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경방 사장의 ‘The Classic’ 3rd

베토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지만, 베토벤을 ‘진짜’ 아는 이도 많지 않다.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이겨낸 음악의 성인(樂聖)’이 모두가 아는 베토벤이라면 혁신가이자 선구자, 노력하는 천재이자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그의 모습은 아는 사람만 안다. 필자의 삶이 그러했듯이,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시공과 문화를 초월해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줄 베토벤이라니 요즘 말로 단언컨대 ‘불멸의 베토벤’이다
[CLASSIC ODYSSEY] 베토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고했던 대로, 이번엔 베토벤(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다. ‘음악의 천재’로 불리는 모차르트와는 또 다른 천재였던 베토벤. 필자는 그 ‘또 다른’에 방점을 찍고 싶다. 위대함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 고백컨대 필자는 베토벤의 광팬, 시쳇말로 베토벤에 ‘미친’ 사람이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 그것도 200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하는 사람을 그토록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베토벤을 너무나 사랑한 한 남자의 고백
베토벤 음악에 ‘입문’한 건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회에서 말했듯 클래식 마니아였던 아버님이 ‘교향곡이란 이런 것’이라며 처음 들려준 곡이 바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었다. 누구나 ‘운명’ 하면 떠올리는 그 인상대로 필자와 베토벤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강렬하게 시작됐다. 베토벤이 삶에 끼친 영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아버님과의 연결고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함께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얘기하며, 어떤 날은 게임도 했다. 베토벤 음악을 듣고 지휘자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식이었다. 그날의 일화는 이랬다. 아버님이 말하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알겠는데 다른 지휘자의 연주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끝에 어린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카를 뵘의 연주는 맞출 수 있어요.” 놀란 눈을 한 아버님은 당장에 네 곡을 틀어주고 카를 뵘의 연주를 맞춰보라고 했다. 맞췄느냐고? 물론.

그렇게 첫 시작부터 베토벤에 푹 빠져들었던 필자는 중학교 시절, 한때 베토벤을 ‘끊은’ 적이 있다. 공부는 안 하고 베토벤 음악만 듣고 있으니 부모님 입장에선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급기야 아버님은 “내가 잘못한 것 같다”는 고백과 함께 ‘음악 금지령’을 내렸다. 당신도 앞으로는 듣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덧붙여서. 그렇게 필자의 인생에서 베토벤 음악은 ‘암흑기’를 맞이하는가 싶더니, 대학에 입학하면서 더 강렬하게 불이 붙었다.

헌데 그의 음악이 좋아질수록 궁금했다. 도대체 한 사람의 음악을 이렇게 몇십 년 동안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을까. ‘왜 그럴까, 매력이 뭘까’라는 자문은 ‘베토벤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고 그때부터 관련 책, 다큐멘터리, 악보 등 온갖 채널을 동원해 공부를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의 음악으로부터였지만, 인생사를 알면서 점점 더 빠져들었다.

베토벤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그는 유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행복했던 시절이 단 한순간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궁정 가수였지만 술주정뱅이에 폭력 가장이었다. 베토벤에게 음악을 가르친 이는 아버지였지만 유년 시절의 불행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유일한 안식처는 어머니였으니 음악의 정서는 어머니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베토벤이 22세 되던 해에 모든 음악가들이 모인다는 빈으로 간 그는 하이든의 제자가 된다. 여러 기록상 인간적으로 그리 가깝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은 사실 음악 성향도 너무나 다르다. 하이든이 순종적이라면 베토벤은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베토벤이 음악가로 막 자라나기 시작한 20대 중반에는 모차르트나 하이든과 비슷한 음악들을 내놓는다. ‘교향곡 1번’과 ‘피아노 콘체르토 1번과 2번’이 그렇다. 물론 베토벤다운 건 분명 있으니, 거기에는 그가 속해 있던 시대적 영향도 있었다. 당시는 음악적으로 피아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있었고, 궁정에서 챔버 형태로 연주되던 클래식 음악이 콘서트홀 연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케스트라 연주 구성이 늘어난다는 음악적 변화도 있지만, 안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들이 몰락하고 자본가가 등장하면서 귀족의 지원을 받아왔던 음악가들이 적응하기 힘들었던 시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비극의 정점, 위대함이 발현되다
베토벤이 귀가 먹기 시작한 것은 약 25세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베토벤의 위대함은 비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30세 이후, 그러니까 1800년부터가 어쩌면 본격적이다. 아이러니한 건 바로 이 시기 베토벤다운 색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피아노 협주곡 3번’, ‘운명 교향곡’, ‘월광 소나타’ 등을 발표하며 점점 그의 음악이 무르익어갈 무렵 난청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작곡만으로는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 귀족들에게 곡을 의뢰받거나 연주를 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그에게 난청은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비루한 삶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다. 설령 상상으로 작곡을 할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여기서 바로 초반에 필자가 언급한 ‘모차르트와는 다른’ 베토벤의 천재성이 나온다. 모차르트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멜로디가 샘솟는 천재였다면, 베토벤은 다른 면에서 천재였다. 쉽게 작곡하는 스타일이 아닌 베토벤은 아주 단순한 모티브를 발전시키고 또 발전시키는 데 천재였다. 이 ‘디벨로핑(developing)’은 천재성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수없이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는 자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곡을 완성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렇게 듣는 것 자체가 작곡의 한 과정이었으니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그런 면에서 지극히 인간적으로까지 다가온다. 베토벤은 32세에 유서를 쓰고 자살 결심을 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그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덧붙여 필자는 베토벤이 기본적으로 도덕성이 강한,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의 음악에서도 드러나는데, 일례로 그가 평생 동안 딱 한 곡을 남긴 오페라 ‘피델리오’를 보자. 당시 대부분의 오페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19금’ 드라마들이었다. 그러나 ‘피델리오’는 정치범으로 수용된 남편을 구출해내는 아주 ‘윤리적인’ 이야기다. 누구의 요구도 아닌, 자신의 철학을 기반으로 완성된 ‘피델리오’는 그러나 그 어떤 오페라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니 여기서 또 한 번 베토벤의 천재성이 입증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아니었다면 그 위대함은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맞는 얘기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노력하고 노력했다는 사실도 그렇고, 음악 안에 사람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자신의 생을 원망하지 않고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승화한 사람, 고통을 견뎌가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사람, 베토벤의 진짜 위대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분노를 분노로만 끝내지 않았다는 것.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후, 사람들이 베토벤은 이제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교향곡 9번 합창’에는 사랑과 미움, 분노와 좌절, 그리고 희망까지 그의 모든 인생이 담겨 있다.

‘합창’을 발표한 후 3년 뒤 베토벤은 고단했던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이토록 특별한 사람이듯,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베토벤의 영향력은 계속 될 테니까. 과연 ‘불멸의 베토벤’이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늘 새로운 시도를 써나갔던 혁신가 베토벤이 이미 후세를 생각한 곡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합창 교향곡’ 이후 발표된, 그의 유작이 된 현악 사중주는 당시론 거의 현대음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여러분들이 들을 곡이 아닙니다. 후세들이 들을 곡이지요.” 이런 베토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 필자는 베토벤이 너무나 그립다.


정리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