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ODYSSEY

한 컷의 삽화로 뉴욕타임스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타임지의 표지를 뜨겁게 달구면서 세르주 블로크의 명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펜으로 그리는 단순한 일러스트가 아닌 오브제를 이용한 다양한 드로잉 작업을 한다. 일러스트에서 순수미술로 영역을 넓혀가며 자신의 깊이를 더한다.
‘나는 기다립니다’, 2007년,다비드 칼리 글· 종이에 잉크 콜라주
‘나는 기다립니다’, 2007년,다비드 칼리 글· 종이에 잉크 콜라주
세르주 블로크(Serge Bloch·1959~ )의 일러스트는 따듯하다. 펜은 날카롭지만 펜 끝의 자국은 여리다. 동화처럼 가볍고 풍선처럼 부드럽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안방을 훈훈하게 만들었던 TV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주인공 김도진과 서이수를 이어주는 운명의 빨강 실도 블로크의 일러스트 ‘나는 기다립니다…’의 빨강 실 드로잉에서 비롯됐다.

부드러운 실타래의 실 한 가닥이 사람들에게 ‘기다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가슴 뭉클하게 일깨워 주었다. 아이는 잠들기 전 엄마가 다가와서 뽀뽀해 주기를 기다리고, 케이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사이로 아이의 표정은 세상의 선악과 법도와 가치를 떠나 오직 하나의 소박한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이 자라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나기를 기다린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서 성장한 자식들의 안부전화를 기다리고 새로 태어날 손자를 기다린다. 기다림의 순수만이 지면을 가득 채운다. 블로크의 산만한 덩치도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끝의 온기로 작아지고 사람들의 바다 같은 욕망도 여린 실 한 가닥으로 마음이 열린다.

블로크는 아이다. 아이처럼 천진하고 어른처럼 유치찬란한 그의 일러스트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천진하게 보이는 순진한 일러스트지만 한 컷의 삽화로 뉴욕타임스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타임지의 표지를 뜨겁게 달궜다. 그의 감각은 파리의 에펠탑보다 더 뾰족하고 그의 지성은 바이마르 괴테의 철학보다 더 냉정하다.
‘가이#2’ , 2013년, 나무에먹한지 아크릴릭,10×10×30cm
‘가이#2’ , 2013년, 나무에먹한지 아크릴릭,10×10×30cm
블록 오브제

블로크는 1959년 프랑스 콜마르에서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며 아이들의 창작동화와 신문 광고의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르 피가로,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WSJ), 워싱턴 포스트 등 세계적인 권위의 신문과 시사주간지 타임의 삽화와 표지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명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펜으로 그리는 단순한 일러스트가 아니고 실, 우표, 인장, 물감, 나무, 블록 등 오브제를 이용한 다양한 드로잉 작업을 한다.

그는 나무 블록바탕에 제소(gesso)를 칠하고 한지를 붙인 다음 먹으로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의 성이 블로크(Bloch)다. 프랑스어의 ‘bloc’이나 영어의 ‘block’ 모두 쌓아올리는 장난감을 의미한다. 자기 이름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블록 작품을 만든 것이다. 세 덩어리로 나눈 블록은 각각 인체의 다른 부분을 그린 것으로 쌓거나 벌려 놓으면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일러스트에서 순수미술로 영역을 넓혀가는 그의 작업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깊이를 더한다.
‘프레베르의 노래와시’ , 2008년,종이에 잉크 콜라주 아크릴릭
‘프레베르의 노래와시’ , 2008년,종이에 잉크 콜라주 아크릴릭
일러스트의 힘

한 컷의 일러스트는 촌철살인의 힘이 있다. 그림 한 컷으로 세상을 들어다가 놓고 심금을 울리고 웃게 한다. 기사를 읽지 않고 그림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어야 좋은 일러스트다. 훌륭한 일러스트 작가는 그만큼 시사와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 유머와 위트는 필수다. 유머가 없으면 순진하지 않고 위트가 없으면 날카롭지 못하다. 유머와 위트는 집중력과 순발력으로 단단해진다.

