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에 갇힌 한국 경제의 생존법은

[한경 머니 기고=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세계 경제는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잇따른 지역 블록의 붕괴 조짐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대외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의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는 유연한 대응이 시급하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와 한국 경제는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규범과 이론, 관행이 통하는 ‘노멀’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특히 경제 분야가 심하다. 자유방임 고전주의 ‘경제학 1.0’ 시대, 케인스언식 혼합주의 ‘경제학 2.0’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학 3.0’ 시대에 이어 ‘경제학 4.0’ 시대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

경제학 4.0 시대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했던 종전의 세계경제질서가 흔들리는 현상이다. 세계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파리 기후변화협정 등과 같은 다자주의 채널이 급격히 악화되는 추세다. 국제규범 이행력과 구속력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역 블록은 붕괴 조짐이 일고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이탈렉시트(Italexit=Italy+ exit)까지 우려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는 한 차원 낮은 미국·캐나다·멕시코협정(USCMA)으로 재탄생했다. 다른 지역 블록은 존재감조차 없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쌍무 협력도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가 우려될 정도로 복잡해 교역 증진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스파게티 볼 효과란 삶은 국수를 그릇에 넣을 때 서로 얽히고설키는 현상을 말한다. A국이 B국, C국과 맺은 원산지 규정이 서로 달라 협정 체결국별로 달리 준비해야 할 수출업체에는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국가 간에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생산카르텔과 같은 시장담합기구도 무너지고 있다. 올해 초 창설 멤버였던 카타르가 탈퇴한 것을 계기로 1961년 출범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에 파장과 변화를 몰고 왔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다.

국제통화질서에서는 미국 이외 국가의 탈(脫)달러화 조짐이 주목된다. 세계 경제의 중심권이 이동됨에 따라 현 국제통화제도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 즉 △중심통화의 유동성과 신뢰성 간 상충관계인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중심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국제 불균형 조정 메커니즘 부재 △과다 외화 보유 부담 등이 심해지면서 탈달러화 조짐이 빨라지는 추세다.

국제금융기구의 분화 움직임도 뚜렷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국판 IMF인 긴급외환보유기금(CRA)이 조성됐고, 유럽판 IMF인 유럽통화기금(EMF) 창설이 검토되고 있다. 중국 주도로 세계은행(WB)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대항하기 위해 신개발은행(NDF)과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이 설립되기도 했다.

세계 경제와 국제통화질서의 틀(frame)이 흐트러지면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포퓰리스트가 판친다. 세계화 쇠퇴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제시됐던 ‘세계화 4.0(globalization 4.0)’과 같은 의미다.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면 ‘외부성(externality)’이 급증한다. 외부성이란 사적비용(Private Cost, PC)’과 ‘사회적 비용(Social Cost, SC) 간 괴리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간은 합리적이다’를 전제로 한 시장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외부성은 PC보다 SC가 적은 경우 ‘외부 경제(external economy)’, 반대의 경우 ‘외부 불경제(external diseconomy)’로 나뉜다.

외부성으로 ‘인간은 합리적이다’라는 경제학의 전제가 흔들리면 ‘가치(value)’가 ‘가격(price)’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현실 진단 자료로 경제지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지표경기와 체감경기 간 괴리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이런 여건에서 추진되는 경제정책은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 즉 경제주체와 시장 반응까지 감안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프레임에 갇힌 한국 경제의 생존법은

◆한국,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나

지난해 10월 이후 미국과 한국 경제처럼 지표상으로 괜찮은데 경제주체가 침체를 우려하고 시장은 주가 폭락 등으로 과민하게 반응했던 상황을 가정해보자. 프레이밍 효과를 중시하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금리 인상 속도 조절 등으로 경기와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금리 동결과 함께 0.5%포인트 인하설까지 나돌고 있다.

