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 한국브랜드마케팅연구소 대표 인터뷰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국내에서 브랜드 가치가 화두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국내 브랜드를 글로벌 파워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이 있다. 박재현(52) 한국브랜드마케팅연구소 대표다. 그가 말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브랜드의 방향성과 크리에이터의 자질에 대해 들어봤다. 사진 이승재 기자
“온(溫)라인 세상, 감성 마케팅이 뜬다”
“LG 에어컨 휘센, SK 엔진오일 지크(ZIC), NHN, 주부초밥왕, 안철수 연구소(안랩)….”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브랜드들이다. 공교롭게도 이 이름들 모두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부터 착안됐다. 바로 박재현 한국브랜드마케팅연구소 대표다.

1990년대 중반, 광고·홍보대행사에서 일하던 박 대표는 브랜드 전문 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이직한 후, 본격적으로 ‘브랜드 네이미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600여 개가 넘는 브랜드 이름을 만들며 현존하는 국내 최고 브랜드 네이미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혀 왔다.

브랜드 네임을 만드는 과정이 ‘브랜딩(branding)’ 혹은 ‘브랜드 네이밍(brand naming)’이고 이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브랜드 네이미스트(brand namist)라 한다. 당시에는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말이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이었지만 박 대표는 마케팅에서 브랜드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통찰력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야흐로 ‘브랜드의 세상’이 온 것이다. 이제 제품의 질을 평할 때 뛰어난 성능은 기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의 시대, 과거에 비해 업체 간 정보 격차가 좁혀지면서 기술 발달에 따른 제품력의 차이는 미비해지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소비자들의 기대치도 한층 높아졌다.

소비자들은 제품의 기능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각각의 브랜드가 지닌 이미지와 개성, 가치 등 감성적인 부분까지 채워줄 수 있는 이른바 ‘감성소비’를 추구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마케팅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는 어떻게 브랜딩 돼야 할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고자 박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어린 시절 박 대표님은 어땠나요.
“끼가 많은 학생이었죠.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할 때마다 대본 작성은 물론, 사회까지 도맡아 했을 정도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생각하고, 발표한 내용들에 대해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행복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어쩌면 이때부터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insight)을 연습한 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통찰력을 압축된 언어로 표현한 게 바로 브랜드 네이밍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죠.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정환경이 큰 몫을 했죠.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제게 부모님은 ‘넌 끼가 있어 보이니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독려하시고, 자유롭게 사유할 공간을 만들어주셨죠. 일종의 DNA가 달랐던 셈이에요.”

처음 이 분야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 취직해 광고기획자(AE)로 일했죠. 그런데 저는 AE 업무만 하지 않았어요. 멀티플레이어처럼 다양한 부서 일을 경험했어요. 그런 제 태도에 대해 주변 평가도 좋았죠. 무엇보다 제게 ‘크리에이티브(창의적인) 세포’가 있다고 자주 얘기해주셨어요. 저 역시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열린 마음이었기 때문에 한번쯤 이 분야를 제대로 도전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았어요. 어쩌면 제가 이 시장을 크게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는 포부도 생겼고요. 그러다 운명처럼 새로운 기회가 왔고, 제가 본격적으로 브랜드 네이밍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가 됐죠.”

