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희 한국허벌라이프 대표

무릇 한 기업의 대표라면 사랑과 믿음으로 회사를 이끈다. 그런데 여기, 유독 회사 사랑이 지극한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처음 입사해서는 돈을 받지 않고도 일하고 싶었을 만큼 좋았고, 지금은 평생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애착이 간다는 정영희 한국허벌라이프 대표다. 정 대표는 글로벌 뉴트리션 기업 한국허벌라이프의 매출을 16년 만에 전 세계 88개 진출 국가 중 3위, 14개 아시아태평양 국가 중 1위에 올려놨다. 이러한 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정영희 대표는… 1959년생. 1987년 미국 미네소타대 졸업. 1996년 한국허벌라이프 입사. 2006년~ 한국허벌라이프 사장. 2010년~ 한국허벌라이프 및 필리핀허벌라이프 사장 겸임.
정영희 대표는… 1959년생. 1987년 미국 미네소타대 졸업. 1996년 한국허벌라이프 입사. 2006년~ 한국허벌라이프 사장. 2010년~ 한국허벌라이프 및 필리핀허벌라이프 사장 겸임.
‘꼭 맞는 옷’ 허벌라이프, 인연을 만난 듯 ‘찌릿’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정영희 대표가 허벌라이프를 만나게 된 건 1994년. 미국 미네소타대를 졸업하고 미국인 남편을 만나 현지에 정착해 살던 그는 2년, 한국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할 만한 일을 찾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기업들이 여성 인력 채용을 꺼리던 분위기라 그는 고학력자임에도 이력서 대부분을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한 컨설팅 업체로부터 소개받아 어렵사리 입사하게 된 한국허벌라이프. 그저 여성을 관리자로 채용해주어 고마운 회사로만 생각했던 이곳은 의외로 ‘몸에 꼭 맞는 옷’이었다. 김 대표는 자신의 성격, 가치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회사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기업의 핵심 미션인 ‘체인징 피플스 라이프(changing people’s life)’처럼 삶을 변화시켜 주는 회사였다. 과학적으로 설계된 영양식품으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주는 데다, 차별 없이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돈 벌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다.

“당시 처음 맡았던 직무가 세일즈 커뮤니케이션이었어요. 회원들을 위해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해주는 부서에서 일하며 허벌라이프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바뀌어가는 모습을 봤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이 분야에 많이 뛰어들었는데, 그들 모두 피땀 흘려 정직하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것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무척 보람을 느꼈어요. 돈을 받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세일즈 커뮤니케이션팀 과장으로 입사한 정 대표는 불과 한 달 만에 부장이 됐다. 파격 승진이었다. 미국계 기업의 특성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열정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회사에 대한 믿음은 더욱 또렷해졌다. 조직 내부에서는 여성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2년만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가겠다는 애초 계획은 무산됐다.

“인연을 만났을 때 불꽃이 튀는 느낌 아세요? ‘평생 다닐 회사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죠. 실력이 부족했을지언정 열정은 넘쳤습니다. 때때로 남성 직원들과 대립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회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버텼지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혼잣말을 많이 했는데, 그만큼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했던 것 같아요.”(웃음)

정 대표가 회사를 위해 신혼여행, 임신까지 모두 뒤로 미룬 일화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행사를 한국지사에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글로벌 회장님을 직접 의전하고 싶었는데, 배가 부른 채로 맞이하긴 싫었어요. 그때 제 나이 38세였고, 남편도 아기를 몹시 원하는 상황이었지만 양해를 구했지요. 그런데 일정에 차질이 생겨 회장님은 결국 4년 만에 한국에 오셨어요. 결국 4년 동안 임신을 미뤘고,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난 뒤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졌어요. 마흔 둘이라는 어마어마한(?)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웃음)


