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인문학의 빛과 그림자

18세기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 9월 12일 오후 2시, 전문가 3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의 논의는 ‘18세기 인문학의 빛과 그림자’라는 주제로 크게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첫째, 18세기에 독특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던 배경은 무엇인가. 둘째, 서구와 달리 18세기의 역동성이 19세기 단절돼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18세기 인문학은 오늘날과 비교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내로라하는 인문학자들의 모임인 만큼 첫째 질문부터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넘나들며 논의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18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맥락을 만들어냈다. [한경 머니 = 진행·정리 이현주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
인문학자 3인 좌담
이현주 한경 머니 기자(이하 이 기자) 오늘날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고 보십니까.
김경집 인문학자 겸 작가(이하 김 작가) 이 세계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지금 인문학의 현주소는 ‘먹방’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대략 10년 전후해서 지적 유행이자 변종된 자기계발로 인문학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죠. 중요한 건 그 시대가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이하 박 교수) 최근 한 금융사의 1% 고객을 대상으로 경복궁 답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경복궁은 세종께서 16년간 계신 곳이기 때문에 도처에 세종 이야기로 꽉 차 있어요. 세 차례 진행했는데 매번 인원이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왜 답사를 왔느냐”고 물으니 “그동안 골프도 많이 치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좋은 음식도 많이 먹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갈증이 해결이 안 된다”고 해요. 제가 느낀 건 스토리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한정주 고전평론가 겸 뇌룡재 대표(이하 한 대표) 인문학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인간의 학문으로, 인간의 시선과 사유로 세상을 이해하자는 거예요. 특정 학문 종사자나 인문학자만 인문학을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문학, 사학, 철학 이외에도 기술이나 과학, 경제, 정치 모든 분야에서 인문학적 식견을 필요로 해요. 인문학은 사유하는 힘을 키워줍니다.
박 교수 한국만큼 문맹률이 낮은 곳도 찾기 드물잖아요. 그런데 저는 인문학을 할 때 인맹률도 크게 떨어지는 것 같아요.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하고, 자원이 있을 때는 어떻게 써야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18세기는 숙종 20년과 경종을 잠깐 거쳐 영조 52년의 황금시대가 이어졌고, 서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시점(1776년)에 맞물려 정조 시대가 열려 1800년까지 꽉 채우죠. 이 시기에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 이른바 인문학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지적 수준과 사람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꽉 채울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런 부분이 경제지에서 인문학을 얘기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기자 18세기는 다양성과 역동성이 있는 시대였습니다. 18세기의 변화 중 특히 어떤 점에 주목해서 보시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 작가 서양의 경우는 주목할 것 중 하나가 미적분의 출현이라고 봅니다. 18세기 초 뉴턴이 먼저 발명했고, 7년 후 외교관 겸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오늘날의 미적분을 고안해냈는데, 사실 미적분은 단순한 계산법이 아니에요. 17세기까지 인류가 쌓아 온 지성사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수학적 해답을 찾은 것이고, 미적분이 있었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가속화될 수 있었어요. 미적분을 중심으로 서양과 동양의 문명이 역전돼서 그 이후로 한 번도 재역전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본다면 한 사회가 어떤 구조로 전개돼 왔는지, 각각의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해법을 찾고 집단 지성이 대처해 왔는지 조명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18세기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문 정신의 중심은 ‘자유로운 개인의 발아’가 아닌가 싶습니다.
박 교수 18세기는 결집과 확산, 또 포용하는 시대였어요. 정조가 생각하는 18세기는 굉장히 불안한 시대였던 것 같아요. 마치 큰 그네를 타고 앞으로 나가는데, 다시 반환점을 돌고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정조 입장에선 주자학의 한계도 느끼고 세계도 곧 뒤집힐 것 같았겠죠. 거대한 시대의 그네를 타고 가면서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숙종 시절에는 사회가 다이내믹하고 화려했어요. 물류가 화폐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풍부했고요. 그런데 경종 때 잠시의 과도기를 지나서, 노론의 50년 장기 집권 시대가 돼요. 영조의 말년이 되면 일종의 이모빌리즘(immobilism),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는 거죠. 정조는 그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에요. 남인을 비롯해서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기용하지만 전체 틀은 바꾸지 못하죠. 그런 큰 흐름에서 불안의 시기였기 때문에 문학 작품도 다양하게 나옵니다.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안정돼 있으면 그 정도로 부흥하진 않았을 텐데, 그 시대가 불안하지만 또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큼 안정돼 있는 시기였어요.
