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
도통 알 수 없는 풍경이다. 분명 하늘과 땅, 산이나 숲, 파도나 바다가 보이는데도 볼수록 이게 어떤 광경인지 미궁에 빠지게 된다. 마치 은하계 저편의 어느 소행성을
다룬 SF영화의 스틸 컷(still cut)을 보는 듯하다.
“제 작업에는 어떤 특정한 주제적 메시지는 없습니다. 내러티브나 전달 내용, 사회적 연관성에 대한 문제들 측면에서 메시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회화적 형식의 조형적 자연물’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실험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지, 납득할 수 있는 문제인지, 질문과 문제 풀이를 반복하는 과정입니다.
넓은 의미에선 이러한 과정 전체 역시 작업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무엇은 어떠하다’라는 직접적인 의견을 제시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때그때 적합한 과정을 찾고, 실험 행위의 객관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이 곧 제 작업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어느 정도 만족스런 메커니즘이 완성된다면 그때 비로소 메시지를 담고 싶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하고, 친밀하면서도 낯선 다중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세계. 안두진 작가 역시 “돌이나 나무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다”라며 “있는 그대로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 그저 표현되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과정이 곧 작업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선 김동현 이화익갤러리 큐레이터가 “안두진의 그림은 외계에서 처음 지구에 온 생명체가 접한 바다, 산, 구름 등의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며 “마치 시각적 이미지의 접붙이기 같다”고 표현한 것에 공감이 간다.
안 작가의 고집스러움, 프로 근성이 참으로 남다르다. 몇 미터가 넘는 대작이라도 ‘1호 크기의 붓’으로 형광물감부터 특정 색상의 물감까지 눈썹을 그리듯 오랜 시간 수도승의 자세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평면회화이면서도 풍성한 화면과 입체적인 공간감이 돋보이는 이유는 미세한 붓질이 수없이 중첩되고, 밀착된 색과 색 혹은 선과 선들이 한 몸으로 숙성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림의 방식’은 1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조형 방식을 구축해낸다. 그중에서 ‘이마쿼크(imaquark)’라는 개념의 정립은 대표적인 예다. 물질에서 ‘복합소립자’를 뜻하는 ‘쿼크(quark)’에 이미지(image)의 ‘ima’를 더한 합성어다. 이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이자 핵심적인 원형이 되고 있다.
이런 안두진의 작품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혹은 ‘설득력 있는, 날카롭고 단단함을 전하는 회화’ 정도로 얘기되기도 한다. 대부분은 시각적 즐거움에서 비롯된 소감들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프로세스의 디테일’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형식적인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정작 간과해선 안 될 점이 바로 그런 ‘섬세한 이미지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이므로 이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안 작가만큼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순서’에 철두철미한 집중력을 보이는 예가 드물다. 제각각의 작품들은 결코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게 없다. 마치 숭고하고 견고한 우주 질서와도 닮았다. 이런 ‘안두진만의 프로세스’는 대서사시를 옮긴 옴니버스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작품 <파도(Wave)>를 보면, 하늘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파도가 온 세상을 뒤덮을 듯 덮쳐 온다. 반면 그 아래 놓인 대지의 정경을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그림 속 풍경은 다른 작품 <분리되는 돌>의 부분이기도 하며, 다시 이 작품들은 대작 <닮은 것과 닮은 꼴>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이처럼 안 작가의 작품에는 여느 대하소설의 방대함 못지않은 치밀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서로 다른 길이의 그 사연들을 특유의 감칠맛으로 녹여낸 문학작품들을 만난 것처럼,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는 것이 안두진 회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굳이 그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나름의 경험과 방식으로 작품 속 퍼즐들을 독화(讀畫)해내는 과정이 참 묘미다.
안두진 회화의 제작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적절한 면 분할과 원색의 축적 과정으로 태어난다. 실제 제작 과정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기법은 분할된 면과 그러데이션 효과의 조화로움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사용되는 색감은 온전히 ‘원색(原色)’이다. 빨강, 파랑, 보라 등 서로 다른 원색과 원색이 중첩되고 쌓이는 사이에 색은 충돌하고 대립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불편한 스킨십을 거쳐야 서로 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뒤섞이는 각 원색들이 쌓이는 순서와 종류가 달라지고, 붓 터치의 길이와 방향에 따라 그려지는 대상이나 질감도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작품 제작의 힘든 점을 들자면 그 시간에 주어진 에너지를 한곳에 모아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한계적인 시간과 물질을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지혜롭게 사용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점점 공부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고 보고 수집하고 소화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작업은 시작도 못했는데도 말이죠.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특별한 버릇이나 습관이 있진 않지만, 매일 작업의 리듬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여기서 ‘작업의 리듬’이란 일정량의 작업량과 드로잉, 정보 수집과 학습 등의 과정을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의 꾸준한 계획 속에서 지속하고자 함입니다.”
안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작업 과정의 실험과 설정의 과정’에서 태어난다. 단순히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좇는다기보다 그 과정을 반복적으로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대나무가 스스로 마디를 만들어 ‘분절(分節)의 자성’을 게을리하지 않듯, 그도 ‘프로세스 자체’에 집중하며 긴 호흡을 이어간다.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는 늘 ‘현재 진행형’이다. 간혹 인터뷰에서 10여 년 넘게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관해 모색하고 있다는 표현도 그 연장선이다. 비록 조금은 더딜지라도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고,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와 단위들까지 창출해내는 것도 값진 성과물이다.
보는 이의 눈과 뇌를 단번에 사로잡는 형광색의 현란한 향연, 안 작가는 이런 자신의 그림을 ‘이마쿼크로 만들어진 회화’라고 명명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예측 불허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그는 평면회화 이외에도 전시장의 환경을 활용한 입체 작품이나 설치 작품으로도 표현해 왔다. 마법처럼 펼쳐 놓은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인간이 과연 자연물의 조직을 어디까지 모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사유 그 너머, 한계의 끝점을 확장시켜주는 안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 미술계는 물론 런던 사치갤러리, 아부다비아트페어 등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작품 가격은 50호(116.7×90.9cm) 700만 원, 100호(162.1×130.3cm) 1300만 원, 150호(227.3×181.8cm) 1700만 원 등이다. 참고로 5년 전에 비해 30~40% 상승했다.
아티스트 안두진
안두진 작가는 197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그동안 서울의 이화익갤러리, 베이징의 스페이스 캔, 홍콩의 카이스갤러리 등 국내외에서 9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과학기술박물관(밀라노), 사치갤러리(런던), 소카아트센터(베이징) 등 100여 회의 기획단체전에 초대됐다. 또한 마이애미 아트페어, 아부다비 아트페어, 로스앤젤레스 아트쇼, 스쿱 바젤 아트페어, 아트 14 런던, G-서울 아트페어, 한국 국제아트페어(KIAF) 등 많은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에 참여한 바 있다. 할렘 스튜디오 펠로십(뉴욕) 및 캔 파운데이션 레지던스(서울) 프로그램을 비롯해 몽인아트스페이스, 국립창동스튜디오, 난지창작스튜디오 등의 입주 작가로도 활동했다. 더불어 2005 중앙미술대전 선정 작가 및 2013 종근당 예술지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올리버 스톤 컬렉션, 송은문화재단,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등이 있다.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세종대 겸임교수,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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