지였다. 과수원 이곳저곳에 새끼손톱만 한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별꽃’이었다. 오각형 모양의 꽃받침이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꽃이라 부른단다. 꽃받침 위에 얹힌 하얀 꽃잎은 하트(♡) 모양 같았다. 정 소장은 별과 사랑을 한 데 품고 있는 이 로맨틱한 꽃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별명을 달아 줬다.


구례의 봄 색깔은 샛노랑이다. 산등성이마다 개울가마다 자리 잡은 산수유가 노란 꽃을 활짝 틔우는 까닭이다. 산수유는 3월 초순 꽃망울을 여는데, 3월 중순이 되면 꽃망울 안에 숨어 있던 작은 꽃봉오리가 다시 개화한다. 구례의 봄이 깊어질수록 색이 짙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섬진강 물길 따라  ‘봄꽃’ 에 취하다
골목을 따라가다 산수유마을 꼭대기에 다다르면 그곳이 상위마을이다. 상위마을은 산수유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사진작가가 봄마다 집결하는 장소다. 상곡마을에서는 제비꽃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제비꽃은 북적북적한 인파를 슬쩍 피해 이끼 낀 바위틈에 자라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보랏빛 제비꽃이 아니라 연분홍색 제비꽃으로 정식 명칭은 ‘민둥뫼제비꽃’이다. 나무에 달린 산수유꽃은 정수리 위에 있어 쉽게 눈을 맞출 수 있는데, 민둥뫼제비꽃을 자세히 보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 작은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야생화로부터 배운다.


꽃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천년고찰 화엄사도 지나치지 말아야 할 곳이다. 봄이 한창일 때는 넓은 주차장이 꽉 찬다. 화엄사 매표소에서 300m 떨어진 지리산국립공원 남부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가는 게 오히려 좋다. 화엄사는 그 정도로 상춘객에게 사랑을 받는 절이다.


절의 위엄도 한몫을 하겠지만 이토록 화엄사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하나, 꽃이다. 화엄사의 스타 꽃을 만나려면 국보 6호인 각황전으로 향해야 한다.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이다. 각황전 앞 석등은 높이 6.4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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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불전 앞을 수령 300살의 홍매화가 지키고 있다. 희고 뽀얀 매화은 눈에 익지만 시뻘겋고 강렬한 홍매화는 생경하기만 하다. 화엄사 홍매화는 유독 색이 검붉어서 흑매화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꽃망울이 터지기도 전에 전국 각지에서 홍매화를 구경하겠다고 몰려와 매화나무 주변을 서성인다. 그렇다고 홍매화가 급한 마음을 알아 줄 턱이 없다. 보통 3월 하순께 홍매화가 만개한다고 하니, 올해는 그 자태를 만날 수 있길 고대할 뿐이다.


섬진강의 봄맛
섬진강 하류는 치열한 수(水) 싸움의 장이다. 남해 바다가 강어귀를 거슬러 올라치면, 지리산을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바닷물을 하구로 몰아붙인다. 짠물과 민물의 밀고 당기기가 반복되는 섬진강에 손톱만 한 조개 ‘재첩’이 자란다. 봄이 다가오면 겨우내 강바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재첩이 얕은 모래톱으로 거처를 옮긴다. 강마을 사람이 재첩잡이에 나서는 시기도 이맘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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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첩은 민물조개다. 지리산 남녘에서는 강에 나는 조개라 해 ‘갱(강)조개’라 부른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기수(汽水) 어디서든 재첩이 났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섬진강에서 국내 재첩의 90%가 잡힌다. 섬진강만큼 자연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강이 적기 때문이다. 해서 재첩은 섬진강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랑거리다. 섬진강이 지나는 12개 시군 중에서 경남 하동이 특히 그렇다. 1월 하순에 만난 최대성 하동군청 계장은 “재첩은 섬진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라고 운을 뗐다.


“남해 바다가 섬진강 강줄기에 재첩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을 실어 나릅니다. 섬진강의 너른 모래밭은 재첩의 산란장 역할을 하고요. 재첩은 하동의 청정함이 깃든 먹거리입니다.”
재첩 수확기를 맞으면 조용했던 강 마을은 이내 활기를 띤다. 재첩잡이를 업으로 삼는 어민도, 찬거리를 마련하려는 아낙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섬진강으로 향한다.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면 재첩잡이에 나선 어민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어부들은 대나무 끝에 부챗살 모양의 쇠갈퀴가 달린 일명 ‘거랭이’를 들고 강바닥을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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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는 853개 식당 중에서 138개 식당이 재첩을 다룬다. 하동읍 재첩특화마을에 식당 5곳이 어깨를 잇대고 있는데, 재첩국, 재첩회, 재첩전 등 다양한 재첩 요리를 코스로 낸다. 재첩특화마을에서 만난 해성식당 정현숙 사장도 봄 재첩을 손질하기 바빴다. 가마솥에 재첩과 물을 1대1 비율로 맞춰 넣고 한소끔 끓였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뽀얗고 푸르스름한 국물이 우러나왔다.


“봄 재첩을 냉동해서 여름에도 써요. 여름 산란기에는 봄 재첩처럼 진한 국물이 나오지 않거든요.”
삶은 재첩 살만 따로 모아 초장에 찍어 먹는 재첩회무침, 재첩 살을 가득 넣고 부친 재첩전의 맛은 호화로웠다. 그러나 역시 백미는 재첩을 우린 국물이었다. 정 사장은 부추를 너푼너푼 썰어 넣은 재첩국을 쭉 들이키라 권했다. 하동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맛보고, 술안주로 먹고, 이튿날 해장국으로 또 삼킨다는 그 국물은 풋풋했다. 담담한 국물에 섬진강의 봄이, 하동의 추억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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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8호(2020년 0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