작가의 풍부한 경험이 그림을 부드럽게 하고 연륜과 세월이 감각을 선연하게 한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을 일러스트 작가의 눈과 손을 통해 얻는다. 그게 일러스트의 본부요 선이자 미다. 나는 블로크의 일러스트가 좋다. 그가 그린 단순한 선 몇 개와 단순한 이미지 몇 컷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같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위스 아동문학가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쓰고 블로크가 그림을 그린 책 ‘적(L’ennemi)’이다.

‘적’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적들의 이야기다. 전쟁이 시작되는 날 받았던 총과 전투지침서에 적은 잔인하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우리 가족을 죽이고 개를 죽이고 동물이란 동물은 모조리 죽이는 잔인한 놈들이고 나무도 불태우고 마시는 물에도 독을 타는 ‘인간이 아닌’ 잔인한 동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참호를 파고 들어가 적을 죽이고 적이 죽어야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티는 ‘나’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적의 참호에서 나와 똑같은 적의 전쟁지침서를 발견한다. 적의 지침서에 나와 있는 적의 얼굴은 바로 ‘나’였다. “그렇지 않아, 나는 괴물이 아니야.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어. 나는 인간이다. 여기에 적힌 것은 온통 거짓이야!” 비로소 적과 나는 똑같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인간임을 안다.

“밤이면 참호 위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별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저 위에서 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다. 때로는 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도 저 별을 보고 있을까?’ 그날 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적’ , 2007년,다비드 칼리 글·종이에 잉크 콜라주
‘적’ , 2007년,다비드 칼리 글·종이에 잉크 콜라주
전쟁의 비극적 이야기를 블로크는 긍정의 힘으로 그려냈다. 그는 잔인하거나 두려움을 주지 않고 측은하고 따듯하게 적을 그렸다. 적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통해 아이들에게 휴머니티와 전쟁의 비극을 일깨워준다. 헤밍웨이의 비극적 전쟁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화려한 수사와 심오한 철학이 담긴 어른의 책과는 사뭇 다른 몇 마디의 단어와 몇 컷의 그림으로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블로크 일러스트의 힘이다.
‘프레베르의 노래와시’ , 2008년,종이에 잉크 콜라주 아크릴릭
‘프레베르의 노래와시’ , 2008년,종이에 잉크 콜라주 아크릴릭
블로크가 그린 ‘프레베르의 노래와 시’는 시에 그린 일러스트다. 시를 읽고 이해하는 시의 세계를 그림으로 풀어 시로 바꾼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하나다. 좋은 경치를 보고 시상이 떠오른다고 하고 시를 읊으면 경치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 그 말이다. 책을 펼치면 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된다.

먹선과 블루 잉크의 조화, 신문지, 도장 오브제의 신선한 도입, 단순하고 과장된 유머와 위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신선하게 펼쳐진다. 누군가 그의 일러스트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작품이 존재하다니…. 꼭 무언가를 다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 다 보이는 듯 하는 느낌이다”라고 감탄어린 멘트를 남겼다. ‘사랑스럽다’는 블로크의 인간적 따듯함의 발로다.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쓰고 블로크가 그림을 그린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는 글보다 그림이 더 시적(詩的)이고 그림보다 글이 더 일러스트적이다.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일요일 아침, 아직 잠들어 있는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그림 속에는 손으로 찢은 종이에 얼굴 맞댄 연인의 행복한 모습을 몇 가닥의 선으로 그어 놓고 둘만의 사랑을 핑크빛 꽃송이로 표현했다.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2007년, 다비드 칼리 글·종이에 잉크 콜라주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2007년, 다비드 칼리 글·종이에 잉크 콜라주
행복은 많은 수사와 많은 장식이 필요 없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 세상에 너와 뽀뽀하고 싶은 곳들이 수도 없이 많아. 베니스, 도쿄, 비엔나, 뉴욕, 상하이, 바르셀로나, 레이캬비크, 런던….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블로크의 일러스트는 둥근 지구를 하트형 지구로 만들고 지구 위에서 연인은 뽀뽀를 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사랑이다.