무슨 기회였나요.
“당시 광고주 중에 유공(현 SK)이 있었어요. 엔진오일 사업 분야에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의뢰였죠. 요구사항의 핵심은 ‘21세기형 엔진오일’이라는 이미지를 브랜드에 심는 거였죠.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볼까 많이 고민했어요. 단, 무슨 수학문제를 풀 듯 경직되게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죠. 무슨 일을 하든 너무 힘을 주기보다 되레 힘을 좀 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나오거든요. 대개 이런 경우, 사람들은 주로 엔진오일 자체에만 몰두해요. 저는 입체적으로 보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다 문득, 21세기를 21C(Centry의 C)로 써봤어요. 그 모양이 영문자 ZIC(지크)로 보였죠. 소비자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게 제가 처음 브랜드 네이밍을 한 거였어요. 이후 브랜드 네이밍 회사로 이직해 본격적으로 이 일에 파고들었죠.”
“온(溫)라인 세상, 감성 마케팅이 뜬다”
600여 가지 이상 브랜드 네이밍을 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소비자들의 호응이 가장 좋았던 건 LG 에어컨 휘센이에요. 휘센을 영어 브랜드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바람소리 ‘휘’, 세다의 ‘센’이 합쳐진 한글이에요. 하지만 딱 들었을 때 느낌은 한글과는 거리가 좀 있죠. 되레 북유럽권의 느낌이 강하죠. 이런 이질적인 감성이 제대로 통한 셈이죠. 흔히 사람들은 고가의 제품일수록, 낯섦이 커야 매력을 느껴요. 휘센은 그 점에서 소비자들에게 북유럽의 고급 수입 제품 같은 인상을 주는 데 적중했죠. 이름 자체의 시원한 느낌도 있고요. 이런 게 브랜드의 힘이에요. 사실, 휘센 이전의 LG는 국내에서 영원한 2등이라는 꼬리표가 강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에어컨은 물론 몇몇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잖아요.

이처럼 브랜드 네이밍은 기업들의 강력한 경쟁력 중 하나죠. 글로벌 시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단, 사견을 조금 붙이자면 국내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가 글로벌 마케팅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외국인 엔지니어들 영입을 통한 영업 전략을 짜더라고요. 물론, 해외 인재들 영입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죠. 그런데 아쉬운 점들도 많아요. 이를 테면 (국내 정서 특유의) 온도감이 부족하달까요. 가령, 사람을 부를 때도 이름을 오롯이 불러주는 것과 이니셜로 부를 때 그 느낌과 온도가 다르잖아요. 정서 같은 부분도 있는 거죠. 그래서 상품 이름에 이니셜을 붙이는 건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이런 부분의 마케팅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들어가야 경쟁력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말해요. 앞으로는 더욱 더 온라인 시대의 온자를 따뜻한 온(溫)자로 풀어야 한다고요.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은 감정적이기 마련이죠.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그냥 무턱대고 ‘너 나한테 얼마 줄 거야’라고 이해타산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기능은 좀 부족할지라도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온기를 줄 수 있는 것이 마케팅이 필요해요. 이제는 정말 제품의 품질에만 승부를 거는 시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쉬웠던 네이밍도 있었을 텐데요.
“시대를 좀 앞서가서 예상만큼 잘 안 된 곳이 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코엑스 상권이 형성될 때 조선호텔이 식음료(F&B) 분야 상권을 잡았죠. 그래서 거기에 신개념 식당가 ‘도머스 오리아’를 오픈했는데, 복합 레스토랑, 푸드코트 등 4개 정도 개별 브랜드가 있었죠. 그중 복합 레스토랑 ‘비즈바즈’의 이름을 제가 만들었어요. 당시로선 꽤 이슈가 됐긴 했지만 지금처럼 외식 문화가 메가트렌드는 아니었던 때였죠. 더욱이 코엑스는 주로 1030 젊은 층들이 많이 오는 상권인데 외식비로 쓰기엔 좀 버거웠을 거예요. 먹는 것에 대한 인식도 무조건 맛과 가격만 따졌을 때였고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등 이제 음식을 그저 먹는 행위로만 보지 않아요. 보고, 사진으로 남기고, 먹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면서 즐거움을 찾는 일종의 문화가 됐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비즈바즈가 좀 아쉬웠어요.”

