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달빛, 캔버스에 목탄, 227×910cm, 2016년, 작가 소장
매화-달빛, 캔버스에 목탄, 227×910cm, 2016년, 작가 소장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이재삼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한 사내가 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끝 모를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물안개와 마주 섰다. 그에게 안개는 유일한 빛이다. 검은 밤을 읽고, 영면(永眠)에서 깨울 열쇠다. 이재삼 작가의 그림은 현(玄)의 미학이다.


나와 마주 서 본 적이 있는가. 누구도 어떤 소리조차 없이 온전하게 내면의 나를 응시해 보았는가. 그 대면의 경험은 스스로 껍질을 벗고 진피(眞皮)를 얻는 수행의 과정이다. 이재삼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주로 억겁의 세월을 품고 있는 대상들이다. 폭포와 안개, 노목(老木)이나 바위 등이 달빛 샤워로 제 색을 드러낸다. 느릿하고 농밀한 어둠의 향연에 절로 탄성을 불러낸다.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아닌, 오로지 순수하고 절실한 작가주의 열정만이 가득하다.


실제로 그의 웬만한 작품은 매일 출퇴근 하듯 10시간 넘게 최소 5~6개월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다. 평소 작가로서의 자세에 대해 “연애하듯 격정적이기보다는 결혼생활을 하듯 조금은 이성적인 패턴으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 작가의 말이 더욱 실감이 난다. 어차피 그림 그리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달빛, 캔버스에 목탄, 454×182cm, 2013년
달빛, 캔버스에 목탄, 454×182cm, 2013년
우리는 평소 빛으로 세상을 본다. 그림은 그 보이는 것을 독창적으로 표현해 내는 화가의 재량이다. 그림의 색(色)도 빛이다. 그래서 그림에 대부분 빛이 풍성한 낮의 정경이 많이 등장한다. 아마도 이 세상 그림의 99%는 낮 풍경이거나 낮과 같은 빛(색)을 좇을 것이다. 이 작가는 나머지 1%의 어둠을 선택한 밤의 화가다. 그에게 밤은 태양이 잠든 검은 세상이 아니다. 한낮의 태양빛이 산화(散花)돼 그 온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또 다른 낮이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재료인 목탄 속에도 한 나무가 살아온 생애의 진기(眞氣)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의 목탄은 제 몸을 부스러뜨려 작품의 살과 뼈가 되고, 숭고한 나무와 숲을 환생시킨다.


“화가들은 대부분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지요. 햇빛의 시각적인 명료함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달빛은 눈으로 보는 것만 아닌 육감을 품고 느껴야만 보이는 감성의 빛입니다. 제 작품에서는 나무를 태운 검은 물질인 목탄이라는 재료가 보이지 않는 밤의 빛으로 채색되면서 달빛으로 태어납니다. 단순한 형태의 묘사가 아닌 달빛이 드리워진 볼륨의 표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풍경화(風景畵)이기보다는 빛을 그리는 풍광화(風光畵)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풍광화(風光畵)라는 말에 일리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재삼의 그림은 온통 검은 바탕에서 스멀스멀 대상들이 깨어난다. 영락없이 그믐 달빛에 비친 흐릿한 밤의 풍광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매화 그림은 아주 특별하다. 단지 가닥들을 헤아릴 수 없는 정교함과 세밀함의 묘사력 때문만은 아니다. 보통 매화 그림은 활짝 핀 꽃송이들을 선호하겠지만, 이 작가는 그 반대다. 오히려 피기 직전이나 이제 갓 봉우리를 트기 시작한 모습들이다. 그 수많은 봉우리들은 그대로 밤하늘의 별 밭을 이루고, 아주 특별한 별빛의 향연은 그대로 밤의 교향곡을 선사한다. 어쩌면 그는 달빛을 핑계로 그만의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음악을 즐긴다.


“한때 독일 음반회사 ECM의 레이블을 주로 들었었습니다. 미니멀한 클래식과 유러피언 현대 재즈 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를 창립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는 ‘팔리지 않는 음반을 만들겠다’, ‘침묵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는 없다’라고 말했지요.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주로 듣던 제가 요즘 원전악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바로크 기타나 류트(lute)로 폭을 넓혔고요. 근원적인 느낌이 제 취향이니 요즘 고음악(古音樂)으로 이끌립니다.”