한 대표 18세기에 왜 글쓰기와 독서의 혁신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제야 지식인층의 형성일 겁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경종과 영종을 거치는 사이 권력 투쟁에서 노론이 승리하고 일당 독재가 시작되면서 다른 당파의 가문의 지식인들은 관직으로 진출할 기회가 줄거나 막히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글을 쓰고 독서하고 저술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데, 입신양명의 길이 좁아지면서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때맞춰서 18세기 각종 학문들, 서학과 남학, 북학 등이 중국 연경의 ‘유리창(琉璃廠, 서점가)’을 통해 들어오거든요. 또 서자나 중인들 중에서 오래전부터 지식인이 양산돼 왔고, 사회경제적으로 힘을 발휘할 만한 부를 축적한 이도 많았어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것에 적극적으로 맞서 자기 과시를 하는 부분이 인문학적으로 폭발한 배경이라고 봅니다.

이 기자 특히 문화 창조 능력이 18세기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인문학이 절정을 맞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요.
김 작가 18세기의 교류라고 봐요. 이전에는 국소적으로 이뤄졌던 교류가 18세기 오면 대규모로 이뤄지고, 알게 모르게 문물과 문명, 지식이 교류됐던 시기죠. 그래서 개인들의 의식도 달라질 수 있었고요.
박 교수 저는 소설의 인기를 꼽고 싶습니다. 목판본 소설을 찍고, 또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듣곤 했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의 ‘거리 두기’인 것 같아요. 예컨대 <양반전>의 경우 사람들의 생각에 양반들이 폼 잡고 ‘어험’ 하면서 걸어 다니는 것만 보다가 소설을 통해 이면을 보게 되고 그 내용을 사람들과 얘기해 가면서 객관화시키는 것이거든요.
<정조실록>에도 종로 연초(담배) 가게 앞에 사람들이 죽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어요. 이런 모습은 불안한 사회에서 개인들이 적응 내지는 자기 표출을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심리적 측면이 소설의 탄생과 목판본 찍기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 실제로 서양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배경에 사상서가 있던 게 아니에요. 프랑스혁명을 할 때 몇 명이 루소의 책을 봤을까요. 오히려 소설을 보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에 눈을 뜨게 되죠. 문학이 철학이나 사상보다 더 직설적이고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를 놓고 18세기 이후 19세기를 중심으로 비교해보면 조선에 가장 취약한 게 서점이 없었다는 거예요. 사신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책방을 꼭 들르는 게 일일 만큼 책에 대한 관심이 많으면서 책방이 없었다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어요. 이를 서양과 비교해보면 서양의 근대화에서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서재의 탄생이에요. 서재가 탄생했다는 것은 집 구조가 바뀌었다는 얘기이고, 집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은 경제 구조가 바뀌었다는 얘기예요. 우리는 지금도 책을 잘 보지 않죠. 서울만 보더라도 서점이 하나도 없는 동이 전체의 3분의 1이 넘고 점점 더 늘어요. 지방에 가면 한 군에 제대로 된 서점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합니다. 21세기 르네상스를 꿈꾼다면, 새겨볼 대목이죠.
한 대표 조선에는 서점 대신 장서가 문화가 있었어요. 크게 보면 장서가 문화도 서점 문화라고 봐요. 1만 권 이상씩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적을 회람해서 탐독해서 보곤 했어요.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 일본기행문)>을 보면 오사카에 가서 가장 감탄한 게 서점 거리예요. 아무리 번화한 것을 봐도 오랑캐고 야만족이라고 하면서 유일하게 감탄한 게 서점 거리죠. 연경에 가도 사절단이 필수 코스가 유리창이고 부러워했던 게 기록으로 남아 있죠. 그런데 왜 서점이 없었을까 궁금해요.
김 교수 조선에 일찍이 인쇄술이 발달하잖아요. 인쇄는 권력과 지식의 등치이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주조하는 곳을 두고 독점한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널리 보급한 게 아니라 통치수단으로 활용했죠. 이를테면 <효행록>도 그림도 넣어 가면서 조정에서 만들었잖아요. 우리의 인쇄 문화 자체는 발달했을지 몰라도 인쇄를 통한 지식의 보급에는 대단히 인색했는데, 그런 점에서 18세기는 독특해요. 조선에서 여러 사람들이 책을 보는데, 심지어 집집마다 동네마다 돈을 모아서 목판을 찍어 책을 내고 돌려보는 게 그때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
박 교수 그 시대의 정신인 것 같아요. <세종의 서재>라는 책을 냈는데, 세종 시대 엄청난 책이 만들어져요. 22분야 360종의 책이 나와요. <치평요람> 54권 이러거든요. 그렇게 많은 책을 찍어내는데, 세종이 “책은 찍어서 배포하는 것이지 파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해요. 왜 그럴까 보면 지식 권력 체제 때문이에요. 지식인 지배 체제 속에서 과거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봐야 할 책을 나눠주면서 사대부를 끌어가게 하는, 그런 시대적 정신이 조선왕조의 이념 체계로 나타나고, 그 전통이 정조 시대까지도 이어져오는 것이죠.
김 작가 18세기 출간된 책을 보면, 그 이전 시대 책의 카테고리와 크게 차이가 나요. 일상생활의 다양한 모습들, 농경에 관한 이야기들, 그런 사고를 가지고 학문적 천착을 했다는 것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박 교수 그게 바로 인문학의 시대인 까닭이고, 주요한 발아인 것이죠.
