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구속’과 ‘제약’이란 단어는 아예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금기가 가득했던 상상력 부재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면서도 파격적인 창작물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

타고난 ‘팔자’인 그림에 선천적 ‘재능’인 글쓰기까지, 행복한 예술가를 자처하는 황주리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글 쓰는 화가 황주리 “상상과 실험이 주는 무한 행복”
화가 황주리의 이름 앞에는 ‘스타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맞는 말이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홍익대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2년, 파리 앙데팡당전에서 수상한 후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줄곧 스타 작가의 길을 걸었다.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회화 세계’가 그의 작품에 대한 한 줄 설명. 그러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가 하면 냉철한 비판론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도 하고, 유쾌하고 발랄한 감성이 드러나는가 하면 더없이 쓸쓸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상상력과 창작열만큼은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30년 관록의 화가가 늘 젊은 작품들을 내놓는 배경이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던 황 작가는 몇 해 전 동부이촌동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맨션의 바로 옆집에는 팔순이 넘은 노모가 딸의 작품들과 함께 살고 있다. 복도 여기저기에 놓인, 때로는 캔버스를 대신하는 커다란 돌들이 작가의 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식물학,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식물학,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그림과 글로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내다
요즘도 서울과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하세요.

“거의 서울에 있어요. 그 대신 동남아를 많이 다니죠. 불교 미술에 관심이 많거든요.”

작업실 곳곳에는 다양한 부처상이 그려진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에게 여행이란 예술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2012년도에는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하셨죠. ‘그리고 사랑은’이라는 첫 번째 그림소설이 나왔고, 개인전에 단체전까지 전시도 많았잖아요.

“그랬죠. 2012년 6월에 했던 ‘사랑의 풍경’ 전은 28번째 개인전이었는데, 그림소설을 출간하면서 출판기념회를 겸해 기획한 전시였어요. 언젠가 피카소의 전시 중 ‘우는 여자’라는 타이틀을 단 전시가 있었는데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거기에 착안한 기획이었는데 ‘사랑’을 주제로 아주 젊은 관객부터 나이든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동안 에세이는 많이 냈지만 그림소설 출간은 의미가 좀 달랐을 것 같아요.

“나에게 글이란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또 다른 수단이에요. 에세이는 내가 겪은 것 외에는 말할 수 없고 섬세한 주제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는데 소설은 다른 주인공을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다는 자유로움이 있어서 좋았어요. 또 하나 소설을 쓰면서 깨달은 건 어떻게든 얽혀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전보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식물학, 2010, 캔버스에 아크릴릭, 153×122cm
식물학, 2010, 캔버스에 아크릴릭, 153×122cm
황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 원래부터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글쎄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도 몰랐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것보다 관찰자나 구경꾼의 시선을 더 즐겼던 것 같아요. 그게 그림으로 나타났던 거겠죠.”

무명시절이 없었던 걸로 압니다. 줄곧 스타 작가로 사셨죠.

“20대 중반에 알려졌으니 빨랐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첫 개인전을 1981년에 했는데 외국으로 루트가 뚫렸어요. 그래서 국내에서도 빨리 자리를 잡은 거예요. 아쉬운 일이지만 아직도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으면 국내에서 좀 더 쳐주는 경향이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나를 젊은 작가로 생각하고 왔다가 실물을 보곤 놀라기도 해요.

작품만 보고 굉장히 젊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죠. 교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형식을 많이 실험해왔는데, 그게 곧 안 늙은 작가가 된 비결인 것 같아요. 나 이전 세대는 교직에 있었던 게 명예였다면, 우리 세대는 교직이 곧 밥벌이였기 때문에 그걸 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작가가 많지 않았거든요.”

슬럼프는 없었나요.

“분명 있었을 거예요. 남들이 나를 찾지 않을 때, 전시도 뜸하고 그럴 때가 침체기인건데,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때야말로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기였던 거죠. 내 마음의 키가 크는 시기 말이죠.”

황 작가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정확히 본 거예요. 내가 그런 사람이에요. 왜 가장 현실적인 것도 거리를 두고 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한 꿈이 되고 그렇잖아요. 순간순간은 결코 반복되지 않기도 하고 말이죠. 내 그림을 보고 평화롭다, 사랑스럽다고도 하는데 그것도 트릭이죠. 흑백 그림엔 슬픔도 있고, 또 밝음 안에 슬픔도 있고 그래요.”
식물학,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식물학,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실험과 파격을 즐기는 행복한 화가
황 작가님을 두고 ‘한국 미술계의 전형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들을 하기도 해요.