이 작가의 ‘근원적인 느낌’에 이끌린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예술가로서 삶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도 본능과 직관에 충실했을 첫 인류의 감성적 순수성이 묻어난다. 자신의 감정 표현을 하고 싶었던 최초의 선조(先祖)는 무엇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십중팔구 숯일 것이다. 그림 그리는 재료로 오로지 목탄만을 고집하는 이재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주변의 흔한 소재를 초대해 가장 특별한 감성을 자아내는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처럼 풍경만 그린 것은 아니다.


이 작가는 1990년대 전후부터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서른이 채 되기 이전인 1989년에 이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청년작가전에도 초대받았다. 당시엔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가 유행이었다. 이 작가 역시 그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선보였다. 가령 종이 위가 아닌 자연물 오브제(나무나 돌)에 연필과 흑연을 사용해 ‘드로잉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선보이는 다양한 작업 방식이었다. 일상의 사물 이면에 잠재된 감성에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미지를 표출해 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30대 말에 그리기로 전환해 지금의 목탄 그림에 들어선 것이다.


특히 이 작가적 전환기(혹은 작가적 사춘기)를 거치며 한결 속 깊은 성찰의 기회를 맞는다. 1990년대 중반 설치미술에서 벗어나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반복적으로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대상화 과정을 거쳐 나가는가 하면 2009년부터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나무를 찾아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만나게 된 나무들을 통해 세상의 현혹을 의연하게 내려놓는 법도 배웠다. 끝 모를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 방식 역시 그것의 산물일 것이다. 순간순간의 자극적인 감각에 안주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자신의 작품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저 너머, 캔버스에 목탄, 181×682cm, 2008년
저 너머, 캔버스에 목탄, 181×682cm, 2008년
화면의 주인공을 찾아서 오지를 헤매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란 화두를 놓치지 않았다. 이 작가에게 작가란 ‘세상의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슴을 향해 활을 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모순마저 승화시키는 사람을 갈구하며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 왔다. 그 우물에 비친 달빛에 위안을 삼고, 그 달빛으로 다시 세상을 비춰 왔다. 간간이 작품에 초대된 아내의 모습도 인상 깊다. 그 화면에선 초승달이 함께하고, 아내는 보름달이 돼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작게는 수 미터, 크게는 10미터가 넘는 대작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화면에 담겼음에도 참으로 특별하게 와 닿는다. 마치 이 작가 그림의 근원이자 감성의 원천인 듯하다.


이름 ‘재삼(在三)’처럼 그의 작품엔 3가지의 숙명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목탄, 달빛, 현(玄)의 하모니’다. 낮보다 밤, 태양이 아닌 달을 선택하며 ‘음(陰)의 예찬’을 선보인다. 오로지 밤의 기운만으로도 ‘빛에서 어둠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서 빛이 탄생함’을 증명해 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작가의 밤 풍광은 화려한 낮 풍경을 머쓱하게 만든다. 당분간 빛과 그늘, 그림자, 그리고 응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가의 작품 크기별 전시 가격은 60호(60×160cm)는 2015년 3000만원에서 3500만 원, 100호(162.2×130.3cm)는 4000만 원에서 5000만 원, 120호(193.9×130.3cm)는 5000만 원에서 6000만 원, 150호(227.3×181.8cm)는 7000만 원에서 8000만 원 등으로 5년 전에 비해 다소 올랐다. 마침 3월 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그림손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아티스트 이재삼은…

1960년생. 이재삼 작가는 강릉대 미술학과(서양화전공)와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19년 박수근미술관에서 제3회 박수근미술상의 수상기념전을 비롯해 동대문DDP 갤러리문(서울)·미메시스 아트뮤지엄(경기도 파주), MAD뮤지움 아트앤디자인(싱가포르), 롯데갤러리본점(서울), 아트사이드갤러리·갤러리아트사이드베이징(서울· 베이징), 포스코미술관(서울), 한원미술관(서울) 등에서 33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2018 제3회 박수근미술상, 2015 청남대대통령기록관 윤보선 대통령 초상화 제작 지명공모부문작가 선정, 2015 구글(Google) 아트 프로젝트 ‘구글 아트 앤 컬쳐’ 한국 작가 선정, 1988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강릉시청사, KEB하나은행, 나이키청도연구소, 한샘, 코오롱 본사, 청남대역사박물관, 미메시스 아트뮤지엄, 국회 스마트워크센타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현재는 경기 양평의 작업실에서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정부미술은행 작품가격 평가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7호(2020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