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탐험가 도용복 (주)사라토가 회장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 오지 탐험만큼 일탈과 어울리는 행위가 또 있을까. 동시에 어쩐지 좀 특별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영역처럼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만난 이 사람.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가고자 하는 곳 어디든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다는 오지탐험가 도용복(76) (주)사라토가 회장의 행복한 도전기를 들어봤다.
[Big Story] “유언장 쓰고 오지 탐험, 도전 즐긴다”
성경에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은 생명의 나무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살다 보면 모든 게 내 마음대로 이뤄지기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한다. 그것이 곧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도용복 회장은 그 명제를 오롯이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는 (주)사라토가 회장직 외에도 오지탐험가, 주한엘살바도르 명예영사, 국립부경대 초빙교수, 대구한의대 특임교수, 한국국제합창협회 이사장, 뉴월드 오케스트라 단장, 시인 등등 현재 갖고 있는 직함만 열 손가락을 훌쩍 넘긴다.

활동량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국내 공공기관, 기업, 학교 등 어디든 그의 이야기를 원하는 곳이면 강의를 하고, 멘토 역할을 자처한다. 매일같이 등산과 독서는 물론, 책 집필과 음악 활동에도 열정적이다. 하지만 도 회장을 두고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오지 탐험이다. 이미 전 세계 171개국을 여행한 그는 지금도 1년에 석 달 정도는 새로운 곳으로 거침없이 향한다.

이때 그가 가지고 가는 건 단 하나. 20여 년 전 남미의 한 인디오로부터 받은 양가죽 가방이다. 그 속에 간단한 옷가지와 수첩, 카메라만 있으면 전 세계가 그의 품으로 다가온다. 그가 ‘일탈의 끝판왕’, 오지탐험가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Big Story] “유언장 쓰고 오지 탐험, 도전 즐긴다”
오지탐험을 하게 된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제가 원래 경북 안동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 그야말로 정말 가난했죠. 출세를 하고 싶은데 당시 그곳에선 묘책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 혈혈단신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집도 없이 석탄 나르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전문대학까지는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더라고요. 뭔가 제 사업을 하려면 여윳돈이 필요했죠. 주저 없이 베트남전쟁에 자원했어요. 그때만 해도 베트남전쟁에 가면 60~70%는 살아오지 못한 때라 지원자는 거의 저 하나였어요. 주변에서 ‘돈에 미쳤다’며 볼멘소리도 했죠. 하지만 전 절실했어요.

그렇게 베트남에 가서 번 돈으로 1970~1980년대 부산 서면 일대에서 전파상과 전자대리점 등을 하면서 상당한 부(富)를 일궜고, 골프용품 업체도 세우게 됐죠. 더할 나위 없이 승승장구할 때였죠. 그러다 50세가 될 무렵 제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오지 탐험을 시작하게 됐죠.”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베트남전쟁에서 의무병을 했어요. 병사들을 돌보는 것 외에도 수송대를 따라 정글 깊은 곳까지 들어간 적이 많아요. 사방이 지뢰밭이었죠. 같이 갔던 동료들 60~70%가 죽었습니다. 다행히 만 3년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30여 년간 거침없이 돈만 열심히 벌었어요. 그땐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그러다 쉰이 되던 해 몸이 아프기 시작했죠. 알고 보니 고엽제후유증이었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았던 저이기에 충격이 더했어요. 당뇨와 저혈압 증세도 점점 심해지면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과연 내가 앞으로 1년이나 더 살까 싶을 정도로 우울감이 짙었어요.

그러다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 <자이언트>의 한 장면이 생각났어요. 석유를 발견한 뒤 멋지게 스포츠카를 타고 가던 제임스 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건강만 되찾으면 꼭 저렇게 해보리라. 살아 있는 동안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죽겠다’ 마음먹었죠. 동시에 당시 이탈리아에서 플루트를 공부하는 둘째 딸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성악 등 음악을 배우면서 영혼을 치유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제 삶이 시작된 거죠.”

