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Landscape-androgyny#7’,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116.8×91cm, 2015년
‘Instant Landscape-androgyny#7’,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116.8×91cm, 2015년
김남표 작가의 그림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묘한 에너지가 넘친다. 단순히 ‘잘 그린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전체적으론 아주 ‘심플(simple)’하다. 아주 맑고 투명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셀 수 없을 만큼의 ‘레이어(layer)’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 김 작가의 연출력은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초현실적 풍경’을 실현시켜 보여준다.

마치 ‘알파고(AlphaGo)의 눈’으로 천년의 풍경을 한 화면에 편집한 것처럼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풍경의 편린(片鱗)들이 채집돼 있다. 기이하고 다변적이면서 다의적인 작품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오브제의 우연한 조합’ 때문이다. 얼핏 미완성처럼 보이는 넉넉한 여백 처리와 대상에 대한 극도의 세밀한 표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든 그림이 작은 한 점에서 시작되듯, 김남표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에 무엇인가 그린다는 ‘회화적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는 듯하다. 더없이 치밀해 보이지만, 무작위적이고 무위적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은 특별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도 김 작가의 그림에서 ‘인지학적 관점’이 스치는 이유 역시, 어쩌면 스스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화두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지학(人智學, anthroposophy)은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년)가 세운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지각적 체험과는 관계없이 인지적 상상, 영감적 고취, 직관의 능력들을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결국 ‘초감각적인 힘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초물질적 실존의 존재’를 찾겠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김 작가 그림의 특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이지만,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모든 경계의 초월적 구성’이란 점에서 많이 닮아 있다.

경계를 초월하다
보통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통해 그림을 이해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선 예외다. 얼룩말, 커피 잔, 하이힐, 초원, 폭포, 매화, 학, 정자(亭子), 호랑이, 기암절경….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면면의 관계성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들이다. 시각적 비주얼에 갇히는 순간, 작품의 내용을 추론해내는 것은 더욱 묘연해진다. 의외의 상황과 공간에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대상들은 보는 이를 무척 당황하게 한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고정적인 관념과 경계를 벗어나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김 작가는 이런 그림들을 어떤 생각으로 그리는 것일까.

“저한테는 재료를 통한 영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탕이 캔버스뿐만이 아니라 작품을 포장한 골판지, 나무판 등에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는 달라집니다. 재료는 저에게 작품의 구상이자 계획을 나타냅니다. 이후 주로 손으로 그리거나 비미술적 재료를 통해 그립니다. 파스텔, 콘테 등은 손으로 그리고, 유화는 휴지나 딱딱한 종이로 그립니다. 이때 비미술적 재료는 새로운 터치와 느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방식은 설계도 없이 주변에 널린 재료들로 집을 짓는 격이다. 그것도 정밀한 기계가 아닌, 손의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 김 작가는 “그림은 언어처럼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을 통한 비서사적 소통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의 첫인상이 ‘순간의 찰나를 채집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보는 이들의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배려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보는 상황이나 관점, 그리고 축적된 경험이나 사고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림을 제작하는 방식은 유사하더라도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왔다. 크게 보면 초기엔 구두나 가방 등 여성의 패션소품과 동물의 만남을 주로 보여줬다면 2013년에 들어선 동물의 눈으로 바라본 구한말 역사 시리즈를 선보였으며, 이후엔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재된 듯한 다소 중성적인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선택된 재료의 성격을 최대한 드러내면서도 그가 추구해 온 ‘우연성과 사건’을 주제로 한 나름의 소통 방식의 확장을 보여준다.
‘Instant Landscape-Garden#1’,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259.1×193.9cm, 2009년
‘Instant Landscape-Garden#1’,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259.1×193.9cm, 2009년
즉흥적인 직관력
김 작가의 그림을 구성하는 대표적 키워드를 꼽으라면 즉흥성, 손끝 풍경, 초현실주의, 동양화적 공간, 끝말잇기 등이다. 그래서일까. 제작 과정을 보면 ‘작품이 스스로 풍경이 된 느낌’이다. 제각각의 재료나 표현되는 대상들은 김 작가의 손끝을 거쳐 자가 증식을 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흔히 구상성을 띠는 그림들은 나름의 사전 계획이 필요하다. 그래야 탄탄한 짜임새를 바탕으로 ‘읽어내기’가 쉽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사전의 계획이나 밑그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즉흥성을 담보로 한 드로잉으로 시작해 예정에 없이 끝난다. 아마도 그림에 생명이 있다면 무척이나 큰 자유로움을 만끽할 것 같다.