좋은 브랜딩이란 어떤 걸까요.
“좋은 브랜딩은 평범한 제품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이죠. 맥주 사례를 들어볼게요. 우리나라의 맥주 브랜드들은 대부분 다 맛을 논하죠. 시원하다, 통쾌하다, 신선하다는 포인트만 강조해요. 너무 1차원 적이죠. 이런 건 솔직히 말해 좋은 브랜딩이 아닙니다. 일종의 마케팅 비용 손실에 가까워요. 반대로 일본의 유명 맥주 브랜드 삿포로를 보죠. 삿포로는 맛을 논하지 않아요. 그들은 늘 ‘스노 헤드’라고 이름 붙인 거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죠. 소비자들에게 일종에 맥주의 새 가치를 심어준 거예요. ‘맛은 기본적으로 자신 있다. 거기에 우리는 당신이 맥주를 끝까지 마시는 순간까지 맛을 지키는 거품도 일품이다’ 이렇게 브랜드의 가치를 구축한 거죠. 아사히도 늘 ‘엔젤링’을 강조하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온(溫)라인 세상, 감성 마케팅이 뜬다”
세계맥주협회를 비롯해 그 어느 곳에서도 거품이 좋은 맥주의 기준이라고 발표한 적이 없어요. 되레 맛만 기준으로 본다면 기린의 이치방 시보리가 더 낫다는 평가예요. 맥아의 첫 즙만 짜내 만들어서 이미 제품력으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맥주죠. 그런데 기린이 삿포로와 아사히를 능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브랜딩에서 갈렸다고 저는 생각해요. ‘맛’이 좋다고만 강조하면 소비자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차별화된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브랜딩의 핵심이고, 제품의 경쟁력이죠.”

브랜드 네이미스트도 결국 크리에이터잖아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AI)이 이 분야까지 침범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 단순, 반복적인 일은 다 사라지거나 기계가 대체한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크리에이티브한 분야는 다르다고 봐요. 뭔가를 창조한다는 건 결국 응용력의 차이거든요. 같은 걸 다르게 보는 시각이죠. 그런데 이 시각의 경우가 저는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걸 기계가 대체하려면 전부 프로그램화해야 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이 부분만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감정 산업 분야가 아무래도 중요시될 거예요.

사람이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은 너무나 많죠. 말투, 속도, 제스처, 눈빛 등등 이런 감정적 화학작용은 인간의 영역으로 오래 남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어쩌면 앞으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도 경영학도들 보다 인문학자, 철학자, 심리학자처럼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관통하고, 공감대를 뽑아낼 거라 생각해요. 이건 결코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요, 어떤 연습들이 필요할까요.
“저는 이 분야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거 3가지는 꼭 해보라고 강조해요. 첫째는 혼행(혼자여행)이에요. 가급적이면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무작정 떠나보라고 하죠. 남들이 짜놓은 스케줄을 따르지도 않고, 그저 자기 발길 닿는 대로 할 수 있는 혼행을 통해 그 사회의 문화와 모습을 느껴보라고 해요. 그리고 여행 가면 결국 사진이 남잖아요.

아무 의미 없이 사진을 찍기보다는 주제를 갖고 찍어보길 권해요. 가령, ‘내가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사람들의 신발만 봐야지’, ‘이번 독일 여행에서는 자동차만 봐야지’ 이렇게 주제를 갖고 관찰하고 사진을 남겨보세요.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덧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테니까요.

둘째는 역시 독서죠. 그중 잡지를 꼭 좀 읽으라고 강조해요. 잡지는 그야말로 트렌드 헌터들의 노력과 열정이 담긴 결과물이죠. 다양한 분야의 잡지를 읽다 보면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잡지에 대한 인식이 ‘공짜로 시간 때우는 문집’ 정도로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아요. 되레 가급적이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 잡지를 꼭 구독해서 공부하듯 열독하길 권해요.

마지막으로 디지털 문화의 경험치를 높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디지털 문화는 곧 시대의 흐름이죠. 이걸 거부하지 말고, 적극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해요. 예를 들면, 이모티콘도 다양하게 구입해보고, 무선스피커 등 새로운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져야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공감이 생기거든요.

보태어, 모범생이 아닌 모험생으로 살라고 강조 또 강조해요. 예나 지금이나 모험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세상을 움직였어요. 미래에도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만이 AI에 대체될 거라고 봐요. 동시에 모험하는 AI는 없어요. 모험만이 자신을 브랜딩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거라 믿습니다. 두려워 말아야죠.”

앞으로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요.
“지금하고 있는 회사 경영, 강의, 기업 경영 자문 일을 꾸준히 하고 싶어요. 나중에 작은 소망이 있다면 저의 경험들을 녹인 브랜드의 세계를 온도감이 느껴지게 써보고 싶어요. 지금껏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소설이나 수필처럼 따뜻하게 흘러가는 언어를 사용해서 글을 완성하고 싶네요.”
“온(溫)라인 세상, 감성 마케팅이 뜬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