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IREMENT PENSION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한 마디로 깐깐하고, 합리적이고, 정책 변화에 민감하고, 노후 준비에 자조적이고, 시장의 공정성을 원하는 소비자가 금융 시장을 선도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의 모습이 어찌된 일인지 연금 시장에서는 그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다.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 덤덤한 연금 가입자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삶의 팍팍함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저금리, 저성장, 고령화라는 2저1고 시대가 고착화되는 가운데 부동산 경기 침체, 가계 부채 급증 등이 맞물리면서 현재와 미래의 삶 모두 팍팍함에 묻혀버린 듯하다. 요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둘러보면 사면초가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항우처럼 마음을 놓아버리면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요즘 소비자들은 항우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른바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서 분석한 ‘2012년 금융 소비자 트렌드’라는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연구소는 2012년 금융 시장 5대 트렌드를 ‘SMART’라는 말로 압축해 내놓았다.

SMART는 까다롭고 꼼꼼하게 따지는 금융 소비자(Strong need for more), 적정하게 관리된 위험하의 수익 추구(Managing risk & return), 세금 및 정책 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Active response to policy), 불안한 미래를 대비한 자립형 노후 준비(Ready for retirement), 금융회사의 공공성 및 신뢰성 요구 확대(Trustworthy finance) 등 5가지 트렌드의 영어 앞 글자를 따온 것이다. 한 마디로 깐깐하고, 합리적이고, 정책 변화에 민감하고, 노후 준비에 자조적이고, 시장의 공정성을 원하는 소비자가 금융 시장을 선도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금리가 낮아지면서 퇴직연금에서 제공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 역시 떨어지고 있다.



시장과 상황을 고려한 연금 상품 선택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는 우리나라 금융 시장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금융의 수요자인 소비자가 스마트해지면 금융의 공급자인 금융회사와 금융 시장의 구조를 설계하는 정부 모두 현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의 팍팍함이 낳은 한줄기 빛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 빛이 미치는 범위가 제한적인 것 같다.

그런데 ‘꼼꼼하고 따지는 금융 소비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연금 시장에선 그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다. 머리카락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다. 과연 노후 준비가 꼼꼼하고 따지면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사기 위해 여러 차례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처럼 연금 상품을 구매할 때에도 시장과 자신의 상황을 고려한 선택이 필요하다. 과연 그런가. 강제 제도인 국민연금을 제외하고 소비자에게 많은 선택권이 부여돼 있는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시장을 살펴보자.

먼저 퇴직연금 시장을 살펴보자. 퇴직연금은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느냐에 따라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으로 나뉜다. DB형은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지는 데 반해 DC형은 가입 근로자가 책임을 진다. 책임 지는 쪽이 과실도 가져가는 구조다. 즉 운용 성과가 좋으면 DB형에서는 그 과실을 기업이, DC형에서는 근로자가 가져가는 것이다.

적립금은 원리금보장형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된다. 그런데 두 상품의 투자 비중 추이를 보면 퇴직연금 가입자는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12월 말 현재 약 67조 원의 퇴직연금 적립금 중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들어 있는 자금이 93.1%인 반면에 실적배당형에 투자된 자금은 5.1%에 불과하다. 나머지 1.8%는 어느 곳으로 갈지 기다리고 있는 대기 자금이다. 3년 전인 2009년 12월 말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비중은 85.3%였다.

이것이 무조건 문제라 볼 수는 없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형성된 과열 경쟁의 결과 다른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비해 더 높은 이율을 보장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금리가 매우 낮은 상황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기도 하다. 시장금리가 낮아지면서 퇴직연금에서 제공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 역시 떨어지고 있다. 한때 8% 이상까지 치솟았던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는 4% 중반까지 떨어졌다. 반면에 실적배당형 상품의 업권별 상위 5개사 평균수익률은 6.72%에 달한다. 그럼에도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비중이 더 높아만 가는 게 퇴직연금 시장의 현실이다.
스마트한 금융 소비자 덤덤한 연금 가입자
수익률 높을수록 가입건수 적어

개인연금 시장은 어떨까. 세제적격 개인연금인 연금저축은 국민연금, 퇴직연금과 함께 고령화 시대에 꼭 필요한 노후 대비용 상품이다. 하지만 2011년 국세통계연보에 의하면 전체 근로자의 가입률은 15.4%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낮은 편이다. 2012년 6월 말 현재 금융권역별 가입건수를 보면 보험사 연금저축보험의 비중이 80.4%로 압도적으로 높다. 다음으로 은행의 연금저축신탁이 15.4%, 자산운용사의 연금저축펀드가 4.2%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10년간 누적수익률을 보면 상황은 반대다. 은행의 연금저축신탁의 경우 채권형은 41.54%, 안정형은 39.76%인 반면에 자산운용사의 연금저축펀드는 채권형이 42.55%, 혼합형이 98.05%, 주식형이 122.75%를 기록했다. 보험사의 연금저축보험은 생명보험사가 39.79%, 손해보험사가 32.08%였다. 수익률과 가입건수를 비교해보면 수익률이 높을수록 가입건수가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시장에서 발생한 일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금융 소비자는 점점 더 스마트해지는데, 연금 가입자의 행동은 저금리와 수익률에 너무나 덤덤하다.

최근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금리가 3~4% 이하로 떨어지면 일정한 이자소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원금은 급속히 증가한다고 한다. 이 지점을 ‘금리 티핑포인트’라 하는데 우리나라는 2004년 카드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두 차례 금리 티핑포인트에 빠진 적이 있었다. 2004년의 경우에는 약 2년 만에 빠져나왔으나, 2008년의 경우는 지금까지 헤어나지 못한 채 금리가 티핑포인트 하한선을 들락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 가입자가 계속 시장 변화에 덤덤한 반응을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금리가 티핑포인트 이하로 떨어지면 필요한 이자소득을 얻는 데 필요한 원금이 급속히 늘어난다는 데 그 답이 있다. 이처럼 급속히 늘어나는 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안전하다는 이유로 계속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노후 불안을 자초하는 행위다.


일러스트 김영민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