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영 문학박사] 피아노는 음악가들의 애호를 받으며, 300여 년간 음악의 폭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한 악기다. 피아노가 있는 그림은 음악이 흐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Motif in Art] 피아노(piano): 음악이 흐르는 그림
피아노는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을 받는 악기다. 17세기 말 이탈리아의 악기 제조자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는 해머로 현을 쳐서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를 개발했다. 이전까지 주로 사용된 건반악기는 하프시코드(쳄발로)였는데 이는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구조였으므로 음량이 그리 크거나 풍부하지 못했다. 그런 단점을 보완해 새로 나온 악기는 '피아노포르테'또는 '포르테 피아노'라고 불렸다. 작고 여린(piano) 소리와 크고 센(forte) 소리를 모두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나중에 그 악기는 ''피아노'라고 불리게 됐다. 이름의 유래가 말해주듯 피아노는 물방울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소리부터 천둥처럼 강력하고 격정적인 소리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리의 급격한 변화가 가능하며 오케스트라나 합창에나 모두 필요한 화음을 가장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19세기에 피아노는 낭만주의 음악이 유행함에 따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더욱 발달한다. 처음에는 베토벤의 폭발하는 연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현이 끊어져 버렸지만, 점차 크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보완됐다. 피아노는 베토벤의 열정을 전달하고 쇼팽의 감미로운 서정을 탄생시켰으며 광기에 가까운 리스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피아노 음악에 바치는 경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라는 그림에는 빈의 한 살롱에서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 그림은 피아노 제조업자 콘라드 그라프(Conrad Graf)가 화가 요세프 단하우저(Joseph Danhauser)에게 주문해 제작한 것이다. 그라프가 만든 피아노는 베토벤, 쇼팽, 리스트 등이 사용했을 만큼 명품이었다. 그림에는 그라프의 피아노가 그의 분신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젊은 리스트가 앉아 연주하고 있다. 리스트는 악보가 아니라 창가에 놓인 커다란 베토벤의 흉상을 취한 듯 바라본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이 베토벤의 곡이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위에서 연주를 경청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유명한 문인과 음악가들이다. 앞줄 왼쪽에 알렉상드르 뒤마 1세(또는 알프레드 뮈세)가 책을 들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남장을 한 조르주 상드가 보인다. 상드는 한 손으로 뒤마의 책을 덮으며 바닥의 두꺼운 책을 밟고 있다. 훌륭한 음악이 들리니 문학가들도 글보다 소리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뒷줄에는 빅토르 위고(또는 베를리오즈)가 읽던 책을 멈추고, 그 옆에 파가니니와 로시니가 나란히 서 있다. 앞쪽에는 리스트의 정부 마리다구 백작부인이 피아노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다. 모든 사람이 홀린 듯 음악에 심취한 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그때 빈에 모인 적이 없었으니 이 그림은 일종의 상상 초상화다. 주문자인 그라프는 자신이 만든 피아노를 당시 음악계의 스타로 부상한 리스트가 연주하고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경탄하며 감상하는 장면을 그리도록 연출했다. 이로써 그는 피아노 음악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음악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악기의 제작자로서 자부심을 표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피아노 치는 여성들, 이상적인 가정의 로망
살롱의 중심에 놓이게 된 피아노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중에게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부르주아 계층의 가정에는 피아노가 고급 가구처럼 자리 잡았다. 이제 피아노 연주는 전문 음악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도 할 수 있는 고상한 취미가 됐다. 부유층에서는 가정교사를 들여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여성에게는 피아노 학습이 교양의 하나로 장려됐다. 안락한 실내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피아노 앞에 모여 있는 장면은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로망을 제공했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그림에서 그와 같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다.
[Motif in Art] 피아노(piano): 음악이 흐르는 그림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 연작을 보면 가정집 실내에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모여 있다. 흰 옷 입은 소녀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다른 소녀는 그 옆에 바싹 붙어 서서 피아노에 팔을 기댄 채 악보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화가가 자신의 집과 두 딸을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소녀들의 흰 피부와 발그레한 볼, 탐스러운 머릿결, 부드러운 의복에 싸인 유연한 신체 등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피아노에 달린 황금빛 촛대는 소녀의 금발머리와 의자 등받이의 황금빛 금속과 조화를 이루며 피아노 위 꽃병과도 어울려 화려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르누아르는 솜털처럼 날릴 듯한 가벼운 붓질로 온화하게 파스텔조의 색들을 입혔다. 피아노가 소녀들을 친밀하게 이어주고 밝은 빛이 전체를 따스하게 감싼다. 휴식과 여유가 있는 시간, 가정의 화목한 분위기가 즐겁게 다가온다. 그림에서 소리가 직접 들리지는 않지만, 자매의 정겨운 자세와 밝은 표정, 부드러운 터치와 곡선들, 온화한 색들의 리드미컬한 배치에서 우리는 피아노 가락에 맞춰 울리는 명량한 노랫소리를 느낄 수 있다. 음악과 회화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피아노는 음악가들의 애호를 받으며 300여 년간 음악의 폭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사회적 친목을 위해서나 가족 간의 유대를 도모하는 데도 유용하게 사용되곤 했다. 피아노가 있는 그림은 음악이 흐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속의 장면은 현실의 흔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그곳은 낭만이 있고 정신이 드높이 고양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