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기의 복합 불황과 퍼펙트 스톰이 우려되자 올 하반기에 들어 선진국, 신흥국 가릴 것 없이 경기부양책을 대거 쏟아내고 있다. 복합 불황과 퍼펙트 스톰 우려는 세계 경기 입장에서 아직까지는 ‘우려’ 성격이 짙지만 미리 반영되는 증시 입장에서는 분명히 ‘리스크’다.

4년 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숨통이 트일 무렵에 시작된 유럽 재정 위기가 2년 반이 넘도록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위기 이전보다 영향력이 더 커진 심리요인과 네트워킹 효과로 긍(肯·긍정)과 부(否·부정), 부(浮·부상)와 침(沈·침체)이 겹치면서 위기상시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2009년 2분기 이후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 경제도 꼭 3년이 되는 시점에서 재침체국면에 진입하느냐의 임계상황에 놓여 있다. 올 2분기 이후 미국, 중국, 독일 등 중심국의 제조업 경기 둔화세가 역력해 ‘일본식 복합 불황’과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가 경고한 ‘퍼펙트 스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어 하반기 이후 세계 경제 움직임이 더 주목되는 상황이다.

글로벌 증시도 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다. 특히 월가를 중심으로 지난해 9월 이후 미국 신용등급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지해온 트리플 A가 무너지면서 트라이펙터(trifector) 현상이 나타나자 고개를 들었던 ‘힌덴부르크 오멘’과 같은 시장붕괴설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한 나라 경제에서 트라이펙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경기선행과 동행, 후행지표가 동시에 부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합 불황과 퍼펙트 스톰 우려는 세계 경기 입장에서 아직까지는 ‘우려’ 성격이 짙지만 미리 반영되는 증시 입장에서는 분명히 ‘리스크’다. 이 때문에 각국은 거시 기조를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경기부양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된 위기로 정책 여지가 바닥이 난 데다 각국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든 정책은 정책당국의‘신호(signal)’대로 정책수용층이 ‘반응(res-ponse)’해야 의도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특히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은 비상국면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잘 작동되느냐 아니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작동되지 않는다면 위기 극복은 그만큼 지연되고 세계 경제는 복합 불황과 퍼펙트 스톰 우려가 가시화될 수 있다.

우려되는 것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에서 좀비국면의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경제 연령이 젊은 일부 신흥국에서도 조로화(早老化) 조짐이 일고 있다. 그만큼 정책 효과는 반감된다. 세계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져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것이라는 시각이 대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대 함정이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부양 수단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 등이 이 우려에 대한 경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정책 함정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동일한 맥락이다.

어떤 나라든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지난해까지 유지해 왔던 ‘반기’ 예측 기간을 올해 들어서는 ‘분기’로 단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주요국 경제를 보면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질 초기 단계에 나타났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 재정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잘 버티어 왔던 미국 등 주요국 경기가 주춤거리고 있는 가운데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책당국자에 대한 믿음은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최근 주요국 경제를 보면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질 초기 단계에 나타났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주요국 경제를 보면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질 초기 단계에 나타났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 기준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미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려 추가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한다 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시각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갈수록 글로벌 금융사들은 잠재 부실이 늘어나고 있는 데다 유럽 금융사들은 외부 긴급 수혈로 연명하는 상황이다. 선진국 재정수지는 갈수록 적자폭이 확대되고 있고 국민의 빚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따라서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하고 예측기관들도 직전 전망치의 잉크가 채 굳기도 전에 또 다른 전망치를 내놓기에 바쁘다.

세계 경기의 복합 불황과 퍼펙트 스톰이 우려되자 올 하반기에 들어 선진국, 신흥국 가릴 것 없이 경기부양책을 대거 쏟아내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9월에 발표됐던 일자리 창출 위주의 재정정책(일명 오바마 경기부양책)을 지속하고 있는 가운데 올 6월 말로 시한인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정책을 연장했다.

일본도 경기 침체의 주범인 엔고(円高)를 저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데 이어 최후의 부양 수단으로 소비세 인상을 어렵게 추진했다. 전통적으로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은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내렸고 두 차례에 걸쳐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을 추진했다.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들도 기준금리를 거의 한 달 간격으로 내리고 있다.

이번 각국의 부양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히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특히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점이다. 지난 6월 멕시코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끝나고 채택된 ‘로스카보스 공동선언문’에 일자리 창출 위주의 성장정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기부양책이 성공하려면 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시장과 시스템에 많이 의존하는 통화정책보다는 재정정책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이미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때문에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고 늘어나지 않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종전과 다른 새로운 정책 수단의 동원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돈을 더 푸는 문제를 놓고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벤 버냉키 Fed 의장 간의 ‘인플레 타깃팅’ 논쟁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경기를 부양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현재 2%인 인플레 타깃팅을 3∼4%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돈을 더 풀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버냉키 의장은 크루그먼 교수의 이런 주장을 ‘무모하다’고 반박한다. 지금처럼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높은 상황에서는 돈을 더 풀면 나중에 물가를 잡을 수 없다는 근거에서다.