한 대표 일종의 문화 살롱이 유행이었어요. 18세기의 지성사를 얘기하지만 사실은 서울과 서울 근교에 국한되는 사회 현상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북학파나 서유구와 달성 서씨 집안, 홍길주와 풍산 홍씨 집안을 보면 재지사림(在地士林)들과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사제 관계로 보기에는 뭔가 달라요. 사상적 동지 내지는 문학적 동인, 벗 같은 관계거든요. 또 가학(家學)을 통해서 내려오고요.

이 기자 18세기의 변화는 왜 19세기 와서 단절돼 버렸을까요. 일본과 비교해보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데요.
한 대표 그런데 왜 조선의 18세기가 19세기에 가서 완전히 반전돼 버리느냐. 서양, 일본 그리고 조선의 차이는 축적된 시간의 차이인 것 같아요. 개인의 발아라는 차원에서 볼 때 서양은 14세기 르네상스 때부터 축적된 역사가 있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막부 이후 조닌(町人, 도시 상공업자) 문화로부터 축적돼 온 게 있어요. 조선의 경우 상대적으로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발현됐다가, 정치·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사라져 버린 형태인 것 같아요.
김 작가 조선의 역사가 600년 가까이 되는데, 세계 왕조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임진왜란 때 왕조가 망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는데 말이죠. 축적된 게 없는 게 아니라 중간에 단절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연결이 안 됐던 것일 텐데, 변화의 기운은 분명히 있었지만, 심지어 정조 이후 세도정치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꺾이게 되죠. 18세기 서양에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제국주의의 서막을 알렸어요. 문학에서도 <걸리버 여행기>처럼 어드벤처에 대한 갈망이 주요하게 다뤄졌는데, 이런 분위기가 18세기 중후반 부르주아 세력의 그랜드 투어와 맞물리면서 다른 세상과의 교류로 확산됩니다. 유럽을 벗어나 다른 세상, 문화, 사람들과 만나면서 다른 문화와 융합하게 되고 저변을 확대할 수 있게 되죠. 반면 우리는 중국에 드나드는 것 말고는 세계와의 직접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워요. 그 시작이 인체에 관한 것이었죠. 기존의 일본 체제에서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었지만 전방위적으로 흡수하고 세계화 물결에 합류하죠.
한 대표 외국 학문이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있었어요. 일본은 난학을 말씀하셨지만 직접 번역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온 게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 번역서 <해체신서>죠. 조선은 한역된 것을 보잖아요. 저는 이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번역이라 함은 철학, 역사, 언어 등을 총동원해 지적 역량을 발휘하는 종합 학문인데, 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조선과 일본의 역량 격차가 벌어진 것 같아요.
김 작가 또 하나 일본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 시조에서 정형시조가 파괴되고 사설시조가 나오는데, 숙종 시대에 오면 다시 사라져 버려요. 사회가 안정되면서 기존의 체제 밖에 벗어나 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다시 권위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열하일기>를 보면 조선 밖 세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데 정조는 패관문학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정형화된 오소독스(orthodox) 체제를 유지하는 일종의 인자 같은 게 있지 않나 싶어요. 아마 한 번도 직접 세계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그럴 거예요. 안에서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을 텐데, 그게 서양과 우리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대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정조는 분명 성리학자였어요. 문체반정을 봐도 그렇고, 개혁을 하는데 복고주의 개혁을 하려고 했던 분이잖아요. 천주교나 서학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용납을 하신 거죠. 문체에서 패관소품(稗官小品)체, 종교에서 천주교를 반대는 하지만 용납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유박해 이후로 19세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반대하면서 전면적으로 배척하고 탄압하는 거죠. 그게 우리 사회와 비슷한 것 같아요. 반대를 하더라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용납하면서 공존하겠다는 입장을 가진 것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18세기와 19세기의 달라진 분위기예요. 이후로는 천주교뿐만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배척하고 탄압해 버리잖아요. 그런 시대 분위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뭘 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겁니다.
김 작가 이중적 구조라는 표현은 정확한 분석인 것 같아요. 관건은 이중적 구조가 갈등을 만드느냐 혹은 다이내믹을 만드느냐의 차이 같아요. 서양은 다이내믹이 확장되는 사회·인식구조가 있기 때문에 빠져나가는데 우리는 없기 때문에 갈등이 주도권 싸움으로 가죠. 한쪽이 힘을 가지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짓눌러 버리는 거예요. 그게 정조 사후 우리의 문화 구조가 완전히 일색화되는 과정으로 나타난 거예요. 18세기의 역동성을 다시 한 번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과연 지금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갈등 구조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죠. 관용이 있으면 다이내믹이 되는 것 같아요. 관용은 강자의 몫이죠. 실제로 서양에서 18세기 이후 계속 강조되는 노블리스 교육의 핵심이 관용이죠. 우리 사회는 관용의 미덕이 사라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