김 작가는 습관처럼 4일 이상 작업실에 머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치고 느낌이 사라지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겉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질감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비계획적인 손끝에서 순간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만큼 순간순간 ‘찰나의 감각’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표현 영역이다. 그래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스스로 유통기한을 정해 놓은 것이다. 작품에 일관되게 ‘순간적 풍경(instant landscape)’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도 그러한 작가적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늘 미술관 3개 층을 채울 만큼의 작업을 준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큰 에너지를 모아야 하고요. 더 강력한 재료의 힘도 준비돼야 합니다. 반면에 더 가벼지고 힘이 빠져야 예술적 포스도 더 올라갈 수 있겠지요. 늘 작품의 환경은 만족스러워도 안 되고 만족스러움을 추구해도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예술을 기대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갈 길이 멀다’입니다.”

김남표만큼 작업량이 많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즉흥적으로 빨리 그려서가 아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직관은 확신에서 나온다. 결국 작업 과정에서 나타나는 즉흥성은 확신에 근거한 직관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김남표의 작업 방식이 유독 주목되는 이유도 그러한 요소들을 한꺼번에 갖추고 있어서다. 현대미술의 환경은 급변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다양한 함수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김 작가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쉼 없이 스스로 담금질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매우 왕성하면서도 특이한 화단 활동의 이력을 갖고 있다. 40대 후반 작가가 10회 넘는 개인전과 30여 회 이상의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에 초대된 경력을 가진 예는 드물다. 또한 개인전 이외에도 지용호나 윤두진 같은 차세대 유망 조각가로 촉망받는 주변 장르의 작가들과 컬래버레이션 2인전을 이어가고 있다. 아마도 2000년대 초반 여러 작가들과 함께 ‘집단 막’이란 단체를 꾸려 ‘현장성을 중시한 예술 실험’을 진행한 경험들의 반추일 것이다. 이런 활동 역량에 비해 작품 가격대는 다소 낮은 편이다.

작품 가격은 보통 3~4년 주기로 30%씩 올라가고 있는데, 지금 가격은 2013년에 형성된 것이다. 크기별 가격대는 50호(116.7×90.9cm) 기준 1200만 원, 80호(145×112cm) 1500만 원, 100호(130×162cm) 1800만 원, 120호(194×130cm) 2100만 원 선이다.
[김윤섭 소장의 artist]김남표의 즉흥 풍경

김남표(1970년~)

서울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서양화과를 전공했다. 그동안 12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회의 2인전(TENT: 김남표+ 윤두진)을 가졌으며, 50여 회의 기획단체전 및 30여 회의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에 초대됐다. 또한 ‘집단 막’을 통해 10여 회의 무대디자인을
주관했으며, 3번의 싱글 채널 비디오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서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 많은 곳의 미술관 및
기관과 개인 컬렉터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로 수상 이력으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전시기획부문 선정, 전국대학미전 대상, 창작예술협회 공모전 금상 등이 있다. 더불어 예술영화계의 대표 주자인 민병훈 영화감독이 김남표 작가 및 작품 세계에 대한 10년 아트프로젝트로 영상작업화를 진행 중이다.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미술대학 겸임교수 및 서울시 공공미술 심의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