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시계의 엔진인 무브먼트(movement)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ETA는 다른 그룹에 자신의 엔진이 들어가는 것을 중단하려고 하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ETA에 의존하던 이들은 시계를 만들 수 없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매뉴팩처화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런 생산적 배경 이외에 소비자들 또한 남들과 같은 무브먼트가 들어간 시계를 차고 싶지 않다는 점도 있다. 따라서 많은 시계 브랜드들이 매뉴팩처화를 진행 중이나 단시간에 이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무브먼트의 설계에서 생산하기 위한 설비와 인력 확보는 물론 자금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위해 제작비 30% 쓴다”
전통적으로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비교적 빨리 매뉴팩처화에 눈을 떴다. 그 무렵에는 지금처럼 경쟁이 격하지 않았으므로 매뉴팩처로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온전한 내 것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독점적인 기술력과 아름다움을 제공하고자 했고, 이에 해당하는 전통적인 매뉴팩처라고 하면 예거 르쿨트르와 파텍필립을 들 수 있다. 그중 예거 르쿨트르는 가장 매뉴팩처링의 순도가 높으며 규모가 크다. 이유는 케이스(case)나 무브먼트의 플레이트(plate)처럼 덩어리가 큰 부품부터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수준의 아주 작은 부품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계 부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같은 매뉴팩처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부품을 자사화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현재 업계에서는 매뉴팩처로 부를 수 있는 정도만 되더라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본다. 본격적인 생산의 시작은 제품 기획 단계를 지나 케이스나 플레이트처럼 큰 부품을 가공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과정을 거쳐 대략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면 케이스는 보다 세밀한 세부 가공공정을 거쳐, 도면이 지정한 수치대로 형태가 잡히도록 한다. 도면상에서 케이스의 표면에 광택이 있다면 폴리싱(polishing)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에게 전달돼 입자가 거친 순에서 부드러운 순으로 여러 번의 폴리싱 과정을 거친다. 광택이 없는 무광의 경우, 폴리싱 과정을 마친 후 헤어라인(hairline)이라는 표면 패턴을 지니기 위한 가공을 더 거치며 폴리싱과 마찬가지로 반복할수록 뚜렷한 결과인 고급스러운 질감을 얻게 된다. 플레이트 류는 축을 고정할 수 있도록 구멍을 내는 밀링 머신을 통과하며 기능할 수 있게 되는데, 대부분의 브랜드가 CNC, 밀링머신 공정에서 자동화 방식을 추구한다. 기계식 시계가 쿼츠 시계의 등장 이후 산업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가 부활했을 때 내놓은 가치는 아름다움이었다. 정확성에서 쿼츠 시계를 따라갈 수 없게 되자, 고급화로 방향성을 전환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돼야 한다. 시계의 아름다움은 미려한 케이스 디자인에도 있으나 무브먼트의 아름다움, 굳이 없는 말을 만들어 표현하자면 ‘기계미’다. 기계인 무브먼트를 아름답게 설계하고 가공하는 일이며 이는 앞선 공정과 달리 기계를 이용해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가공된 플레이트는 이미 기능할 수 있는 형태가 됐으나 매뉴팩처는 기능성,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오데마 피게의 두뇌, 즉 개발팀인 오데마 피게 르노 에 파피의 수장인 지우리오 파피는 “아름다움을 위해 전체 생산비의 30~40%를 소요할 수 있다”고 했으며 이를 기계식 시계의 본질이라 말했을 정도다. 아름다움을 위한 가공은 플레이트의 표면 장식, 모서리를 둥글게 마무리, 바닥의 패턴 처리 등이며 이를 보통 코스메틱 피니시(cosmetic finish)라고 한다. 이 공정은 금속, 나무 등으로 만든 전통적인 도구를 사용해 장인의 섬세하고 숙련된 기술을 요하므로 인건비를 포함한 비용이 적지 않게 소요되나 보통의 사람들은 쉽게 지나치는 부분이다. 랑에 운트 죄네, 두번 조립으로 완벽성 기해
코스메틱 피니시 과정이 마무리되면 무브먼트 조립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에 톱니바퀴, 태엽, 시계의 심장인 밸런스(balance)와 이스케이프먼트(escapement)처럼 기능에 필요한 주요 부품들이 쉽지 않은 과정을 통해 완성돼 있는 상태다. 얼마 전 신축 매뉴팩처를 공개한 독일의 랑에 운트 죄네는 두 번 조립하는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 차례 가조립 후 기능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분해 후, 플레이트의 코스메틱 피니시(스위스 브랜드와의 차이점이다)를 한 뒤 조립하게 된다. 플레이트의 소재도 브라스(brass)에 로듐 도금을 하는 스위스와 달리 저먼 실버라고 하는 금속을 사용한다. 저먼 실버는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로듐 도금과 달리 은은한 광택이 도는 점이 특징으로 오일, 지문 등의 오염에 약해 다루기 더 까다롭다. 따라서 저먼 실버로 완성한 랑에 운트 죄네의 무브먼트는 보다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무브먼트의 조립은 기능의 복잡함에 따라 숙련도를 요구한다. 가장 단순한 시간 표시 기능이라면 경력 3년 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에 반해 투르비옹(tourbillon), 스플릿 세컨드(split second), 미니트 리피터(minute repeater) 같은 컴플리케이션은 짧게 7, 8년 길게는 십수 년 이상의 경력을 요하며, 한 사람의 장인이 하나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전담해서 조립하는 방식을 택해 높은 완성도를 추구한다. 수십년 경력 장인 무브먼트 조립
무브먼트가 완성되는 동안 시계가 시간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는 판인 다이얼(dial)에 도료를 도포하고 아라비아, 로마 숫자 등의 인덱스(index)를 부착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시곗바늘, 핸즈(hands)를 만드는 작업도 이뤄지는데 상당수의 브랜드들은 바늘같이 작은 부품은 외부에서 공급받는다. 매뉴팩처의 경우, 가장 기초적인 부품인 나사(screw)까지 자체적인 생산을 거치게 되는 점이 차이지만, 각자의 전략적인 사정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은 부품은 외주를 통해 공급받기도 하며 독점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계약을 맺기도 한다. 케이스, 무브먼트, 다이얼이 완성되면 한 곳에 모아져 최종 조립 과정에 들어간다. 이때 먼지,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집진장치를 갖추어 완벽을 기한다. 장인의 손끝에서 백케이스가 닫히게 되면 시계 하나가 탄생한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매뉴팩처 각자의 규격에 따른 오차 테스트, 방수 테스트를 거쳐야 비로소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레이저 측정 장치 등을 이용한 1000시간에 걸친 오차와 규격 테스트를 거쳐 통과해야 한다. 다른 매뉴팩처 역시 외부로 기준을 공개하지 않지만 엄격한 자체 테스트를 통과해야 각국으로 출하하게 된다. 이제 하이엔드는 매뉴팩처 방식의 생산이 기본이다. 하지만 어떤 매뉴팩처라고 하더라도 100% 인하우스 생산은 불가능하다. 이는 실제 업계 관계자가 알려주었던 비공식적인 사실이며 100%라고 말하는 매뉴팩처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계에는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1000개 이상의 부품이 필요하며, 금속, 고무, 보석, 가죽 등의 다양한 소재가 요구돼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뉴팩처의 가치를 높게 쳐주며 하이엔드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온전한 내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나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구교철 타임포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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