오지 탐험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오지 탐험은 그야말로 감동과 놀라움, 전율, 환희의 연속이죠. 한번 맛을 보면 결코 그 기분을 잊지 못해요. 무엇보다 여행은 영혼을 맑게 하고, 사람을 철들게 합니다. 당시 무너진 제 인생에 새로운 씨앗을 맺게 했죠. 그저 편하게 다녀오는 여행은 커다란 감동을 남기지 못해요. 직접 걸어서,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고, 부딪쳐보면서 경험하는 것 자체가 제겐 큰 공부고, 자산이 되더라고요. 더 좋은 건 이렇게 도전과 성취로 버무려진 제 환희의 열매가 강의나 멘토링 등을 통해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될 때 행복하죠.”

이키토스.
이키토스.
에콰도르.
에콰도르.
171개국을 여행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면요.

“아무래도 아마존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중에서도 레티시아가 추억거리가 많죠. 레티시아는 브라질과 페루의 국경을 마주한 콜롬비아 아마존 투어의 전진기지라고 보면 될 겁니다. 3개 국가가 접경해 있어서 문화도 다양하고, 100여 개 이상의 종족이 살고 있어요. 무엇보다 이곳은 2만4000여 종의 생물이 서식하는데 8700여 종 이상의 조류, 8000여 종의 어류가 살다 보니 사방 도처가 먹을거리죠. 여행비가 거의 들지 않을 정도예요. 그야말로 원시 자연에 폭 빠져 산 느낌이었어요. 그때 먹은 고슴도치와 쥐, 개미핥기가 무척 맛있었습니다.”

위험한 순간들도 많으셨을 텐데요.
“수도 없이 많죠. 한번은 에콰도르에서 여행할 때였어요. 저는 여행할 때 주로 밤 문화를 카메라에 많이 담아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밤 12시까지 일정을 마치고, 안전하게 큰길을 따라 숙소에 가려던 참이었죠. 갑자기 뒤에서 목을 조르면서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는 2인조 강도를 만났죠. 흑인들이었는데 밤이라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들의 눈동자와 이빨만 보였어요.

그땐 ‘아, 이건 정말 위험한 상황이구나’라고 직감했죠. 그래서 아무런 고민 없이 목에 메고 있던 카메라와 비상사태를 대비해 옷 주머니 곳곳에 넣어둔 40달러를 전부 줬어요. 그들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죠. ‘나 돈 다 잃었으니 잠이나 좀 재워달라’고 말이죠. 강도들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닌가’ 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당장 잘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사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결국 20달러를 돌려받았죠.(웃음)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없어요. 저는 그들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고픈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죠. 그래서 제가 나중에는 그들에게 제안도 했어요. 차라리 내 가이드 일을 해달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그들과 인연을 맺었죠. 사람이 그래요. 저도 50세에 제 삶의 환경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저 술이나 많이 마시고, 돈만 벌고 살았겠죠.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의 제 삶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향기로운 행복 그 자체입니다.”

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또 다른 에피소드들도 있나요.

“네. 제가 아프리카를 여행할 당시였어요. 거기는 정글이라서 뱀들이 땅 위가 아닌 나무를 타고 다니거든요. 여행객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을 잘 갖춰 입기 때문에 뱀에 잘 물리지 않아요. 그런데 현지 가이드 원주민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죠. 그러던 중 당시 동행했던 가이드가 독사에게 물려 죽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어요.

엄청 거구였는데 그 친구를 들쳐 업고 근처 배까지 허겁지겁 뛰어갔는데 배에 눕히자마자 숨을 거두더라고요. 한국이었다면 근처에 병원이 있어서 응급처치라도 했을 텐데 말이에요.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만큼 오지 탐험이 쉬운 것만은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는 베트남전쟁 참전 당시 이상으로 긴장감을 느끼죠. 왜냐하면 전쟁터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가지만 오지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죠. 변수가 참 많아요.”

이과수폭포.
이과수폭포.
부탄.
부탄.
마추픽추.
마추픽추.
오지 탐험 입문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 있나요.

