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열두 번째 박경리 ‘토지’②

‘토지’는 단지 한 개인의 한(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절반의 서사가 복수의 이야기로 채워진다면 또 다른 반쪽에는 사랑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렇게 애증(愛憎)이 뒤섞인 채로 ‘땅’의 운명에 인간이 끌려가는 서사와, 인간이 어떻게 ‘토지’를 되찾기 위해 에둘러 가는지를 함께 이야기한다. 주인공 서희와 길상의 만남과 헤어짐은 이렇듯 같은 욕망으로 움텄으나 종국엔 다른 운명이 됨을 보여준다.
[GREAT TEACHING] 같은 욕망 다른 운명, 복수와 사랑의 서사
지난 9월 한 문화센터에서 ‘토지’에 대해 설명하던 중 여성 인물들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요”라는 약간은 의뭉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특징에 대해 여러 설명을 하지 않은 채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선보인 배우들의 사진을 보여준 것인데, ‘토지’를 이미 읽었거나 드라마를 본 청중들은 대개 ‘서희’를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서희’라고 대답했고 다른 분들은 딱히 누가 ‘미인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사진만 보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앞에 나와서 얘기하는 강사의 의도나 강의명에 대해 맘속으로 앞뒤를 재며 선뜻 얘기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강의 도중 제시한 ‘토지’ 속 여배우들의 사진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출중했기 때문에 ‘토지’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자신이 생각하는 ‘미인’의 조건에 부합하는 배우의 이름을 대었을 것이나 ‘토지’라는 정보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대개 주인공을 떠올린 것이다.

‘토지’가 아닌 다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대개 주인공의 선택과 도전, 역경과 시련에 공감하며 어느 순간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는 힘이 생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그 인물들의 삶이 ‘그러할 만하다’라거나 ‘아름다운 삶이었어’, ‘의미 있는 삶이야’라는 무언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삶을 통해 타인들의 감정과 태도 등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토지’를 두고 이런 판단을 하기는 실로 어렵다. ‘토지’ 속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이든지 각각의 삶 속에서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자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희와 길상의 삶을 통해 본 ‘토지’의 의미
그러나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토지’ 속에서 서희와 길상의 삶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희와 길상, 길상과 서희. 이 둘의 관계를 빼놓고 ‘토지’의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의 관계가 용정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열 개 손톱이 다 빠지는 한이 있어도 기어서라도 돌아갈거라”고, 그렇게 조선 평사리 집에 돌아갈 거라고 말하는 서희와 달리,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거야”라며 평사리행을 거부하는 길상, 둘 사이에는 어느덧 깊은 도랑이 드리워져 있다. 서희에게 길상은 ‘질기고 억센 삼베 같은 마음, 부드러우나 역시 질긴 명주 같은 마음’으로 서희를 붙잡아준 버팀목이었지만 어느새 길상은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다른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 해득하기 어렵지만, 서희와 길상은 그 바람 속에 몸을 맡긴 채 ‘이쪽과 저쪽 사이의 깊은 도랑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댈 뿐이다. ‘당신은 나를 따라가야 해’라는 절규를 차마 내뱉지 못한 채 서로의 갈 길을 점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실 바깥에서는 손 한 번 잡지 않았던 길상이 서희에게 손을 잡으며 같이 걷자고 한다. 서희는 평소와 다른 길상의 행동에 놀라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짐작하기도 한다. 조선으로 돌아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것, 짐작컨대 평사리행에 대한 언급이리라. 서희는 한시바삐 길상의 대답을 듣고자 한다. 아이들과 같이 조선으로 돌아가겠노라는 대답을 듣고자 한다. 그런데 길상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김환’이라는 자에 대한 얘기, 그 밤길을 걸어가며 서희에게 말하는 내용이 김환이라는 자가 바로 윤씨 부인이 낳은 아들이었다는 증언이다. 왜 하필 그런 얘기를 하는지 묻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았던 최씨 가문의 역사를 왜 꺼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서희에게 김환은 서희 모친을 유인해 도망간 ‘종놈 구천’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행한 짓은 최씨 가문을 향한 ‘복수’일 뿐이다. 그러나 길상은 이 지점에서 다르게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었소”라는 생경한 말. 이 알듯 말듯 한 말을 남긴 채 며칠 후 길상은 집을 떠나갔고 서희 또한 더 이상 길상을 기다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조선으로 떠나는 아침, 서희는 길상이 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아들 환국이 아버지 길상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완강히 버틴다. 길상이 떠난 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서희였지만 아들 환국이 “아버지랑 갈 테예요”라고 완강하게 버티자 이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을 달리하지는 않는다. ‘아버지 대신’이라는 말로 길상에 대한 미련을 접고 조선으로 향한다.