인플레 타깃팅이란 중앙은행이 전통적 목표인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정한 억제선, 엄격히 따진다면 상한선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피셔의 화폐수량설(MV=PY, M은 통화·V는 유통 속도·P는 물가·Y는 국민소득)을 시간으로 미분하면 증가율로 전환되고 인플레로 재편성해 구한다.

이 선을 너무 낮게 설정하면 경기 부양보다 물가 안정을, 높게 설정하면 물가 안정보다 성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통화론자들은 전자를 ‘천사와의 키스’로, 후자를 ‘악마와의 키스’로 비유하기도 한다. 인플레 타깃팅 상한선을 높게 잡으면 그만큼 유동성을 더 풀 수 있는 통화정책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종전의 경우 디플레이션 타개책과 만성적인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플레 타깃팅 제도가 대안으로 급부상하지만 도입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이번에도 미국 경제 상황에 따라 두 학자 간의 논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이나 Fed 차원에서 인플레 타깃팅 상한선을 올려 잡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최근처럼 경기가 침체되고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플레 타깃팅과 같은 총수요 증대정책보다 ‘레이거노믹스’와 같은 공급중시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가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미국처럼 경기 회복이 완전치 못하고 4년 전에 풀린 유동성으로 인플레 기대심리가 높은 국가일수록 공급중시정책을 선호한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래퍼(A.B. Laffer)다. 레이거노믹스의 본질은 정부가 미리 짜인 수요에 맞춰 경기를 부양하는 총수요 증대정책과 달리 경제주체들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고 잃어버린 활력을 어떻게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인플레 타깃팅 논쟁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침체되는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레이거노믹스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은 고용지표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미국의 고용 사정을 보면 지난해 이후 성장률은 2% 내외에 그치고 있으나 실업률은 9.4%에서 8.2%로 크게 떨어지고 있다.

고용지표가 개선되는 것이 추세적이라면 그동안 경기회복세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고용 사정을 근거로 경기부양책을 주장했던 버냉키 의장과 인플레 타깃팅을 주장하는 크루그먼 교수를 동시에 곤혹스럽게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플레 타깃팅이란 중앙은행이 전통적 목표인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정한 억제선, 엄격히 따진다면 상한선을 말한다.
인플레 타깃팅이란 중앙은행이 전통적 목표인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정한 억제선, 엄격히 따진다면 상한선을 말한다.
반면 ‘일시적’이라면 경기 부양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잠복된 인플레 압력인 인플레 기대심리를 낮추기 위해서는 인플레 타깃팅보다는 레이거노믹스가 더 적절한 정책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인플레 타깃팅과 같은 총수요 증대정책과 레이거노믹스의 복합 처방이 필요하다. 요즘 들어 국제 금융시장에서 세계 각국이 모색하고 있는 경기부양책에 대한 효과가 종전만 못하고 글로벌 증시 앞날에 대한 시각이 밝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경제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종전과 다른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한 때다.

우리 경제도 경기가 둔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거론되는 위기론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 살 ‘성장대안 부재론’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나온 지 오래된, 일본 등 선진국은 견제하고 중국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다. 최근에는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증시를 중심으로 부는 ‘역핀볼 효과형 위기론’이다.

핀볼 효과란 제임스 버크의 명저의 제목으로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 하나가 도미노처럼 연결되고 점점 증폭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한다. 이 용어를 증시에 적용한다면 각각의 볼링 핀에 해당하는 주가 결정 요인인 경제 성장과 유동성, 기업 실적, 투자자 심리 등이 우호적으로 예상돼 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역핀볼 효과란 핀볼 효과의 정반대 상황이다. 경제 활력이 떨어짐에 따라 시중에 풀린 돈과 실물경제는 겉도는 가운데 갈수록 성장률과 기업 실적이 떨어진다. 따라서 투자자들의 심리는 위축되면서 주식거래량도 급격히 감소한다. 최근 우리 경제와 증시 상황을 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 위기론이 부는 배경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유럽 재정 위기가 재정통합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회원국 간의 의견 접근이 없을 때에는 한국 증시에 부는 위기론이 쉽게 누그러지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설령 상황이 급반전돼 주가가 올라간다 하더라도 최근처럼 돈이 안돌고 위기론이 나돌 때에는 상하 변동 폭이 크고 기업 혹은 업종 간 차별화가 심하게 나타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