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하던 화가가 선잠에 빠진 사이.밤의 짐승들이 날아와 그에게 덤벼든다. 오른쪽 아래에서 고양이와 동물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본다. 야행성 동물들이 모두 깨어나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홀로 잠을 잔다. 동물들은 호기심에 차 그의 창작을 엿보려는 걸까. 아니면 그를 덮쳐 해치려는 걸까. 위기가 느껴지는 이 그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고야는 남자가 기댄 책상 밑 공간에 흐릿하지만 크게 글자를 적어 넣어 힌트를 준다. ‘이성의 잠(꿈)은 괴물을 낳는다.’ 글귀가 가리키는 그림의 의미는 우리가 잠시라도 이성을 잃어버리면 그 틈에 괴물이 번성할 테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야는 판화집에서 타락한 남녀, 부패한 권력자와 종교인, 미신을 추종하는 대중을 묘사해 인간의 탐욕, 어리석음, 폭력, 광기 등을 풍자했다. 이 그림은 판화집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성을 강조하면서 그것과 상반된 ‘괴물’로 부엉이를 등장시켰다.
그렇다면 고야가 그린 부엉이는 어리석고 악한 세력일까. 그런 부정적인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부엉이 마스코트에 대해 갖는 좋은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부엉이를 대하는 이처럼 상반된 시각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고야의 그림에서 부엉이는 정말 부정적인 존재일까.
밤에는 지혜, 낮에는 무지
부엉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의 신조(神鳥)였다.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의 머릿속에 있다가 태어난 만큼 여신 중에서 제일 용맹하고 똑똑하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으로 불리는 아테나는 종종 부엉이를 데리고 다닌다. 부엉이는 맹금류이면서 캄캄한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엉이는 지혜로운 아테나에게 어울리는 새가 됐을 것이다.
아테나를 숭배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테나의 이미지를 자주 만들었는데 어린 부엉이를 함께 표현하거나 아테나 대신 묘사하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에 주조한 그리스의 은화에는 앞면에 아테나가, 뒷면에 부엉이가 새겨져 있다. 그 부엉이는 작지만 두 눈이 유난히 크고 둥글며 정면을 향하고 있어 뛰어난 혜안(慧眼)을 지녔음을 표시한다. 이렇게 여신 아테나의 분신으로서 화폐에까지 등장한 부엉이는 그리스 로마의 문명을 동경하는 후대 사람들에게도 변함없이 지혜와 부,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부엉이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사실 그 새가 활동하는 밤 시간에 초점을 맞췄을 때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낮이 되면 부엉이는 사물을 거의 볼 수 없으므로 지혜롭기는커녕 반대로 아둔해진다. 그 때문에 빛을 신성시한 중세에는 부엉이가 길조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엉이는 동굴이나 폐허에서 살고, 낮에는 조용하다가 밤이면 음울하게 울어대니 마녀나 저승사자처럼 불쾌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중세의 부정적인 시각은 기독교 문화에 계속 이어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코르넬리스 블루메르트(Cornelis Bloemaert II)의 판화에도 표현됐다. 여기서 부엉이는 사람처럼 안경을 끼고 두꺼운 책 위에 올라앉아 있다. 옆에는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촛불이 밝게 타오른다. 그러나 부엉이는 책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안경 너머로 멀뚱히 다른 데를 응시하고 있다. 그림 밑에 ‘촛불과 안경이 아무리 좋아도 부엉이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아무리 좋은 충고를 한들 듣고 싶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부엉이의 이미지는 어둠 속에 있는 자, 무지한 사람을 비유하는 상징이 되곤 했다.
‘괴물’이 지닌 낭만적 상상력
고야의 그림을 다시 보면, 그가 부엉이를 박쥐와 함께 ‘괴물’로 묘사한 것은 부엉이가 조심해야 할 어둠의 존재라는 부정적 시각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고야가 활동한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가 퍼져 있었다. 계몽주의란 이성을 연마해 인간의 잠재력을 계발함으로써 진리를 확실히 알 수 있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상이다. 고야 역시 계몽사상에 동조해 작품에서 이성의 힘을 강조하며 사회의 불의나 정신적 혼란에 대응할 것을 권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야는 이 판화의 프라도미술관 소장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여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성이 없는 상상력은 걷잡을 수 없는 괴물들을 낳는다. 상상력이 이성과 결합하면 예술의 어머니요 예술이 주는 경이의 근원이 된다.” 그러니까 고야가 말한 ‘괴물’이란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뜻하며 그것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면 경이로운 예술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야의 부엉이는 단순히 배격해야 할 부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 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서 긍정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왼쪽 끝에서 두 번째 부엉이가 발에 뭔가를 쥐고 있다. 막대같이 긴 그것은 날카로운 펜처럼 보인다. 영감이 떨어져 가는 예술가를 자극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부엉이 스스로가 창작을 하겠다는 신호일까. 어느 쪽이든 고야는 밤의 동물 부엉이의 어두운 측면과 지혜로운 측면을 모두 수용해 예술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고야에게 예술은 합리적인 이성만의 산물이 아니라 괴물처럼 제멋대로 요동치는 공상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말기에 그동안 억압됐던 비이성적인 인간 본성의 가치를 발견했다. 꿈, 환상, 공상을 중시하고 격한 감정이나 추하고 불합리한 것을 예술의 주제로 수용했다. 그런 점에서 고야는 낭만주의 미술의 시대를 개척한 화가였다. 그가 그린 부엉이는 낭만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동물이자 이성의 독주에 반대해 새로운 예술을 알리는 지혜로운 메신저였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0호(2018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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