‘토지’를 통해 기억하고 청산해야 할 것들
그렇다면 길상은 왜 서희와 같이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아니, 왜 서희와 같은 배를 타지 않았을까. 이렇게 묻는 편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서희와 길상의 마지막 밤길 문답 속에서 길상이 서희에게 전한 메시지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전갈이다. 서희가 평사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그렇게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종족 보존의 본능’으로 가문을 되찾고자 하는 것, ‘천애고아’ 최서희가 원수를 갚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길상은 ‘복수’가 아닌 다른 길로 조선에 돌아가고 싶다는 메시지다. 최서희가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하지만 길상은 조선을 찾기 위해 간도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적이 같을 수는 있지만 방법이 다르며, 길상이 선택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독립운동이다.

‘토지’를 이야기하며 서희만이 아니라 길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이는 ‘토지’의 주제가 단지 한 개인의 한(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일면이다. ‘토지’ 속 절반의 서사가 복수의 이야기로 채워진다면 또 다른 반쪽에는 사랑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렇게 애(愛)와 증(憎)이 뒤섞인 채로 ‘땅’의 운명에 인간이 끌려가는 서사였다면 ‘토지’의 또 다른 절반의 서사는 바로 인간이 어떻게 ‘토지’를 되찾기 위해 에둘러 가는지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서희와 길상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는 이렇게 ‘복수와 사랑’이 바로 한 길에서 움트는 같은 욕망이었지만 종국에는 다른 운명임을 보여준다.

1969년 쓰기 시작한 ‘토지’, 왜 하필 그 시기에 ‘토지’인지 물어볼 만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방된 지 20~30여 년에 흐른 바로 그 시기에도 여전히 “조선 종자들은 어떻게 해도 안 돼”라는 말이 공공연히 거리와 교단에서 회자됐던 것을 떠올린다면 ‘토지’를 통해 무엇을 기억하고 청산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 종자’ 운운은 ‘토지’ 속 일제 밀정 노릇을 했던 김두수가 했던 “조선 놈의 새끼치고 순사부장이 어디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말들이 역사 속에서 청산되지 않은 채 버젓이 반복되고 있던 것, 해방됐지만 무엇이 해방돼야 하고 무엇을 독립시켜야 하는지 구분되지 않은 채로 ‘민족’과 ‘민족의식’이 반복적으로 추인됐던 1960~1970년대 사회 속에서 ‘토지’는 긴 호흡으로 되돌려보고 싶지 않던 역사의 장면을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속악한 마음의 불씨들이 만들어낸 죽음과 파멸의 그림자들이 뒤엉키는 현장을 일일이 들추어낸다. ‘조선 종자’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은 채 근대·식민의 열차 속에서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비밀스런 이야기들과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모의와 쟁투들. 따라서 이 긴 이야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저마다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인간 삶의 이러저러한 궁핍한 살림살이가 어떻게 역사의 줄기를 만들며 1969년의 발끝에까지 가닿고 있는지 하는 문제다. 물론 그 사이와 빈틈을 메우며 역사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랑’의 서사도 있다고 전하는 소설이 바로 ‘토지’다. 길상이 서희에게 했던 말,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었어”라는 말은 ‘토지’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토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하는 물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