반면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국의 일부 경제 각료와 국회위원, 그리고 진보학자까지 ‘위기를 조장하는 가짜 미네르바 세력’으로 무시한다. 심지어는 경제전망 기관의 비관적인 예측까지 간섭하거나 정책 목표에 부합하는 통계만 마사지해 발표한다. 통계 조작 우려까지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 등을 활용해 경제지표와 경제주체의 반응 간 괴리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다. 텍스트 마이닝이란 중앙은행 총재가 금리를 올리겠다고 발언한 이후 매파적 성향의 어조는 ‘+1’, 비둘기파적 성향의 어조는 ‘-1’로 빅데이터 지수를 산출해 경제주체의 반응을 파악하고 시장 친화적으로 조절해 나가는 기법을 말한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시계열 자료를 토대로 한 각종 모델에 의한 전망치도 예측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 전망 기관이 예측 주기를 ‘분기’로 단축시켜 대응한 지 오래됐다. IMF의 기업취약지수(CVI), 일본은행(BOJ)의 대차대조법(BS) 방식, 미국 경기사이클예측연구소(ERCI)의 큐브 방식 등 새로운 예측 기법도 제시되고 있다.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대변되는 경제학 4.0 시대에 있어서 한국처럼 대외 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불리하다. ‘대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지난해 말 크리스토프 하이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사무총장이 “한국 경제는 세계 흐름과 격리되는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발언할 정도로 경제학 4.0 시대에 나타나는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다.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사례는 의외로 많다. 정부의 역할에 있어 세계는 ‘작은 정부’을 지향하고 있으나, 한국은 내년 슈퍼 예산이 상징하듯 갈수록 커지고 있다. 거시경제 목표도 ‘성장’ 대비 ‘소득 주도 성장(성장과 분배 간 경계선 모호)’, 제조업 정책은 ‘리쇼오링’ 대비 ‘오프쇼오링’, 기업 정책은 ‘우호적’ 대비 ‘비우호적’이다.

규제 정책은 ‘프리 존’ 대비 ‘유니크 존’, 상법 개정은 ‘경영권 보호’ 대비 ‘경영권 노출’, 세제 정책은 ‘세금 감면’ 대비 ‘세금 인상’, 노동 정책은 ‘노사 균등’ 대비 ‘노조 우대’로 대조적이다. 명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부 정책 결정과 집행권자의 의식과 가치가 이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프레임에 갇힌 한국 경제의 생존법은

‘세계가 하나’인 시대에 특정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를 주도하지 못하면 최소한 세계 흐름에는 동참해야 한다. 대내외 여건이 급변했던 1990년대 후반에도 나라 밖에서는 위기가 닥친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당사국인 한국 경제 각료는 ‘펀더멘털이 괜찮다’는 동떨어진 진단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다.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리 경제에 대한 해외 시각이 악화되는 점이다. 국가신용등급이 정체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글로벌 벤치마크 지수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에서는 선진국 예비명단에서 탈락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재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기업과 자금도 들어오지 않거나 빠져 나간다. 주한 외국 기업 단체는 각종 규제 강화 등으로 경영 여건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고 연일 비판하는 가운데 실제로 철수하는 외국 기업과 금융사가 늘고 있다. 우리 기업과 돈, 그리고 사람도 한국을 떠나고 있다. 이른바 ‘3대 공동화 현상’이다.

특정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람과 돈, 그리고 기업이 몰려들어야 한다. 던킨 도넛처럼 핵심 중심부가 비어 있으면 대내외 변수에 취약하고 경기가 쉽게 불안해지는 ‘천수답 경제’가 된다. 스탠더드앤푸어스(S&P)와 함께 세계 양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을 2.1%까지 내려 잡고 있다.

특정국이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책 결정과 집행자의 글로벌 마인드가 부족하고 훈련된 글로벌 인재가 배제돼 있을 때다. 국정 운영 우선순위도 ‘대외’보다 ‘대내’, 경제 각료가 ‘유연한 사고’보다 ‘경직된 사고’를 갖고 있을 때도 나타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이념이나 주장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경우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한국 경제가 더 이상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세계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시간만 지나면 되겠지’ 하면서 경제정책과 운용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삶은 개구리 신드롬(boiled frog syndrome)’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그때는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게 된다.

분야별로 △경제 활력 과제로는 심리 안정, 시장과 현장 중시, 친(親)기업, 규제 완화, 감세 추진 △잠재 성장 과제로 구조 개혁, 제조업 리쇼오링과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 육성 △민생 경제 과제로 국민 생활경제 현안 우선 해결 △대외 정책 과제로 대중국 쏠림 완화와 상시 국가 IR 활동 전개 △남북협력 과제는 다른 국정 과제(특히 경기) 간 균형 속 추진 △정책 운영 과제로 소득 주도 성장, 주 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 인상 등에 유연성을 부여해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