“중미 카리브해를 느낄 수 있는 코스타리카를 추천합니다. 코스타리카는 인근 국가들과 달리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요. 삶의 질도 높고, 무엇보다 치안이 굉장히 좋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경찰이 있긴 하지만 대개 주 업무가 여행가이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코스타리카에서 여행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경찰에게 물어보세요.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줄 겁니다.”

사실, 오지 탐험은 일탈 중에서도 꽤 큰 프로젝트인데요. 준비가 많이 필요한가요.
“사실 준비해서 가려면 되레 아무것도 안 될 수 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일탈해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인생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가령, 제가 아마존을 간다고 해보죠. 아시다시피 아마존 주변 지역은 아직도 내전이 잦아요. 막상 아마존을 갔는데 내전이 생겨서 못 가게 된 거예요. 계획한 대로 안 됐다고 멈출 건가요.

저라면 볼리비아, 페루 등에서 서성이면서 내전이 끝날 때를 기다릴 것 같아요. 되레 그 지역들을 돌면서 제가 계획하지 못한 것들이지만 새로운 걸 얻을 수도 있어요. 성공은 무조건 목적지를 정해놓고 나아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매 순간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무슨 여정을 펼치는지에 따라 목적지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죠. 아무 의미 없이 나아간다면 목적지엔 시체뿐일 거예요. 지금 당장 어떻게 사는지가 가장 중요하죠.”

도용복 회장이 분신처럼 지니고 기록하는 수첩.
도용복 회장이 분신처럼 지니고 기록하는 수첩.
그래도 최소한 이것들만은 챙겨 가야 한다면요.
“저는 아직도 달랑 가방 하나 들고 가요. 가방 속에 제 모든 스케줄이 적혀 있는 수첩과 혹시 모를 카메라만 넣고 다녀요.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유언장을 쓰고 가죠. 나머지는 현지에서 부딪치는 대로 해결할 수 있거든요. 하루에 우리 돈 1만 원만 있으면 현지 주민들 어디든 받아줍니다. 그들에게 1만 원은 몇 달치 월급 이상이거든요.

그리고 전 외국어를 잘 못합니다. 그래도 통역 없이 현지가이드에게 문을 두드려요. 현지가이드 중에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그럴 때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보디랭귀지를 하면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어요. 좀 더 팁을 알려드리자면 제가 그림 솜씨가 좀 있거든요. 소통이 안 될 경우, 그림을 그려보세요. 70% 이상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걸 계획하고, 가져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뛰어드세요.”

부산 문현여자중학교에서 강의하는 모습.
부산 문현여자중학교에서 강의하는 모습.
음악 마니아인 도 회장의 LP감상실.
음악 마니아인 도 회장의 LP감상실.
평소에 굉장히 바쁘신데 에너지의 원천이 궁금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핑계 중 하나가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분들은 대부분 정작 시간과 돈이 생겨도 머뭇거리거든요. 저는 지금도 거의 매일같이 강의를 2~3회씩 하고, 반대로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고, 매일 저녁 9시 30분부터 2시간씩 인근 산을 오르고 헬스를 합니다. 그 와중에 석 달 정도는 전 세계를 누비고, 음악도 하고, 책도 쓰죠. 물론, 쉬운 것만은 아니에요. 하지만 조금만 부지런하고, 순간순간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로 채우다 보면 할 수 있게 돼요. 여기에 결과물도 좋으니 에너지가 계속 샘솟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저는 항상 현재 진행형인 삶을 살아요. 추후에 이루고자 하기보다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순간을 즐기죠. 그래서 저는 결코 버킷리스트를 쓰지 않아요. 목표를 설정하면 때론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정작 그 목표를 이뤘을 경우 도전을 멈출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있어요. 경계를 두고 싶지 않다고 할까요. 그저 끊임없이 제 길을 가다 보면 늘 제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계속해서 샘솟아 나와요. 그게 정말 세상의 모습이더라고요. 전 그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이 인생 같아요. 앞으로도 꿈꾸며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탈 혹은 오지 탐험은 000이다’라고 정의하자면.
“저를 사랑하는 삶의 방식이죠. ‘I love myself!’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도 받아주지 않아요. 저는 지금처럼 저를 사랑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네요.”


사진 이승재 기자·도용복 회장 제공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