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싱글 몰트위스키 기원은 위스키 업계의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한정된 생산량 때문에 ‘개체수’가 워낙 적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조금 덜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유통 채널에서 언제나, 그리고 늘 만날 수 있는 ‘기원 시그니처 라인’을 출시한 도정한 기원 대표를 만났다

[위스키 이야기]
전 세계에 K-위스키의 ‘매운맛’ 보인다
스코틀랜드 출신 마스터 디스틸러와 한국인 직원, 그리고 재미교포 창립자가 싱글 몰트위스키를 빚고 있는 증류소가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해 있다. ‘기원 증류소(구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가 그 주인공. 2021년 9월 국내 최초로 싱글 몰트위스키를 선보인 기원은 대한민국 위스키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기원의 창립자는 도정한 대표다. 유명 모델 송경아의 남편으로도 알려진 그의 이력은 꽤 독특하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1997년 한국으로 돌아와 아리랑방송에서 기자와 앵커로 일했다. 이후 글로벌 홍보대행사를 거쳐 마이크로소프트사 한국지사 최연소 임원에 오르며, 매스컴을 통해 얼굴을 알렸다. 그런 그가 수제 맥주 양조장 ‘핸드 앤 몰트’를 오픈하며 주류 업계의 이슈 메이커로 화제를 모은 것은 지난 2013년. 핸드 앤 몰트는 깻잎, 오미자, 김치 유산균 등 국산 농산물을 활용한 맥주를 잇달아 선보이며 한국 수제 맥주 열풍을 이끌었다. 2018년, 오비맥주의 모기업이자 세계 최대 맥주 회사 AB인베브에 핸드 앤 몰트를 매각한 도 대표가 제2의 창업 아이템으로 삼은 것은 바로 싱글 몰트위스키. 가까운 일본과 대만 위스키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데, 한국산 위스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늘 아쉬웠기 때문이다. 도 대표는 수제 맥주를 성공시킨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난 2020년 직접 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했다.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기원 증류소 전경.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기원 증류소 전경.
40여 년 경력을 자랑하는 마스터 디스틸러 앤드류 샌드가 손을 보탰다. 샌드는 위스키 증류소에서 태어나 유명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 글렌리벳 증류소와 일본 니카 증류소 등에서 경험을 쌓은 최정상급 디스틸러 중 한 명이다. 기원 위스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식의 특징을 살린 매콤함(스파이시)이다. 맥주를 양조할 때부터 강조해 온 ‘한국적인 맛’의 철학을 위스키 제조에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24년 10월에는 직접 재배한 국산 맥아(싹을 틔워 건조시킨 보리)와 국산 효모를 원료로 한국산 신갈나무와 떡갈나무 통에서 숙성한 ‘기원 한국 배치’를 출시하며 한국 위스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원이 5년도 채 안 된 신생 증류소라고 해서 걸음마 수준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미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선 오픈런을 해야 구입이 가능할 정도로 유명하고, 미국과 일본, 싱가포르 등 9개국에 수출 중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세계 3대 주류 품평회로 알려진 샌프란시스코국제주류품평회(SFWSC)와 국제주류품평회(IWSC), 세계위스키어워즈(WWA)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한국 위스키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최근 ‘기원 호랑이’와 ‘기원 독수리’, ‘기원 유니콘’ 등 3종의 시그니처 라인을 선보인 도 대표는 “K-팝이나 K-드라마, K-푸드가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것처럼, 세계로 뻗어 나가는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최근 사명을 쓰리소사이어티스에서 기원으로 바꿨다.
“쓰리소사이어티스는 재미교포 출신 대표, 스코틀랜드에서 온 마스터 디스틸러, 그리고 한국인 직원들 이렇게 각기 다른 사회가 하나의 뜻을 가지고 만들어 가는 증류소라는 의미를 지녔다. 너무 좋았지만, 한글로 쓰기도 힘들고 사람들이 말하기에도 힘들어 하더라. 그래서 우리 위스키 이름인 기원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기원이라는 이름은 ‘시작’과 ‘바람’의 두 가지 의미를 담았는데, 한국 위스키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싱글 몰트위스키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우리 회사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기원 증류소를 경기도 남양주에 마련한 이유가 있다면.
“앤드류와 함께 위스키 숙성을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아 헤맨 지 수년 만에 이곳을 발견했다. 남양주는 겨울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고, 여름에는 30도를 웃돌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위스키를 숙성하는 데 아주 좋은 환경이다. 또 스코틀랜드에 가면 위스키 증류소들이 강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양주에는 깨끗한 지하수가 넘쳐난다. 마지막으로, 서울과 가까운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물류 이동에도 유리하지만, 하나의 관광지처럼 위스키 애호가들이 우리 증류소를 방문해주길 바랐다.”

- 숙성 환경이 좋은 이유는.
“나무는 추우면 수축하고, 더우면 팽창하는 속성이 있다. 더운 여름엔 오크통이 위스키 원액을 한껏 빨아들였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내뿜는 것이다. 기온차가 심한 남양주에서는 오크통의 수축 진폭이 크기에 그만큼 빠른 숙성이 가능하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4년간 숙성해야 나는 맛을 1년이면 구현할 수 있다.”

