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더 좋아
RETIREMENT ● Longevity

[한경 머니 =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웰에이징연구센터장·석좌교수 ]

장수인 조사 과정 중에서 백세인을 모시는 가족이 누구인가는 큰 관심거리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조사 당시만 해도 아들, 며느리 특히 큰며느리가 모시고 있는데, 제주도 지역만은 백세인 35분 중에서 며느리가 모시고 있는 집은 두 집밖에 없었다.

며느리들은 제주도 출신이 아니고 한 분은 해남 출신, 다른 한 분은 대구 출신이었다. 제주도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전통이 강하지 않았고 형제자매가 고루 돌아가면서 모신다고 했다. 일반 전통사회에서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필자에게 이런 지역에 따른 차이는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제주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딸집에 거주하는 백세인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미안해하고 어색해 보이는 태도였다. 자식이 없어서 부득이 딸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세인 세대에게는 아들만이 자식이고 딸은 따로 셈을 하는 관습이었다. 실제로 백세인을 모시고 있는 칠순이 넘은 딸들의 경우에도 부모에 대한 안타까움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아들만 있었더라면…”, “우리 오빠가 살았더라면…” 하면서 딸인 자신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며, 불행이라는 표현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리 전통사회에서 아들 중심의 며느리 굴레적 전통의 극치는 ‘반보기’ 풍습이다. 시집간 딸들에게는 친정나들이를 제한했고 겨우 허용한다는 것이 한가위 언저리에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에서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해우해 회포를 풀고 바로 당일 시댁으로 돌아오게 하는 풍습이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어야 한다는 준칙이 있어 며느리의 친정나들이를 금기시했다. 따라서 딸은 시집보내 버리면 바로 남이라는 풍조가 생겼고 아들 선호, 딸 기피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공공연하게 딸을 선호하는 표현을 하는 백세인을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백세인은 일흔이 넘은 아들 내외와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신다고 해 주기도문을 외우고 계시냐고 묻자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끝까지 달달 외우셨다. 대화 도중 할머니가 난데없이 “나는 딸이 더 좋아”라는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백세인 연배에 딸을 아들보다 선호하는 분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놀라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왜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고 하시나요?” 할머니의 답은 너무도 간명했다. “아들이 교회에 안 다녀.” 딸들은 교회를 나가는데 아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음이 백세인 마음에는 큰 상처가 돼 있었다. 같은 종교에 귀의해 저 세상에서도 자식과 함께 하고자 하는 어머님의 마음이 역설적으로 자식에게 서운함을 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반면 시집 와서 친정을 그리는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하는 백세인도 있었다. 백년의 삶을 살아오신 분들에게 인생 중 가장 행복했거나 불행했던 일에 대해 물으면, 행복했던 때로 젊었을 때, 결혼했을 때, 자식이 대학을 졸업했을 때, 처음 집을 장만했을 때 등 다양하다. 그러나 시집올 때가 가장 슬펐다고 한 할머니와의 만남은 의외였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에서 만난 백세인 할머니는 여전히 참 고운 모습이었다. 집도 깨끗했고, 옷맵시도 단정했다. 빨래를 직접 할 만큼 건강하셨고 이야기도 잘하시고 노래도 잘하신다고 해 부탁을 올렸더니 할머니는 “아이, 얼굴에 검버섯도 있고 해서 안 해” 하시며 부끄러워하셨다. 다음 “할머니, 사는 동안 언제가 가장 슬펐어요” 하고 묻자 뜻밖에도 “시집올 때가 제일 슬펐어”라고 답하셔서 “왜 그때가 그토록 슬펐느냐”고 되물었다. 혹시 시댁이나 남편과의 문제 때문일까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친정어머니 때문이었다.

당신은 시골 부잣집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께서 둘째 부인을 얻어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밥신세가 돼 버린 친정어머니와 단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살았는데, 시집을 오게 됐다고 했다. 모녀는 헤어지면서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는 것이다. 80년도 훨씬 지나 100세가 넘었는데도 친정어머니를 두고 떠나 왔을 때의 가슴앓이를 지금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자식으로서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사례와 달리 서양 신화에 나오는 부모와 자식 간, 특히 딸의 관계는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 한 예로 크레타 미노스왕의 딸인 아드리아네가 있다. 아테네왕국은 7년마다 젊은 남녀 7명씩을 미궁 속 괴물 미노타우르스에게 공양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왕자 테세우스가 자원해 일행에 끼어 들어갔고, 아드리아네는 그에게 반해 부친의 뜻을 거역한 채 미궁을 빠져 나오고 괴물을 죽일 수 있는 실타래와 칼을 주어 테세우스가 성공하게 했다. 또한 신화상 가장 잔인한 마녀라고 불리는 메데아가 있다.

아르고 원정대를 이끈 영웅 이아손은 황금양털을 얻기 위해서는 콜키스왕 아에테스의 세 가지 요구를 들어야만 했는데, 공주인 메데아가 그에게 반해 왕을 배반하고 모든 비밀의 해법을 가르쳐주었다. 함께 도망칠 때 부왕이 쫓아오니 친동생을 죽여 시신을 뿌려 왕이 그 시신을 챙기는 동안 도망쳤다. 더욱 이아손이 나중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자,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 낳은 아들 둘을 모두 죽여 버리고 떠났을 만큼 잔인한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거침없이 부친을 배반하는 서양에서의 딸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딸의 모습이 우리의 신화 속에 들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리공주 이야기다. 일곱째 딸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공주는 부친의 중병 소식을 듣고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황천까지 찾아가 환생약을 찾아와 죽어 가는 부친을 살려내었다. 서양과 동양의 사이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효의 개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는 아들 선호가 컸지만 이제 딸을 더 선호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딸의 부모에 대한 효의 전통이 바람직하게 이어져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