회사 위해 신혼여행·임신 미뤄
이처럼 극진한 회사 사랑으로 그는 2006년 11월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고전하던 회사 매출을 정상화시켰고, 이후로도 지금까지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이끌었다. 한국허벌라이프는 16년 만에 전 세계에 진출한 88개 국가 중 3위, 14개 아시아태평양 국가 중 1위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정 사장은 “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진정성 하나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회사와 제품을 판매·유통하는 회원(개인사업자) 간의 신뢰가 그 어떤 곳보다 중요하다. 특히 여성 회원들이 많은데 그들과의 진심어린 교감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정 대표는 ‘진심 경영’이 통했다고 자평했다. “회원과 회사가 한 몸이 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데 회사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예컨대, 회원들이나 소비자가 함께 모이는 행사에는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회사를 경영하는 CEO이지만, 좋은 일은 나누고 슬픈 일은 함께 아파해주며 회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왕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타인의 건강을 챙겨주며 돈까지 벌 수 있잖아요.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상대를 도와주면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메커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초창기에 몸뻬를 입고 회사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들이 지금은 잘나가는 리더가 돼 당당하게 스피치를 합니다. 그야말로 한 인간을 성장시켜 주는 브랜드죠.”

그러나 네트워크 마케팅 기업이 여전히 ‘다단계’라는 부정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다. 정 대표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동시에 보다 확실한 제품력 검증을 거치겠다는 각오다. 그는 “허벌라이프 전 제품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제조품질 관리 기준을 따르며 지난해에는 국내 보건산업진흥원로부터 주력 제품 ‘포뮬러1 뉴트리셔널 쉐이크 믹스’에 대해 국내 최초로 GH(Goods of Health) 인증마크를 획득했다”며 “소비자들에게 제품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균형 잡힌 몸매 비결 ‘볼륨댄스’…은퇴 후 재능기부 할 것
지난해부터 필리핀 법인도 함께 이끌고 있는 정 대표는 한 달에 절반인 15일 이상 해외에 머문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정에도 그는 매사 여유와 활력이 넘친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탄탄한 근육과 구릿빛 피부는 5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그는 평소 균형 잡힌 식단은 물론 엄청난 양의 운동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한다. 해외출장 갈 때 여권보다 먼저 챙기는 것은 허벌라이프 제품들이다.
[POWER OF THE WOMAN] “남 밟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철학에 매료”
“아침에는 무조건 셰이크를 먹어요. 16가지 비타민, 무기질, 허브와 식이섬유가 함유된 ‘포뮬러1 뉴트리셔널 쉐이크 믹스’는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죠. 하루 두 끼는 정상적으로 식사를 합니다. 칼슘, 철분 등 각종 영양제도 빠짐없이 챙기고요.”

정 대표는 “마흔 둘에 4kg대 아이를 자연분만 할 수 있었던 것도, 50대에 30대의 생물학적 나이를 지닐 수 있는 것도 제품을 꾸준히 먹은 덕분”이라며 웃었다.

그의 균형 잡힌 몸매의 비결은 또 있다. 바로 20년 넘게 추고 있는 춤이다. 어릴 적부터 검도, 승마, 테니스 등 각종 운동을 섭렵한 그는 대학시절 춤에 매료됐다. 아무리 피곤해도 몇 시간이고 춤을 추고 나면 피로가 싹 가신다. 결혼 전에는 주로 ‘디스코’와 같은 막춤을 많이 췄고, 6~7년 전부터는 남편과 볼륨댄스를 배우고 있다.

“자이브, 룸바, 차차차, 왈츠, 탱고, 삼바 등 여러 종류가 있어요. 볼륨댄스는 공간 제약이 없고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죠. 치매 예방을 돕는 것은 물론 부부가 함께 즐기면 사이도 돈독해진답니다.”

직원들에게도 “젊을 때 일만 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떻게든 빨리 퇴근해 가치 있는 자신만의 일을 찾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고.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한편으론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일은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다른 사람들도 건강하게 해줄 수 있잖아요. 회사 차원의 봉사나 나눔 활동이 활발한 편인데, 직원들에게도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가 한국에 머물기로 했던 2년은 어느새 20년이 됐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시간이건만, 정 대표의 일편단심 회사 사랑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몸담고 싶은 회사지만, 그도 서서히 은퇴 이후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해 의미 있게 활용하는 것, 그래서 영원한 여성들의 ‘멘토’로 남는 것이 60대 이후 정 대표의 꿈이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