일본의 방송작가 코야마 쿤도가 쓰고 블로크가 그린 ‘숫자가 말해주는 당신의 인생’은 오월 어린이날의 완결판이다. “방금 태어난 여자아이의 키는 50cm, 체중은 3kg, 몸속에는 9만9000km 지구 두 바퀴 반의 모세혈관이 있습니다”로 시작해 “태어나서 최초로 좋아하는 것은 엄마의 가슴. 아이는 성장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가 모두 든 젖을 3개월에 92리터 마십니다. 그래서 체중은 6킬로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블로크의 일러스트는 엄마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안고 있다.
‘숫자가 말해주는 당신의 인생, 2010년,코야마 쿤도 글·종이에 잉크콜라주
‘숫자가 말해주는 당신의 인생, 2010년,코야마 쿤도 글·종이에 잉크콜라주
그렇게 성장한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루에 2만 번 평생 5억8400만 번 깜빡이고, 앙금앙금 기어다닌 아이는 14개월 됐을 때, 두 다리로 걷게 되고 드디어 세상에 존재하는 6000개의 언어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하게 되고, 2시간마다 새로운 단어를 하나씩 배우고, 처음으로 배운 말은 ‘엄마’다.

엄마는 하트가 되고 아이의 코는 벌름거린다. 엄마는 아이의 부름에 고맙고 감격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표시를 한다. 세상에 가장 사랑스러운 단어가 엄마요, 세상에 가장 불행은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한 아이다. 블로크는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별, 지구를 아이가 부른 엄마의 하트로 그려놓았다.
세르주 블로크, 2013년, by최선호
세르주 블로크, 2013년, by최선호
블로크의 심미안

지난해 여름, 나는 블로크와 함께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그는 말이 없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다. 안동 종택 후조당 사랑 대청마루에서 불어오는 여름의 시원한 바람을 오전 한나절 가만히 즐겼다. 누워 책을 보기도 하고 서서 앞마당을 걷기도 했다. 시간이 잠시 멈추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가옥에 담긴 자연과 사람의 온기를 온몸으로 읽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안동한지공방에 들렀다. 인사동 한지가게에서 완성된 종이만 보았던 그는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는 수공의 현장을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자리를 뜨면서 몇 종류의 한지를 한 아름 샀다. 파리로 돌아가 그는 거기에 일러스트를 했다. 대나무 펜으로 먹을 찍어 안동 한지에 그린 그의 일러스트는 전 세계 독자의 눈을 행복하게 했다. 그의 조용함은 큰 울림의 반향이었고, 그의 일러스트는 작은 드로잉의 결과였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깊게 움직였을까.

블로크가 다시 서울에 왔다. 그는 평창동의 작은 골동품 가게로 갔다. 그가 만난 조선의 민화는 그의 눈을 다시 사로잡았다. 해학과 익살이 넘치는 순수 서민 장식 그림은 그에게 궁중의 화려한 의식 그림보다 더 화려하게 빛났다. 그는 제주도 문자도에 익살로 넘치는 잉어의 튀어 오름과 충성할 충(忠)자의 가운데 중에 들어가는 새우의 추상적 표현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1시간 남짓 이것저것 화조와 산수 낱장과 병풍을 자세히 보더니 무심한 산수 한 장을 골랐다. 금강산 그림이었다. 바위산에 구름이 걸리고 인물처럼 생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친 영락없는 금강산 만물상 그림이었다. 그는 그 그림을 선뜻 샀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일러스트가 조선 민화와 뿌리를 같이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비쳐졌다.
2012년 타임지에 실린 종이에 잉크 사진
2012년 타임지에 실린 종이에 잉크 사진
그가 본 대문의 거북이 빗장의 해학과 그가 공들여 고른 전라도 나주소반은 파리의 어느 명품이나 런던의 어떤 앤티크보다 더 순수한 미감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안목과 취향으로 자신의 미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심미안을 보았다. 블로크의 쉽고 편한 일러스트 이미지는 파리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책장 전체를 드로잉 북으로 가득 채우고 책상의 서랍과 서랍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미지 자료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나는 그의 파리 작업실에서 보았다. 쉽게 보이기까지 그는 어렵게 드로잉하고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본 수많은 사물과 그가 만난 수많은 인상은 자신만의 독특한 일러스트의 세계를 만들었다.

빨강 실 하나로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기다리고, 단순한 선 몇 가닥으로 세상의 고통과 행복을 그려내었다. 블로크의 일러스트는 그림으로 그려낸 삶의 MRI다. 층층이 담긴 시각 세상의 언어는 모두 그의 일러스트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