“우리 시대 이전은 상상력 부재의 시대거든요. 어릴 때부터 튀면 절대로 안 됐어요. 그림을 전공하는데도 학교에서조차 어떤 색깔은 쓰지 말라고 하고, 입는 옷조차 조금만 튀어도 이상하게 쳐다봤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저일 겁니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출판사를 하셨고 굉장히 문학적인 분이셨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도 그렇고요. 집안 분위기 자체가 적어도 학교 교육보다는 자유로웠죠.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랐어요. 집에선 뭔가를 강요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에 비하면 학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었죠.(웃음)”

양쪽의 괴리감이 컸겠는데요.

“그래서 학교를 잘 안 갔어요.(웃음) 학교 앞에 클래식 다방이 많았는데 거기서 살았죠. 그림 작업은 집에서 했고요. 수업은 겨우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 정도로만 참여했죠.”

글을 쓰시게 된 배경이 집안에 있었군요. 문학이 그림에도 영향을 끼쳤나요.

“당연히요. 문학적 소양이나 유전자, 그리고 책을 많이 읽었던 경험 때문에 사물의 깊이를 볼 수 있었죠. 나무를 나무로만 보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보는 연습이라고 할까. 그런 훈련이 많이 돼 있었던 거겠죠.”

지난 30년간 작품 세계가 달라지기도 했을 텐데요.

“그림도 글로 표현하면 에세이에서 소설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로부터 타인들로, 더 깊고 넓게 확장이 되고 있는 거죠. 사진과 같은 다른 매체와 결합하는 것도 최근 10년 안쪽의 변화예요.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과 함께 쉽게 카메라를 다루게 되면서 사진의 힘을 빌리는 작업들을 하게 됐죠.

색감도 변했어요. 예전에 쓰던 색이 훨씬 원색인데도 채도가 낮아 무거운 느낌인 반면, 요즘 작품은 색깔의 채도가 높아요. 그땐 지하에 들어가 황금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라면 요즘은 형광 불빛 아래 야광 같다고 할까. 그건 시대적인 컬러이기도 하죠. 작가에겐 처음에 어떤 색을 만났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내 경우엔 색으로 기억되는 게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예요. 내 그림에 노란색이 많은 건 그런 영향이 없지 않죠.”
그대안의 풍경,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46×61cm
그대안의 풍경,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46×61cm
캔버스만이 아니라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시잖아요. 의자나 안경, 돌도 그렇고요. 실험적인 것을 즐기는 편이시죠.

“첫 실험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그게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원고지에 그림을 그렸거든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우리 집에 원고지가 늘 쌓여 있었어요. 휴지보다 더 흔한 게 원고지였죠. 하루는 낙서를 하다가 ‘아, 여기에 글이 아닌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걸 시작으로 안경도 됐다가, 의자도 됐다가 캔버스가 안 되는 게 없었죠. 실험을 즐기니 심심하지가 않아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죠.”

어떤 순간이 제일 행복한가요.

“내 그림을 엉뚱한 데서 발견할 때예요. 나도 몰랐던 건물의 벽이나 어느 카페에 걸린 내 그림을 봤는데 내가 그린 건데도 ‘아, 이 그림 참 좋다’라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롤 모델이 있으세요.

“피카소죠. 피카소는 평생이 전성기였고 죽어서도 전성기였잖아요. 그래서 모든 작가들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피카소죠. 이건 바람인데 내 소원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다 쏟아내고 내 친구 작가들에 대해서도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한마디씩 해주고 그럼 좋지 않겠어요.(웃음)”

황 작가님은 언제가 전성기였는데요.

“이렇게 말하면 얄미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안 왔다고 생각해요, 절대로.(웃음) 사실 작가는 어느 순간이 전성기인 줄 잘 몰라요. 내가 죽은 뒤에 한참 있다가 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그림 다 그리고 있는데 전성기를 꼭 살아서 맞아야 할까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으시죠.

“너무 많죠. 내가 다른 장르를 넘보는 게 있어서 저장량이 많아요. 그걸 한꺼번에 할 순 없고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면서 해야 하거든요. 2년마다 개인전을 할 건데 사실 그건 일상 중 하나고, 소설 쓰는 게 너무 재밌어서 5권쯤 쓰려고 해요. 그렇지만 저는 죽을 때까지 화가예요. 글이나 소설은 나를 이해하는 텍스트인 셈이죠.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 중에 글로 흔적을 남긴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들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요. 내 글들이 그런 흔적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 시대 이전은 상상력 부재의 시대거든요. 어릴 때부터 튀면 절대로 안 됐어요.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저일 겁니다.
우리 시대 이전은 상상력 부재의 시대거든요. 어릴 때부터 튀면 절대로 안 됐어요.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저일 겁니다.
황주리 작가
1957년생. 이화여대 서양화 전공.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학으로 석사 학위.
1991년 뉴욕대학원 졸업. 평단과 미술 시장에서 인정받은 몇 안 되는 작가로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 그림소설 ‘그리고 사랑은’ 등을 펴냈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