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출신의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는 ‘파리의 심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와인메이커다. ‘전설의 100대 와인’을 만드는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그르기치의 이야기다.
그르기치 힐스(Grgich Hills)의 창립자 마이크 그르기치는 1923년 크로아티아의 한 포도 재배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물에 섞어주신 와인을 마시며 자랐던 그는 대학에서 와인양조학을 배우며 와인메이커로서의 밑거름을 쌓았다.

그러나 공산주의 통치 아래서 그는 언제나 불행했다. 1954년 그르기치는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목적지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대학시절 카네기, 록펠러와 같이 자수성가한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것이다.

그르기치는 미국에 가고자 캘리포니아와인협회에 구직광고를 내기에 이르렀고, 마침 이 광고를 본 수버랭 셀라(Souverain Cellars)의 오너 리 스튜어트(Lee Stewart)가 와인메이커 자리를 제안하게 된다. 1958년 그는 마침내 미국 비자를 얻고 나파밸리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수버랭 셀라와 크리스천 브러더스(Christian Brothers) 등 미국 와인의 선구자로 불리는 와이너리에서 경력을 쌓은 뒤 볼리우(beaulieu) 와이너리에서 미국 전설의 와인메이커 안드레 첼리체프(Andre Tchelistcheff)에게 사사했으며, 당대 최고의 와이너리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에서 선임 양조가로 활동했다.
전설의 탄생

그르기치가 세계 와인업계를 술렁이며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976년의 일이다. 그르기치는 1972년부터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의 와인메이커로 일했는데, 그가 만든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Ch. Montelena Chardonnay) 1973 빈티지가 1976년 전설적인 파리의 심판 테이스팅에서 프랑스 부르고뉴의 유명 화이트 와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나파밸리 와인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이민자 그르기치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파리의 심판을 계기로 유명세를 쌓은 그르기치는 이민 20년 만에 자신의 와이너리를 갖고자 했던 소망을 이룩하게 된다. 거대 커피업체를 운영하는 오스틴 힐스(Austin Hills)와 파트너십을 맺고 1977년 그르기치 힐스 와이너리를 설립한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명명한 이 포도원의 파트너십은 가히 이상적이었다.

오스틴은 나파밸리의 심장인 러더포드에 뛰어난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와이너리에 투자할 수 있는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르기치는 뛰어난 양조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들은 초기 생산부터 인정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르기치가 예술작품을 만들듯 공을 들인 샤도네이는 ‘샤도네이의 제왕(king of chardonnay)’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한편 1976년 파리의 심판 이후 놀라운 사건 하나가 더 벌어졌으니, 바로 1982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 때의 일화다.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에게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 1979를 따랐고, 이를 본 파리의 호사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 본토에서 프랑스 대통령에게 미국산 와인을 처음으로 따른 이 사건은 세계 최고 와인 본고장의 자부심에 대한 도전이자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가 세계인에게 각인되는 사건이었다.

이어 1883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스탠퍼드대 총장과의 식사자리에서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 1978을 내놓았고, 그 이후에도 부시, 클린턴 등 전 미 대통령들이 주최한 백악관 만찬 등에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가 등장했다. 이토록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가 명사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유럽의 전통, 미국의 개척과 혁신의 정신, 그리고 나파밸리의 정열이 와인 한 병에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설이 된 와인메이커 마이크 그르기치
전설이 된 와인메이커 마이크 그르기치
전통을 잇고 있는  마이크 그르기치의 딸
전통을 잇고 있는 마이크 그르기치의 딸
마이크 그르기치의 조카
마이크 그르기치의 조카
100%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으로 수확

그르기치의 샤도네이가 대형 이벤트로 보수적인 유럽 와인업계를 경악시켰다면 그르기치 힐스의 카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전통적 양조 방식이 낳은 깊은 풍미로 인해 애호가들의 추종을 받는다. 프랑스 유명 소믈리에들이 집필한 ‘전설의 100대 와인(100 Vins de Legende)’에서 전설적인 미국 와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이 와인은 우아함, 섬세함, 미묘함, 복합성이 최고의 절정에 달했다는 평을 얻는다.

거대 미국 자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르기치 힐스는 가족경영을 추구하며 양질의 와인을 일관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와이너리는 러더포드, 욘트빌 등 나파밸리의 핵심적인 포도밭에 1.481㎢(366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약 7만 상자의 와인을 생산한다. 모든 와인은 100% 자가 수확 포도만을 사용하고 양조 및 병입까지 모든 절차가 와이너리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르기치는 “포도 알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 포도의 당도를 알 수 있다”며 자신은 그저 자연과 포도나무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일을 하게 내버려두고, 사람은 최소한만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들은 철저히 100% 바이오 다이내믹으로 만들어지며, 그르기치 힐스의 모든 포도밭들은 바이오 다이내믹 인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와이너리의 모든 전력을 태양광 에너지를 통해 얻어 사용한다. 그르기치는 미국 와인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큰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CIA 선정 ‘빈트너 홀 오브 페임(Vintners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대표 와인
그르기치 힐스 나파밸리 카버네 소비뇽
Grgich Hills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나파밸리의 핵심부에서 만들어진 그르기치 힐스 나파밸리 카버네 소비뇽은 검은 자두, 블랙베리 등의 짙고 검은 과실의 아로마가 감초와 모카, 은은한 미네랄 풍미와 우아하게 어우러진 와인이다. 꽉 짜인 타닌은 기분 좋은 산미와 어우러져 복합적인 구조감을 이루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우아해지는 풍미는 그르기치가 ‘와인의 심미주의자’로 불리는 까닭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품종 카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89%, 프티 베르도(Petit Verdot) 5%, 카버네 프랑(Cabernet Franc) 3%, 메를로(Merlot) 3%



그르기치 힐스 나파밸리 샤도네이
Grgich Hills Napa Valley Chardonnay
파리의 심판에서 쌓아올린 그르기치의 전설이 고스란히 담긴 나파밸리 샤도네이는 신선한 산도와 다층적인 감귤류 풍미가 매혹적인 와인이다. 청사과, 허니듀 멜론 등 과실의 사랑스러운 향이 베이킹 스파이스, 미네랄 풍미와 어우러져 복합적인 모습을 보인다. 깨끗하면서 집중도 있으며 구조감과 긴 여운은 화이트 와인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품종 샤도네이(Chardonnay) 100%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제공 나라셀라(www.naracella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