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김수정 기자] 비는 인생과도 같다. 기나긴 가뭄에 언제 단비가 내릴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 않은가.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인생은 유한하지만 비는 무한해야 한다. 비의 존재 여부가 곧 인류의 시작이며 끝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날씨의 맛>(알랭 코르뱅 외), <날씨가 바꾼 익사이팅 세계사>(반기성), <지성과 실천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이야기>(김경준)
내리는 빗속에 삶이 젖는다
#1 현재 모래로 뒤덮인 메마른 사하라사막은 인간에게는 죽음의 땅이지만 6000여 년 전에 사하라사막은 물과 초원이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그러나 기온이 내려가고,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풍요로웠던 땅은 사막이 됐고 생태계도 변했다.

#2 14세기 초, 중세 유럽은 10년 이상 장마가 이어지면서 대기근이 덮쳤다. 기나긴 굶주림의 고통은 식인 풍습으로 이어졌고, 길 잃은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마녀가 등장하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의 토대가 됐다.

#3 ‘아랍의 봄’ 도화선은 2010년 여름
러시아를 강타했던 가뭄이다. 러시아 정부는 밀 생산량이 줄어들 것을 예상하고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했고, 민주적 체계가 불안정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에서는 폭동과 시위에 의해 기존 정권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태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러시아 가뭄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아랍의 봄’을 일으킨 방아쇠가 됐고, 이를 통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오늘날 시리아 내전과 수백만 명의 난민이 생겨났다.


인류 역사 속 거대한 페이지마다 ‘비’가 있었다. 때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때론 비가 오지 않아서 인류는 웃고 울었다. 역사란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그 승패 경험을 토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비를 논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존폐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가 만들어낸 의식과 가치관
비는 인류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동서양 인류 문명 전개의 시발점이 된 이집트 나일강과 중국 황허의 홍수를 꼽을 수 있다. 김경준 저서<지성과 실천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홍수는 일정한 주기에 따라 규칙적으로 발생했다. 수천 년 동안 6월 중순부터 강의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해 9월에 최고조에 이른 후 10월 중순에 원래 수위로 돌아온다. 나일강의 홍수는 상류인 아프리카 중부 고원의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서 우기를 맞아 비가 내리면서 시작되고, 비가 그치면서 끝나기에 정작 이집트 나일강 주변은 우리나라처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같은 규칙적이고, 파괴적이지 않은 나일강의 홍수는 그것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이집트인들의 세계관 형성에 토대가 됐다.

즉, 그들에게 우주만물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구성돼 있는 질서의 영역이며, 이는 절대적인 신들이 위계질서를 형성해 지배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은 훗날 세상을 선형적으로 이해하고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서양 사상의 특질 중 한 갈래가 됐다. 이러한 사상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나일강 홍수에서 출발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반대로, 중국 서부 곤륜산맥에서 발원해 황해로 흘러드는 5464km의 황허는 화북 지역 중국인들에게 생명수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역사상 1500번 이상 기록된 황허의 홍수는 불규칙적으로 발생했고, 규모도 컸다. 이런 까닭에 황허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주만물은 불확실하며, 불연속적으로 변한다는 자연관을 가지게 됐다.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며 변화의 양상도 절대적 질서보다는 음양의 조화와 균형에 따라 진행된다고 믿게 된 셈이다.

더 나아가 세상을 곡선, 원과 같은 순환적 질서로 인식하고, 사물을 원인과 결과의 단선적 구조가 아니라 전체적 맥락에서 우연이 결합된 복선 구조로 파악하는 동양적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비는 인류 생존의 매개체를 넘어 사람들의 인식, 세계관 형성에도 큰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비가 주는 감상과 위로
또한 비는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볼 수 있고, 비 온 뒤 진동하는 흙냄새를 맡기도 하고, 살갗에 닿는 빗물의 촉감, 찰방찰방 거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비의 특성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상과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비와 관련된 시, 소설, 음악, 그림 등 인문·예술 활동으로도 이어지게 됐다.

알랭 코르뱅은 저서 <날씨의 맛>에서 각종 연구문과 수필집, 예술작품 등을 통해 사람들이 비에 대한 감수성이 심화된 방식을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비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감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목사 윌리엄 길핀은 “비는 이 풍경들에 ‘음울한 기품’을 부여한다”고 했고, 샤를 보들레르도 시를 통해 “도시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이 울적함은 무엇일까?”라며 비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

반면, 스탕달은 비를 싫어했다. 그는 사적인 글에서 “영원히 내릴 것처럼 계속되는 질척하고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비”라며 매우 격렬하게 비를 탓했지만, 18세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는 “날씨가 궂을 때에는 비가 오는 광경을 보는 내게 비를 피할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으로, 바람이 불 때에는 따뜻한 침대 속에 있다는 것으로 나 자신의 인간적 비루함이 가라앉음을 느낀다. 소극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라며 비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아울러, 비는 감성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1790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주년 혁명파 시민 연맹 축제를 떠올려보자. 이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비에 대한 반응만으로도 그가 혁명 지지파인지 반대파인지 알 수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반혁명파 언론은 무질서와 혼란, 떠밀리는 인파, 젖은 옷이 몸에 붙어 윤곽이 드러나는 여성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묘사에 열중했다. 반면, 혁명 지지파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장한 병사들과 시민들이 함께 열렬히 춤을 췄다. 악천후도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던 것. 결국, 이날 함께 비에 젖는다는 건 결속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의 비는 ‘감성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처럼 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감상도 시대에 따라 혹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유되거나 공유돼 왔다. 비단, 비가 감상의 대상이 된 배경에 대한 연구나 비의 감상 방법에서 어떤 진화를 거쳤는지 가늠하기란 어렵지만 비를 감상한 모든 글에서 비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 이유 없이 슬픔을 부추긴다고 알랭 코르뱅은 해석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도 비가 왜 우리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대개 울적해지고,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비가 올 때 나타나는 신체 변화와 연계됐기 때문이다. 가령, 장마철의 경우 일조량과 운동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우울증에 취약한 환경이 조성된다.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고온다습한 장마철엔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여름 우울증도 증가해 뇌 안에 온도 조절 장치인 시상하부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데, 시상하부는 호르몬 조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 호르몬 불균형이 우울증 등 불안정한 감정에 원인이 될 수 있다”며 “따라서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는 뇌가 지치기 쉽고 뇌가 치지면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적절한 뇌의 휴식과 건강식을 챙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비가 꼭 우울한 정서를 내포하는 것만은 아니다.

되레,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느끼기에 비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사람의 뇌파 건강에 도움이 되는 백색(자연) 소음인 빗소리를 들으며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얻는 사람들도 최근 상당수 늘어나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 요즘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방송에서 빗소리를 활용한 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ASMR) 방송들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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