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문이 든다. 글로벌 초일류 기업 삼성의 금융사들은 왜 글로벌화에 실패했을까.

자산 순위 세계 100대 은행에 속하는 KB국민·우리·신한·하나은행은 왜 해외시장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일까.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입버릇처럼 ‘글로벌화’를 외쳤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심각한 것은 글로벌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동아줄이라는 점이다. 글로벌화의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금융의 자화상을 들여다봤다.
[SPECIAL REPORT] 한국 금융의 글로벌화 딜레마
신흥국 말레이시아는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견주는 잣대로 활용되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레이시아가 지난 10년 사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금융 서비스 다양성’ 부문에서 22위, ‘대출 접근성’ 부문에서 5위였다. 한국은 각각 92위, 118위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말레이시아 금융회사들의 글로벌화는 국내 은행들과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다. 메이뱅크는 이미 세계 20개에 2200개의 영업점을 보유하고 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전체 수익의 30%를 차지한다. CIMB 또한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외 수익을 전체 수익 비중의 39%까지 끌어올렸다. 금융 경쟁력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차고 넘친다.


한국 금융시장 성숙도 144개국 중 26위
세계경제포럼이 최근 발표한 국가 경쟁력 평가에서도 한국은 전체 144개국 중 종합 순위 26위를 기록했지만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금융시장 성숙도’ 순위는 80위에 그쳤다. 아프리카의 케냐(24위), 가나(62위), 말라위(79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수익성도 참담하다. 국내 은행 해외 점포 152곳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말 4억5000만 달러로 2012년(6억4000만 달러)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금융 산업의 선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매킨지는 지난해 4월 한국 경제의 문제와 대안에 대해 분석한 ‘2차 한국 보고서’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치고는 금융 산업의 부가가치가 터무니없이 낮다”고 지적했다. 도미니크 바튼 매킨지 글로벌 회장은 “지난 10년간 한국에 실망스러운 점이 있다면 잠재력을 끌어올리지 못한 한국의 금융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매킨지는 한국이 금융 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키울 경우 50만 개의 고소득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금융계 내부 사정만 봐도 글로벌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이는 급감하는 수익성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국내 은행들이 벌어들인 순이익은 2004년엔 8조7751억 원이었지만 지난해엔 3조8823억 원을 기록했다. 은행 수익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인 ROA는 지난해 0.38%에 그쳤다. 지난해 산업은행금융지주가 순손실을 내며 적자로 전환한 것을 비롯해 우리금융(-67.1%), 하나금융(-34.2%), 기업은행 (-24.8%), KB금융(-18.6%) 등 대부분 지주사와 은행이 전년 대비 순익이 감소하며 실적이 악화됐다. 세계 최저 수준이다. 보험사나 증권사도 마찬가지다. 국내 가계의 보험 가입률은 200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95%를 넘어섰고 빠른 고령화와 낮은 출산율은 물론 방카슈랑스, 온라인 보험 활성화 등으로 인해 보험사들은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해졌다. 단순 브로커리지에 의존했던 증권사들도 지난해 국내 증권사 62곳 중 45%인 28곳이 적자를 냈다. 보험사와 증권사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까지 내몰렸다.
[SPECIAL REPORT] 한국 금융의 글로벌화 딜레마
글로벌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부각됐지만, 한국 금융의 글로벌화에 대한 회의론은 여전하다. 외국계 금융사 대표는 “한국 금융사들은 지금까지 정부의 보호 아래 집토끼처럼 살았지만, 글로벌화는 야생으로 나간다는 뜻”이라며 “어느 날 갑자기 집토끼가 산토끼처럼 살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한국식의 수직적인 기업문화도 수평적인 글로벌 금융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장에 안 된다면 10년, 20년 차근차근 준비해서 글로벌화를 이뤄야 한다. 길은 하나다.


글 권오준·박진영·이윤경 기자, 이심기 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정회윤 한국금융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