- 마스터 디스틸러 앤드류 샌드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핸드 앤 몰트를 운영하며 알게 된 지인을 통해서다. 둘 다 애주가이자 자전거 타는 취미가 같아 금세 친해졌다. 이후 이메일을 주고받다 내가 자전거 타러 한국에 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나의 비전을 보여줬고, 앤드류가 한국 위스키의 가능성을 엿보면서 함께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새롭게 출시한 ‘기원 시그니처 라인’ 위스키 3종, 왼쪽부터 독수리·호랑이·유니콘.
새롭게 출시한 ‘기원 시그니처 라인’ 위스키 3종, 왼쪽부터 독수리·호랑이·유니콘.
- 최근 시그니처 라인을 새롭게 선보였다.
“그동안 우리가 선보여 온 위스키는 모두 배치별 제품이었다. 다시 말해 한정판 위스키다. 생산량과 제도적 제약 등으로 한정 제품만 선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완판 행진을 이어가면서 ‘원망’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위스키 애호가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그니처 라인은 품질을 유지하면서, 가격을 낮추고 접근성은 높인 제품이다. 데일리샷과 보틀벙커, CU, GS25, 홈플러스 등 다양한 유통 채널에서 항시 만날 수 있다.”

- 시그니처 라인을 ‘기원 호랑이’와 ‘기원 독수리’, ‘기원 유니콘’ 세 가지로 구성했는데.
“기원 호랑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 셰리 오크통에서 숙성한 싱글 몰트위스키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달콤한 과일의 풍부한 맛을 지녔다. 반면 기원 독수리는 미국 버번위스키 오크통과 버진 오크통에서 숙성해 달콤하면서 오크의 강렬한 풍미를 담아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특히 버번 오크통 숙성 위스키를 즐겨 온 이에게는 색다른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기원 유니콘은 ‘샌프란시스코국제주류품평회(SFWSC) 2024’에서 더블 골드를 수상한 ‘기원 배치 4 스모크드’를 모티프로 만들었다. 부드러운 피트 향을 품었는데, 아일라 위스키를 좋아하거나 스모키한 위스키에 도전해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한다.”

- 보틀과 라벨 디자인도 확 바뀌었다.
“기원만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증류기의 모양을 본뜬,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병을 제작했다. 라벨 색상을 파스텔 톤의 노랑과 분홍, 녹색으로 제작한 건 한국의 저고리에서 착안한 것이다. 제품 라벨 중앙에 기원 위스키 증류소를 상징하는 엠블럼과 경기도 남양주 증류소 산속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 <일월오봉도>를 연상시키는 그래픽을 넣어 한국적 독창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기원의 영문을 KI와 ONE으로 띄어 쓴 건, 외국인들이 자꾸 ‘키오네’나 ‘카이원’이라고 읽어서다.(웃음) 한국적 느낌을 많이 담고 싶었는데,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 시그니처 라인을 먼저 접해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얼마 전 ‘위스키 라이브 싱가포르’라는 위스키 쇼에서 시그니처 라인을 처음 선보였다. 전 세계에서 정말 다양한 위스키 브랜드가 모였는데, 기원 시그니처 라인이 판매량 톱3 안에 들었다. 나도 놀라고, 주최 측도 놀랐다. 우리 부스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소문 듣고 왔다’고 하더라. ‘아, 내가 맛있는 위스키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다.”
증류기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증류기 제조 회사인 포사이스(Forsyths)에서 특별 제작한 제품이다.
증류기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증류기 제조 회사인 포사이스(Forsyths)에서 특별 제작한 제품이다.
- 싱글 몰트위스키는 증류소마다 제각각 개성이 드러난다. 기원 위스키만의 특징은.
“기원 위스키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국의 맛’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맛이라고 하면 주로 매운맛을 떠올린다. 기원 위스키는 끝 맛이 고추장처럼 ‘매콤달콤’하다. 또 입안을 때리는 ‘펀치’도 느낄 수 있는데, 가령 일본 위스키가 미소 된장국처럼 심심하고 은은하다면 우리 위스키는 된장찌개처럼 다채롭고 강렬한 맛이 난다.”

- 요즘 주류 판매점에 가보면 위스키 종류가 정말 많다. 그중 기원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앞서 말했듯이 그 어떤 위스키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원만의 독특한 풍미가 있다. 전 세계에 내놔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맛이다. 또 항상 한국적인 맛의 특색을 고려하는 만큼 한식과도 정말 잘 어울린다. 외국인에게 선물할 때도 기원만큼 좋은 위스키는 없다고 생각한다.”

- 최근 한국 위스키 시장이 한풀 꺾였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 위스키 시장은 업황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넓은 관점에서 보면 지속적으로 성장 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은 위스키 소비 연령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주요 위스키 소비국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된 반면, 한국은 20~30대가 위스키 문화를 이끌고 있다. 여성 소비자도 많다. 무엇보다 한국의 음주 문화가 ‘부어라, 마셔라’에서 취향에 맞는 술을 찾아 적당히 즐기는 쪽으로 변하고 있지 않나. 한국의 술 문화와 함께 위스키 시장도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본다.”

- 2025년에는 어떤 제품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인가.
“다양한 신제품을 선보인다. 올해 시그니처 라인을 선보였기에 내년에는 리미티드 에디션에 집중할 것 같다. 그중에는 ‘기원 한국 배치’처럼 한국적인 맛을 담은 실험적 위스키도 포함된다. 전통주 브랜드와 협업한 위스키일 수도 있고, 복분자주를 담았던 오크통이나 약주·청주를 담았던 항아리를 활용한 제품일 수도 있다. 기대해 달라.” 향후 목표와 비전이 궁금하다. “요즘 해외 출장을 다니다 보면 K-컬처의 인기 덕분인지 한국 술에 호기심을 보이는 외국인이 많다. 한국 위스키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기원=K-위스키’라는 인식이 생기면 좋겠다. 그래서 향후에는 일본의 ‘야마자키’, 대만 ‘카발란’과 함께 3대 아시아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다.”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 |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